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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핏속에 흐르는 건 화끈한 神氣와 정교한 文氣

수원 팔달문 옆 재래 시장에서 담소하는 고은 시인(오른쪽)과 최준식 교수. 고은 시인은 “하나의 한국인 초상을 만들 수 없다”고 했지만 최 교수는 ‘신바람’을 한국인의 초상으로 꼽았다. 조용철 기자
나는 누구인가? 숱한 ‘나’들이 모인 우리는 누구인가? 한반도에 모여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거나 지구촌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한국인은 누구인가? 또 어떤 문화유전자를 지녔는가? 국조 단군, 『삼국사기』 열전에 등장하는 장보고, 최치원, 평강공주, 계백, 효녀 지은, 도미의 아내. 그리고 세종대왕, 신사임당, 이순신…. 위대한 민족영웅들을 떠올려본다. 이어 김연아와 K팝 스타들까지…. 그렇다고 실체가 잡히는 건 아니다.

“한마디로 신기(神氣)죠. 하나 더 덧붙인다면 문기(文氣)고요.”

이화여대 한국학과 최준식 교수의 단평이다. 한국인이 갖고 있는 화끈하고 야성적인 기운이 ‘신기’다. 게다가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글공부를 중시해 왔다. 세련되고 정교한 또 다른 기질이 ‘문기’다. 이 두 기운이 융합하게 되면 세계적으로 곧잘 일을 내게 된다는 게 최 교수의 주장이다. 한국문화의 정체성은 신기와 문기 사이, 혹은 그 융합에 있다는 것.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노는 데는 귀신들이다. 그러면서도 교육열이 높고 부지런하다. 자연스럽고 정이 많기도 하다. 한국인의 초상이 어느 정도 그려지는 듯하다.

그런데 역사 속의 한국인들도 그랬을까? 그리고 다문화 시대,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인들도 그럴까? 시로 쓴 한민족의 호적부로 일컬어지는 『만인보(萬人譜)』의 고은 시인을 찾아갔다. ‘아시아 시인들의 샤먼’이란 칭호를 받는 시인은 2013년 가을, 경기도 안성에서 수원 광교산 기슭으로 이사했다. 30권에 이르는 장시에서 그리려 했던 한국인의 초상을 물었다.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다시 천고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끝내 한국인 얼굴 종합될 수 없을 것”
고은 시인은 심령 어린 목소리로 ‘광야’를 낭송했다. 시인은 『만인보』 11권에서 중학교 1학년 교과서로 처음 이육사라는 시인과 ‘광야’를 만났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중국 베이징에서 옥사한 민족시인의 절창은 오늘 세계적인 후배 시인에 의해 예찬된다. 웅장하다.

“시간 따로, 공간 따로 말하지 말고 인간을 주체로 다 아울러야 문화유전자가 보여요. 사람이 공간을 장소화시키는 거지. 나의 곳, 나의 고향, 나의 보금자리 하고 말이야. 광야, 무한대의 공간입니다. 그냥 밑도 끝도 없는 광야. 시간도 아주 까마득해.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충적세 훨씬 이전, 시생대나 고생대 그 유원한 시간을 생각해 봐. 이 태고(太古)의 시간 앞에서 미치는 거야. 나는 도통하기 싫어요. 그냥 미치고 싶어요. 인간도 뭐 이건 보통 인간이 아니고 초인이야. 니체의 초인이 아니고, 그냥 초인이야. 초인도 그냥 초인이 아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야. 대시간, 대공간, 그리고 초인이야. 한국인의 시간·공간 미학은 이렇게 거창해요. 그러면서도 만해 한용운의 님처럼 섬세한 미학도 있거든.”

일찍이 한반도를 ‘때려 죽여도 때려 죽여도 살아나는 시의 땅’이라고 정의했던 고은 시인이다. 국토는 광야가 아닐지라도 ‘시의 땅’은 광야이며 맑고 푸른 하늘이다. 사람 또한 초인들이다.

“선생님은 『만인보』에서 5600여 명에 이르는 등장인물들과 만나셨잖아요. 그럴 때, 한국인 하면 떠오르는 한 가지 개념이 있던가요?” 최 교수가 물었다.

“나는 하나의 한국인 초상을 만드는 데 주저합니다. 오만해서가 아니고 조심스러워서 개념 짓지 않습니다. 감당할 수가 없어요. 한국인이 무엇인지 몰라야지요. 누구인지 몰라야 해요. 아시아 전역 모든 땅의 모든 요소들이 합쳐져서 빚어온 시간의 혼혈, 공간의 혼혈, 인간의 혼혈이니까요. 굳이 중국인, 일본인과 다른 한국인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요? 세계는 우리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낸 고독입니다. 스스로 만들어낸 범주의 섬에 갇히는 거지. 나는 ‘한국인은 이렇다. 혹은 이래야 한다’는 규정이나 당위를 가지고 『만인보』를 쓰지 않았어요. 조금 아는 것으로 전체를 그리려 하면 틀리게 되니까요. 내 심장 속에 백지를 만들어서 그 백지 하나하나에 얼굴을 그려간 것이지요. 어떤 누구는 어떤 누구에 의해서 사람이라는 겁니다.”

고은 시인은 아직도 심중에 『만인보』가 진행 중이라 했다. 하지만 끝내 한국인의 얼굴이 종합될 수는 없을 거라고 예단했다. 종합될 수 없다는 이 절망이 그가 한국인을 바라보는 영원한 꿈이란다.

