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DNA는 당신이 한 일 기억해 ‘꼬리표’로 남긴다

1. 일란성 쌍둥이라도 태아 상태에서 DNA ‘꼬리표’가 달리 붙을 수 있다.
2013년 8월 영국 경찰은 성폭행 현장의 DNA 샘플과 일치하는 일란성 쌍둥이를 검거했다. 둘 중 하나가 범인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누가 진범인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더 이상의 다른 증거도 없는 상황, 쌍둥이 중 진범을 가려낼 방법이 없을까? 한 가지 있기는 하다. 지문이다. 놀랍게도 일란성 쌍둥이의 26%는 지문이 서로 다르다. 태반 내에서 두 태아에 가해지는 힘이 늘 같지는 않아서 피부 형성 시 손가락 주름이 달라질 수 있어서다.

쌍둥이가 장갑을 껴서 지문을 전혀 안 남겼거나 지문마저 같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둘 중 진범을 고를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인가? 쌍둥이 용의자 사이에서 영국 경찰의 고민이 깊어졌으나 마침내 진짜 범인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막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라도 DNA 뼈대는 같지만 DNA에 달라붙는 ‘메틸기(基)’란 ‘꼬리표’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유전학 학술지(Genome Research)’ 올 1월호에 발표됐기 때문이다(사진 1).

이제 영국 경찰이 현장 샘플과 쌍둥이 형제의 DNA ‘꼬리표’를 비교하면 사건이 종료된다. DNA에 달라붙은 ‘꼬리표’, 이것이 쌍둥이 중 진범을 가려내는 새로운 기법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기술은 빙산의 일각이다.

2. 나이가 든 쌍둥이는 후성에 의해 몸 건강 상태도 서로 다르다. 3. DNA의 꼬리표(밝은 부분)는 DNA 뼈대에 부착된다.
살아온 환경이 유전자에 메모 남겨
DNA ‘꼬리표’는 그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들에 시원한 답을 제공한다. 즉 쌍둥이라도 왜 누구는 암에 걸리고 누구는 멀쩡한지, 학대받은 아이의 ‘꼬리표’는 어디에 붙어서 아이를 자살에 이르게 하는지, 또 이런 아이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됐다. 수정란이 된 이후에 겪는 환경, 즉 ‘후성(後成)’이 후세에 전달된다는 ‘후성 유전학’이 최근 각광받고 있다.

“그는 사람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혼자 웅얼거리며 고개를 계속 흔들어댔다.” 더스틴 호프먼 주연의 영화 ‘레인맨’의 모습이다. ‘레인맨’은 자폐증 환자다. 자폐증 환자는 미국에선 150명 중 1명, 한국에선 38명 중 1명꼴이다. 그동안 이 병은 뇌 발달 관련 유전자의 이상에 의해 생기는 유전병으로만 알고 있었다. 유전적으론 동일한 사람인 일란성 쌍둥이라면 당연히 둘 다 자폐증에 걸려야 한다. 하지만 자폐증 환자 중 일란성 쌍둥이의 30%는 한 사람만 자폐증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정상이다. 이런 현상은 자폐증뿐만이 아니다. 어릴 적엔 부모조차 혼동할 만큼 완벽하게 닮은 쌍둥이를 일흔 살이 돼 비교해보면 두 사람의 몸 상태가 서로 다르다. 특히 암·뇌질환의 발생 여부를 조사해보면 두 사람이 같은 병에 걸린 경우가 전체의 20%도 안 된다(사진 2).

왜 완벽히 같은 유전자를 가졌는데 누구는 병에 걸리고 누구는 정상인가? DNA 순서 이외에 무엇이 두 사람을 다르게 만드는 것일까? 추측 가능한 오직 한 가지 차이는 쌍둥이들이 살아온 환경이다. 즉 누구와 살았는지, 어디에서 살았는지, 무엇을 먹었는지가 똑같은 유전자를 달리 행동하도록 만든 요인이다. 어떤 사람이 보라색을 좋아하고, 삭힌 홍어를 먹으면 설사를 하며, 불쌍한 사람을 보면 지갑을 연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성품은 타고난 천성일까, 아니면 자라는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까? 즉 사람을 결정짓는 것은 본성(Nature)인가, 양육(Nuture)인가? 다시 말해 ‘DNA(유전자)’인가 ‘사는 환경’인가? 과학은 지금까지도 그 답을 찾고 있다. 정답부터 말하자면 ‘두 개 모두 작용한다’이다. 즉 우리는 부모가 준 DNA, 그리고 살면서 접하는 환경, 이 두 가지에 의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다. 그런데 환경이 우리 몸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는 것일까? 이 질문에 후성 유전학은 답한다. ‘당신이 지난여름에 한 일은 DNA에 ‘꼬리표’로 흔적을 남기고 대물림된다’고.

