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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파 장멍린 “때론 공자처럼 때론 양코배기처럼”



1964년 6월 19일, 중국농촌부흥위원회 주임 장멍린(蔣夢麟·장몽린)이 타이베이에서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몇 년간 결혼문제로 화제를 뿌렸던 인물이다 보니 뒷얘기가 무성했다. 몇 명만 모였다 하면 장멍린과 여인들 간에 얽힌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대만과 홍콩은 물론이고 대륙도 마찬가지였다.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있어도 “말년에 주책 떨다 망신만 당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학교 문턱 밟아 본 사람치고, 대(大)교육자 장멍린이 누군지 모르면 중국인 축에 못 들었다.

원로 언론인 차오쥐런(曹聚人·조취인)의 글이 주목을 받았다. “만나 본 사람 중에 평생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을 후배 기자들에게 받은 적이 있다. 장멍린이 유일하다고 했더니 놀란 표정들을 지으며 이유를 물었다. 항상 이중적이고, 용기와 담력을 갖춘 지식인이다. 삐쩍 말랐지만 몸 전체가 쇳덩어리였다고 하자 다들 수긍했다.”

1886년 저장(浙江)성에서 태어난 장멍린은 선생 복이 많았다. 글을 깨우쳐 준 사숙(私塾) 선생부터가 당시엔 찾아보기 힘든 시골선비였다. 코흘리개들 앞에 놓고 엉뚱한 소리만 해댔다. “한동안 공자, 맹자는 몰라도 되는 시대가 온다. 외국어와 과학을 익혀야 사람 구실을 한다. 내가 이런 말했다고 집에 가서 절대 말하지 마라.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원수 질 사람이 많이 생긴다. 먼저 찾아가서 사과하는 사람이 이긴다. 나는 그렇게 못해서 이 모양 이 꼴이다. 내 말을 명심해라.” 몇 달 후 사숙 선생은 쫓겨났다. 배웅 나온 장멍린에게 한눈을 찡긋하고 마을을 떠났다.

장멍린은 고집이 셌다. 샤오싱(紹興)에 있는 중서학당(中西學堂)에 들어가겠다며 부모를 졸랐다. 열두 살 때였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 외국어와 과학의 세계에 빠져든 장멍린은 향시(鄕試)에도 합격했다. 부모의 체면을 세워준 장멍린은 미국 유학을 서둘렀다. 훗날 “지혜의 서(智慧的書)”로 극찬받은 영문 자서전의 기초를 이때 이미 마련했다.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를 깡그리 외어버렸다.

청(淸)제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가 즉위한 1908년, 장멍린은 태평양을 건넜다.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농학과 교육학을 전공하며 듀이(John Dewey)의 실용주의와 교육철학에 매료됐다. 졸업과 동시에 듀이의 지도를 받기 위해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3년 후, 안후이(安徽)성 출신 후스(胡適·호적)도 듀이의 문하에 들어왔다. 나이는 후스가 다섯 살 아래였지만 친구처럼 가깝게 지냈다.

장멍린과 후스는 미국 여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숱한 염문을 뿌리다 보니 영어 실력은 미국인 뺨칠 정도였다. 들킬 염려는 없었지만, 고향에 있는 조강지처를 생각하면 등에 식은땀이 났다. 지도교수 듀이도 사생활에는 관대했다.

1919년 1월 귀국한 두 사람은 베이징대학 총장 차이위안페이의 초빙을 받았다. 장멍린은 탁월한 행정가였다. 교수로 임용된 지 6개월 만에 총장서리로 학교 운영을 도맡았다. “공자처럼 인재를 양성하고, 노자처럼 처신하며, 양코배기들처럼 과학과 실무를 중요시하겠다”고 큰소리쳤다.

1927년 봄, 중국 공산당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리다자오가 교수형으로 삶을 마감했다. 유족들은 당장 먹고살 돈이 없었다. 생활비를 지원하자는 측과 “리다자오는 정치범이다. 정부와 충돌할 필요가 없다. 동료 교수였지만 선을 그어야 한다”는 의견이 충돌했다.

장멍린이 회의를 소집했다. 리다자오를 측은해 하던 교수들은 풀이 죽었다. 평소 장멍린은 공산당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리다자오와 사적인 왕래도 거의 없었다.

장멍린의 이중성은 빛을 발했다. “대학은 정치판이 아니다. 다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리다자오는 자신의 사상을 견지하다 교수대에 섰다. 매달 유족에게 위로금을 지급해야 한다”며 표결을 제의했다. 결과는 보나 마나였다.

장멍린의 교수 채용 방법은 독특했다. 전문성 외에 학력이나 경력 따위는 보지 않았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고전의 대가 첸무(錢穆·전목)를 강단에 세우고, 『자본론』에 해박한 학생운동 전문가에게 경제학과를 맡겼다. 쑨원(孫文·손문)이 보낸 “3천 제자를 이끌고, 나의 혁명사업을 도왔다(率領三千子弟, 助我革命)”는 휘호를 받고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1931년 가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했다. 정부는 공산당 소탕이 선결이라며 전쟁을 반대했다. 애국학생들의 시위로 교정이 어수선했다. 장멍린은 중국 교육사에 남을 결단을 내렸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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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