정조대왕 시절 축조된 수원의 팔달문 옆 재래시장으로 옮겨 사람들 속에 묻혔다. 오가며 먹고 마시고 입고서 울고 웃다 간 사람들이 스쳐간다. 시장에서 살아가느라 목청을 돋우고 어깨를 부딪쳤을 그 한국인들이 보인다. ‘밤낮 모르고 퍼부어 내린 시의 유성우’를 묶어 펴낸 신작 시집 『무제시편』에서 시인은 노래했다.

팔달의 하늘 아래/광교의 바람소리를 소매 내려 듣는다/다음날/장안문 밖에서/술 석 잔을 마신다/옛날 외상술이 그리웠다.

시인과 한국학자 사이에서 시장통을 거닐었다.

“지난 누 천 년 동안 보인 한국인의 모습은 실로 다양하죠. 하지만 한국인만의 고유한 특성은 있는 것 같습니다. 최치원이 말한 풍류도 같은 것이죠. 풍류도란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뭇 신령들과 통해 무아경 속에서 자신의 기운을 있는 힘껏 분출하는 겁니다. 저는 이 힘을 신기라고 부릅니다. 신바람 혹은 신명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 기운이 20세기 후반부터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지구상 어떤 민족도 이룩하지 못한 위업을 달성했지요. 세계에서 제일 못살던 나라에서 선진국으로 부상한 겁니다. 특히 제국주의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서 선진국이 된 유일한 나라가 우리나라라는 점에서 놀랍습니다. 우리 한국인은 과거 불교와 유교의 높은 상층 문화와 샤머니즘의 역동적인 기층문화를 바탕으로 계속 발전하리라고 봅니다.”

“지금까지 얼빠진 모습 … 이제 바꿔야”
최 교수는 예전에는 매사를 대충대충, 빨리빨리만 했던 한국인들이 이제는 대충해도 수준 높은 대충이라고 했다. 서양인이 보기에 대단히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대로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모습은 우리의 전통예술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우리 전통 예술은 질서보다는 파격을, 계획적이라기보다는 무계획을 지향한다. 그리고 무기교다. 그래서 자유분방하기 짝이 없다. 이런 기질이 문화예술로 살아난다면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될 거라는 얘기다.

“철학을 앞세우고 경제와 과학이 뒤따라가게 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한양원옹(왼쪽)과 “당당하면서도 예의 바른 여성이 좋다”는 석조은씨.
이런 무질서한 경향성과 무계획한 지향성은 때로 ‘얼빠진 한국인’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일생 동안 의관정제하고 한국인으로 살아왔다는 한양원(90) 겨레얼살리기운동본부 이사장은 지적한다.

“우리가 반만년 역사, 반만년 역사 그러지만 언제 그렇게 잘살아서 인류국가에 덕을 쌓은 적이 있습니까?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비롯해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선진국 닮으려고만 했지요. 잘살아보자며 경제와 과학만 중시했지요. 그거면 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정신문명이 피폐해졌어요. 한국인의 얼이 실종되다시피 했단 말입니다. 경제와 과학, 중요하지요. 하지만 우리다움을 지켜가면서 해야 옳았어요. 정신문화, 곧 철학을 앞세우고 경제와 과학이 뒤따라가게 해야지, 순서를 바꿔서 그야말로 얼이 빠진 겨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바꿔야 합니다. 상극과 전쟁의 시대, 황금만능시대가 다하면 야반도둑같이 상생의 시대와 평화가 옵니다. 도덕만능의 시대가 와요. 인성교육과 예절문화의 힘으로요. 이제부터라도 가정과 학교, 사회가 함께 인성교육을 하고 예절문화를 함양해야 합니다. 정신문화 융성이 되면 저절로 생활문화 전반이 융성하게 돼요.”

어르신의 옥담(玉談)은 울림이 컸다.

서울 충무로 ‘한국의 집’에서 전통혼례를 담당하는 86년생 석조은(여)씨는 매우 희망적이다. 한국처럼 작은 나라에서 스포츠나 음악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세계적인 스타들이 쏟아지는 게 자랑스럽다고 한다.

“전통적인 한국 여성의 미덕이라면 지고지순과 현모양처였잖아요. 지금은 그런 여성상은 거의 다 사라지고 없다고 봐야겠죠. 대신 자기주장이 분명하고 당당한 한국 여성이 주류예요. 외국인들을 많이 접하는 저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애써요. 저는 당당하게 자기 꿈을 키워나가는 여성상이 좋습니다. 항상 태양처럼 밝게 살자. 이게 저의 좌우명이랍니다.”

고은 시인은 말했다. “한국인의 초상이 하나로 완성되자마자 한국인은 없어진다”고. 완성되자마자 한국인 고유의 초상은 끝나고 동아시아인이고, 아시아인이고, 세계인이고, 지구인이고, 우주인이고, 더 먼 안드로메다로 가야 하는 거란다.

최준식 교수는 “우리 한국인들은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이 있다”고 했다. 남을 한 번도 해치지 않고 제 능력으로 꼴찌에서 상위로 올라갔으니 어려운 나라들을 끌어올려야 하는 소명이란다. 많은 개발도상국은 자기들보다 못살던 한국이 이렇게 발전했으니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게 분명하다.

한국인의 초상은, 당대를 사는 한국인들이 세계를 무대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인은 상생과 평화를 지향해 왔다. 숱한 외침을 받으면서도 끝내 평화를 견지해 왔다. 세계가 문화를 지향하는 시대사조에 발맞춰 한국인들의 역할이 분명해졌다. 문화강국 대한민국 만들기에서 나아가 인류에게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정신문화’의 확산이다. 그것은 인류에게 많은 해악을 끼쳤던 근대 제국주의 문명과 물질만능 문화를 넘어서는 대안이기도 하다.



중앙SUNDAY-아산정책연구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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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