필자 주위엔 교수 부부가 몇 명 있다. 둘 다 가방끈이 길어서인지 자식들도 학교 성적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수두룩하다. 원래는 좋은 IQ 유전자를 가진 아이지만 ‘공부만이 살 길’이란 부모의 폭풍 잔소리 덕분에 ‘꼬리표’가 주렁주렁 붙어서 공부 유전자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의 학업을 독려하는 것은 괜찮지만 한국의 많은 부모들은 학업을 이유로 자녀를 학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부모와 자녀 모두를 위해 속히 개선돼야 할 일이다.

‘신경정신약학회지’ 지난해 1월호엔 아동학대가 뇌 DNA에 ‘꼬리표’를 촘촘히 붙여서 이로 인해 자살에 이르게 한다는 연구 결과가 실렸다. 이 ‘꼬리표’는 ‘메틸기’ 또는 ‘에틸기’의 분자이고 이 분자들이 DNA나 DNA를 둘러싼 히스톤이라는 단백질에 착 달라붙는다(사진 3). 이 ‘꼬리표’의 종류, 붙은 정도에 따라 그 유전자의 작동 여부가 달라진다.

아이를 학대하는 일뿐만이 아니고 부모가 헤로인 등 마약을 해도 DNA에 ‘꼬리표’가 붙는다. ‘신경과학(Neuroscience)’ 2013년 9월호에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헤로인을 장기 복용하면 뇌의 행동이나 중독·집착과 연관된 유전자에 ‘꼬리표’가 부착돼 후손에게 전달된다. 예컨대 할아버지가 아무리 좋은 유전자를 남겨도 아버지가 중간에 마약에 찌든다면 손자는 할아버지의 좋은 유전자를 ‘꼬리표’가 붙은 상태로 받아 결국 나쁜 손자가 된다. DNA가 아닌 DNA ‘꼬리표’가 당신 인생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헤로인 중독이나 2세 아이의 비만, 자폐증 관련 유전자도 결국은 사람 의지로 조절된다. 일러스트 박정주
환경호르몬도 ‘꼬리표’ 역할
아동 학대나 마약 중독 등 뇌에 강한 자극을 주는 행동만이 DNA에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아니다. 플라스틱 물통도 ‘꼬리표’ 다는 일에 참여한다. 일부 PC(폴리카보네이트) 계열의 플라스틱을 만들 때 첨가하는 비스페놀 A는 환경호르몬이다. 환경호르몬은 생체 내에서 마치 호르몬처럼 행동해서 수컷을 암컷화하고 암수 비율을 교란시킨다. 2012년 ‘미국의학협회지(JAMA)’에 따르면 비스페놀 A는 특정 유전자에 메틸기 ‘꼬리표’를 빽빽하게 붙였다. 그 결과 실험쥐의 털색이 모두 변했고 뚱뚱해졌다. 주거환경 자체도 헤로인만큼 삶을 바꿔놓는다는 의미다.

