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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여왕 11일간의 실종 그 열쇠를 쥔 건 …

뮤지컬이라는 게 그렇다. 스타 출연진에 유명 창작진이 가세했다며 떠들썩한 대작이 오히려 실망을 주곤 한다. 주옥같은 노래만으로도 든든할 것 같은 주크박스 뮤지컬이 종종 더 심한 것을 보면, 새삼 옛말 그른 것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것이다.

뮤지컬 ‘아가사’ 2월 23일까지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

평범한 자원이라도 분명한 주제와 탁월한 구성력으로 멋지게 꿰어낸 ‘보배’는 의외로 작은 무대에서 만나게 된다. 창작 뮤지컬 ‘아가사’는 작은 사건에 무한 상상력을 발휘한 연극적 재미에 노래와 춤 등 뮤지컬만의 감각적 재미를 효과적으로 엮어, 잘 그려진 회로도처럼 적재적소에서 빛이 나는 무대였다.

공연계 흥행 보증수표로 자리 잡은 김수로 프로젝트 8탄. 2012년 ‘심리추리스릴러’란 신선한 시도로 작품성까지 인정받았던 ‘블랙메리포핀스’에 이은 두 번째 창작 뮤지컬로, 역시 심리추리극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 단순 볼거리·들을거리를 넘어 생각거리까지 제공하는 지적인 뮤지컬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심리추리의 대상이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라는 점. 1926년 12월, 애거사 크리스티가 실제로 열하루간 실종된 사건이 있었다. 드라이브를 간다며 나간 애거사의 차가 호숫가에서 발견되자 사람들은 자살을 의심했다. 열하루 만에 남편의 내연녀 이름으로 숙박 중이던 호텔에서 발견된 그녀는 기억을 잃은 상태. 회복에 1년이 걸렸지만, 이후 애거사는 틀에 박힌 삶을 벗어나 모험을 즐기며 전보다 훨씬 과감한 삶을 살았다. 연하남과 사랑에 빠져 재혼을 했고, 필명으로 로맨스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ABC 살인 사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등 대표작들도 모두 실종 이후 탄생했다. 하지만 열하루 동안의 일을 평생 입에 담지 않았다. 작품은 영원히 미궁에 빠져 있던 이 열하루를 무대 위로 불러낸다.

사람은 누구나 두 얼굴로 살아간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 정작 가족에게 잔인하다거나, 대쪽 같아 보이는 사람이 알고 보니 두 집 살림을 하더라는 얘기는 보통 사람에게도 흔한 경우. 하물며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유명인들은 속이 어떨까. ‘추리소설 여왕’의 흑백사진 속 무표정이 그녀의 미스터리한 내면을 웅변하는 듯하다. 살인사건이 전제인 추리소설을 업으로 쓰면서 ‘꿈속까지 따라오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나는 살의와는 무관한 사람,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살인을 이야기한다’고 가식을 떨던 작가의 내면을 소환하기 위해, 작품은 평온한 여생을 즐기고 있던 실종 27년 후의 그녀에게 편지를 보낸다.

발신인은 당시 사건을 목도한 가상인물 레이몬드. 추리작가를 꿈꾸던 이웃집 소년에게 아가사는 “추리소설을 쓰는 건 미궁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며 “평범한 사람이 살인자가 되는 동기가 미궁의 출구를 찾는 붉은 실, 곧 주제가 된다”고 가르친다. 극은 ‘여왕’을 오마주하듯 레이몬드가 쓰는 ‘아가사 크리스티 실종사건’의 원고에 ‘관계에서 동기를 찾는다’는 아가사의 소설 작법을 그대로 적용해 극중극 형식으로 아가사와 주변인들의 관계를 탐색해 간다. 외도에 빠진 남편과의 관계, 자극적인 이야기를 강요하는 편집자와의 관계, 원고를 빼돌리는 기자와의 관계, 속을 알 수 없던 하녀와의 관계… 과연 누가 동기를 쥐고 있을까? 27년 후의 현재와 실종 당시의 과거, 그 이전의 대과거를 오가며 가려진 비밀이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열하루의 진실을 쥐고 있던 건 그 누구도 아닌 아가사의 온화한 겉모습 이면에 숨겨진 ‘살의’였다. 내면의 고뇌라는 자칫 따분하기 쉬운 주제를 그녀의 로맨스 소설에 빗대어 치명적 매력을 가진 의문의 남자와의 충돌로 풀어낸 선택은 탁월했다. 마음이 통하는 낯선 존재와의 만남은 꽤나 유혹적이라, 루팡을 좇는 홈스라도 된 듯 아가사는 물론 관객까지 강하게 빨려든다. 열하루 동안 ‘살의’와 매혹적인 탱고는 그녀의 인생을 자유롭게 한 마법인 동시에 강한 반전의 드라마를 엮어내는 트릭이었다. 결국 미궁의 출구를 찾는 ‘붉은 실’은 아가사 자신이 쥐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삶이란 자기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의 연속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기의 내면과 화해할 때 비로소 온전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은 유명인에게만 국한된 얘기는 아닐 터. 우리는 종종 인생의 중요한 결정의 순간조차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곤 한다. 더 늦기 전에 내면에 솔직해진다면 아가사처럼 인생의 전성기가 뒤늦게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미궁에 빠진 ‘아가사 크리스티 실종 사건’을 이 정도 주제의식으로 풀어낸 무대라면, 무덤 속 그녀도 ‘붉은 실’을 놓지 않았다며 칭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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