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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칼럼] '87년 체제'의 리모델링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한국 정치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물론 누가 시키거나 계획된 결과는 아니다. 그동안 누적된 정부와 정치권의 무능과 무책임에 대한 실망에 더해 연말 국회의 답답한 교착상태, 그리고 철도파업의 혼란을 지켜보며 국민들로서는 우리 정치의 국가운영능력에 심각한 회의를 품게 되었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26년 전 민주화의 환호와 흥분 속에서 출범한 87년 체제가 여섯 대통령이 30년에 걸쳐 주관한 역사적 국가발전실험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국제정치전환기의 어려운 고비를 무사히 넘기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사회와 국가는 살아 숨쉬는 유기체이기에 87년 체제를 리모델링 또는 개조하려면 흥분이 아닌 극도의 인내와 지혜가 요구된다. 우선 헌법개정을 외쳐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겠지만 이는 자칫 현재의 정치적·사회적 대결구도와 논쟁을 그대로 연장하며 가열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금의 우리 체제가 지닌 병리현상을 치유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확실한 진단과 이에 기초한 처방을 내리는 필수과정이 정치권은 물론 각계각층에서 진지하게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한 처방을 구체화하는 데는 당연히 개헌 논의도 필요하게 되겠지만 이를 리모델링의 출발점으로 삼기보다는 한국 민주정치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노력이 개조작업의 첫걸음이 되어야 하겠다.

사실 지구촌의 21세기는 선진민주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예외 없이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렇듯 불안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87년 민주화체제는 비교적 잘 버텨왔다고 자타가 공인할 만하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87년 체제의 해체가 아니라 선진 민주복지국가로 향한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불합리한 관행을 정리하는 리모델링에 착수하자는 것이다.

리모델링 작업의 첫 번째 과제는 87년 체제의 한계에 대한 회고와 반성이어야 할 것이다. 장기집권에 대한 제어장치를 우선해야 되겠다는 광범위한 집념의 결과로 채택된 5년 단임제의 기본 취지에 대한 국민적 합의는 지금도 흔들림이 없다. 다만 4년 중임제, 즉 국민의 신임을 물어 대통령이 8년까지 집권할 수 있게 하자는 대안도 신중히 검토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권력의 집중에 대한 견제의 제도화 문제다. 우리의 정치문화에선 제왕적 권력집중을 반대하면서도 무작정 표류하는 토론이나 협상보다는 적시에 결단하고 실천에 옮기는 강력한 리더십을 선호하는 이율배반적인 두 요소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내각제보다는 대통령제를 선호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대통령으로의 과도한 권력집중을 견제하며 국민의 뜻과 힘을 국가운영에 제대로 주입하는 대의(代議)제도, 특히 국회와 정당의 위치와 활력을 어떻게 정상화하느냐가 한국 정치 리모델링의 핵심과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87년 체제의 출범 이후에도 한국의 대의민주주의, 즉 누가 누구를 어떻게 대표하느냐에 대해서는 혼미를 거듭해왔다. 처음 15년(1988~2003)의 민주화 과정이 비교적 순조로웠던 것으로 보인 것은 이 시기를 주름잡은 삼김(三金)이 각기 본인들이 국민의 다수가 아닌 소수의 지지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현실주의 정치인이었기에 타협과 공생의 정치를 수용한 결과였다. 그에 비해 지난 10여 년의 한국 정치는 이념화된 좌우 또는 보수·진보 대결이 격화되면서 양극단의 소수가 마치 국민 대다수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환상과 행동에 몰입하면서 민주적 대의정치의 파탄과 무력화를 가져오고 말았다. 한마디로 정치가 갈등을 조정하기보다는 조장하는 데 앞장선 것이다. 그 결과 민주정치의 안정을 담보하는 좌우 사이의 중간지대를 확대하기보다는 오히려 축소·분열을 조장함으로써 민주정치는 뒷걸음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로 이 위험한 추세를 바로잡는 것이 당면한 리모델링의 중심과제라고 하겠다.

이미 고전적인 보수와 진보, 국가와 시장 사이의 양자택일식 대결구도는 유효성을 잃었다는 것이 현대 정치이론의 보편적 결론이다. 그러기에 국가와 시장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연계시키느냐가 국가발전의 관건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여야 정당은 물론 각계각층이 양극단은 좁혀가고 중간을 확대하여 분열보다는 통합을 촉진하는 새로운 자세와 정책을 가다듬는 것이 시급하다. 그러한 출발이 이루어지면 개헌을 포함한 리모델링 작업이 조용히, 그러나 순조롭게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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