2011년 ‘미국당뇨병학회지(Diabetes)’엔 임신 기간 중에 임신부가 다이어트를 심하게 하면 태아가 이를 비상 사태로 오인해 식사 관련 DNA에 ‘꼬리표’를 부지런히 단다는 연구 결과가 제시됐다. 이 ‘꼬리표’ 탓에 태아는 태어나서 비만으로 직행할 수 있다. 이 ‘꼬리표’는 60년 이상 붙어있다. 게다가 태아 때나 어릴 적에 붙은 ‘꼬리표’가 나이 들어 붙는 ‘꼬리표’보다 더 세게 붙는다. 태아 내에서 발달하고 있는 정자나 난자에도 ‘꼬리표’가 붙으므로 결국 태아 때 엄마가 먹던 음식이 3대인 손자까지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할머니의 무분별한 다이어트가 손자를 뚱보로 만들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성은 태반을 통해 태아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지만 남성은 태반과 무관하다. 그럼에도 할아버지의 평소 생활이 손자에게 전달된다. 실제로 ‘세포(Cell)’지 2013년 9월호엔 남자에게 엽산(비타민B군의 일종)이 부족하면 정자의 DNA에 ‘꼬리표’가 붙고 이 부착물이 새로운 정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가기도 하지만 일부는 3∼4세대까지 전달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채소에 함유된 엽산의 섭취가 부족하면 심각한 발달장애가 발생한다. 남자의 ‘꼬리표’ 성적도 튼튼한 아이를 만드는 데 중요하다는 뜻이다.

헤로인 복용으로 붙은 ‘꼬리표’를 떼어내 깨끗한 DNA를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네이처 뉴스(Nature News)’ 올해 1월호에 소개된 연구논문은 DNA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캐나다 몬트리올 동부지역 빈민가에서 태어난 문제 아이들 1000명을 30년간 개인적으로 관찰한 최초의 대규모·장기 연구이기에 그 결과는 신빙성이 있다. 아이의 엄마들은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대부분 20세 미만에 첫 아이를 낳았으며 육아에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태어난 아이들은 당시의 빈민가 아이들처럼 어려서부터 공격적이었다. 이런 문제 아이들에게 상담교사들이 직접 생활지도를 했다. 영양상태도 챙기고 술·마약·담배 등을 멀리하도록 방문·상담했다.

15년간의 노력 결과 1000명의 문제 청소년 중 이런 치유를 받은 아이들은 55%의 학교 중퇴율과 22%의 범죄 재범률을 보였다. 반면 아무 조치를 하지 않은 그룹의 중퇴율과 재범률은 각각 68%·33%에 달했다. 분노 행동과 관련된 유전자의 ‘꼬리표’도 조사해 봤다. 아이들에게 붙었던 분노의 ‘꼬리표’가 치유그룹 아이들에선 확실히 적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복구 노력을 일찍 하면 할수록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특히 6세 이전의 환경이 이런 ‘꼬리표’를 붙게 하는 데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니다.

‘꼬리표’ 연구가 암 연구의 미(未)개척지
뇌종양 환자의 80%는 정상인과 DNA가 같다. DNA의 염기 순서가 변해 돌연변이가 돼야만 암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뇌종양의 80%는 DNA가 켜지고 꺼지는 스위치가 잘못된 결과다. 전립선암은 서구의 남성암 중 1위다. 이 암 환자의 90%에서 전립선암 관련 DNA에 ‘꼬리표’가 빽빽하게 붙어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전립선 환자를 다루는 의사들은 이 ‘꼬리표’를 떼어 내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이 작업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흔히 유전체 프로젝트로 알려진 ‘DNA 순서지도’ 대신 ‘DNA 꼬리표 지도’가 필요하다.

운명이라고 여겼던 유전병도 치료되는 세상이다. DNA 순서가 달라서 생기는 유전병은 DNA 자체를 아예 정상으로 바꾸는 ‘유전자 치료법’으로 고칠 수 있다. 이제 DNA 순서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DNA 스위치임을 우리는 안다. 이 스위치의 중요 부속인 ‘꼬리표’가 항해하는 배의 키처럼 우리의 일생을 결정한다.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초원이’는 자폐증 아이다. 20살이 되어도 5살 지능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엄마와 주위 사람들의 믿음과 끈질긴 노력으로 그는 42.195㎞의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다. 초원이의 뇌에 붙은 ‘꼬리표’를 주변 사람의 정성 어린 사랑으로 떼어낸 것이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DNA, 하지만 이것을 조절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인간은 노력으로 주어진 삶보다 훨씬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DNA의 ‘꼬리표’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김은기 서울대 화공과 졸업. 미국 조지아텍 공학박사. 한국생물공학회장 역임. 피부소재 국가연구실장(NRL) 역임. 한국과학창의재단 STS사업단에서 바이오 콘텐트를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www.biocnc.com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