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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상 부모 지키려고 … 소년 김태촌이 믿은 건 폭력

인천 뉴송도호텔 황익수 사장 피습사건과 관련, 1986년 9월 목포에서 검거돼 인천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는 김태촌(오른쪽)과 부하들. [중앙포토]


바람직한 인생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신문 기자, 저술가, 교수, 공직자 등의 삶을 살면서 각계각층의 수많은 인물을 만나고 또 다양한 사건들을 접해온 필자가 자신의 경험담을 토대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진단하며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전국 3대 폭력조직으로 꼽혔던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씨가 지병으로 입원 중인 서울대병원에서 오늘 사망했습니다. 올해 나이 만 64세인 김씨는….”

2013년 1월 모처럼 집에서 TV를 보던 나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김태촌은 협심증, 저혈압, 폐렴 등을 복합적으로 앓고 있었다. 마피아 같은 대부분의 조직범죄(Organized Crime) 두목들도 심장 질환으로 고생하다 간다. 평생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심장을 혹사시키기 때문이다. 운 좋게 자리를 지켜오더라도 결국 자기 심장의 반란으로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미국의 한 조직범죄 전문가는 “늘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조폭 두목들은, 어떤 의미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겁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평했다.


“건장한 청년들 피투성이” 제보가 발단
1986년 광복절 전야인 8월 14일 오후 10시 반. 서울 강남의 대형 룸살롱 서진회관 17호실에서 인근 조폭인 ‘맘보파’ 7명이 출소한 조직원의 축하연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옆방인 16호실에서는 이 업소를 관리하는 ‘서울 목포파’ 8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유도대학 선후배로 구성된 신흥 주먹인 목포파는 호남 조폭의 방계인 맘보파가 자기네 구역을 침범, 술을 마시는 것이 몹시 신경 쓰였다. 그러던 중 사소한 사건이 일어났다. 맘보파 일행이 종업원을 때린 것이다. 목포파 조직원들은 이번 기회에 이들을 ‘제압’하겠다며 생선회 칼과 야구방망이로 무장한 채 17호실로 난입했다. 무기도 없고 잔뜩 술에 취해 있던 맘보파 7명은 속수무책, 4명이 즉사했고 3명도 만신창이가 됐다.

한 시간 뒤인 11시 반, 신문사에 다급한 목소리의 시민 전화가 걸려 왔다. 서울 사당동 소재 D병원에 건장한 청년 5~6명이 피투성이가 된 채 실려 들어갔다는 제보였다.

그날 당직이 바로 나였다. 이런 경우 당직은 보통 바깥에서 야근하는 기자에게 취재를 맡기는데, 사건 기자 3년차로 잔뜩 물이 오른 나는 마감시간이 임박한 데다 호기심도 발동해 직접 취재에 나섰다. 파출소 등에 일일이 전화를 했고 ‘비장(?)의 방법’을 동원, 사건을 파악해 데스크(사회부 당직팀장)에 보고했다.

데스크는 여기에 서울을 동·서쪽으로 나눠 돌고 있던 야근 기자들의 현장 취재까지 곁들여 기사를 내보냈다. 발생 두 시간 만에 취재에서 보도까지 완료된 것이다.

이 기사는 신문 1면 톱으로 보도돼 광복절 아침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 사건이 유명한 ‘서진 룸살롱 살인 사건’이다. 한국이 가난에서 벗어나 중진국 대열에 낀 80년대 중반, 서울 강남 유흥가를 낀 본격적인 조폭들의 출현을 처음 알린 사건이었다.

당시 시민 제보와 재빠른 취재가 없었더라면 경찰은 쉬쉬하며 사건을 덮었거나 단순치사 사건으로 처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건은 발생부터 각 신문마다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일파만파의 영향력을 불러일으켰다.

장안의 화제는 단연 조직폭력배의 세계에 집중됐다. 지금은 ‘조폭’이란 단어가 일상화됐지만 당시에는 생소했다. 역대 한국 주먹 하면 자유당 시대에 김두한, 이정재, 이화룡 등이 손꼽혔고 이후 명동 신상사파가 명맥을 유지했지만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잔뜩 움츠리고 있던 시대였다. 그런 가운데 드디어 한국에도 미국 마피아 같은 조직범죄가 나타난 것이다.


자장면 배달하는 척하며 조사실 진입
여기서 김태촌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전남 광주 폭력조직인 서방파의 행동대장으로 폭력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김씨는 1980년대 들어 실세인 전경환(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새마을운동본부 회장 등과 밀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김씨는 인천 뉴송도 관광호텔 나이트클럽 사장을 청부폭력한 혐의로 수배 중이다가 검거돼 인천 경찰서로 압송됐다. 나는 인천으로 내려갔다.

김태촌이 경찰서 3층에서 조사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저녁때 중국집 종업원과 함께 배달부 행세를 하며 들어갔다. 김태촌은 조사실 정중앙에 여유만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종업원이 자장면 그릇을 놓고 나가자, 나만 조사실에 남았다. 그때 고참으로 보이는 형사가 나를 보았다.

“저 사람 누구야?”

“나 신문기자요. 김태촌씨와 얘기 좀 합시다.”

“뭐야. 기자가 여기 왜 들어와? 빨리 내보내.”

그때 나는 김태촌을 바라보며 이렇게 외쳤다. “잠깐, 김태촌씨. 당신 그동안 언론에 보도된 내용 불만 많지 않습니까?”

“그래요. 소설 많이 썼습디다.”

김태촌이 불만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 이유는…우리 모두가 당신을 전혀 모른 채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거요. 이제 당신을 만났으니 당신 이야기를 직접 쓰겠소.”

“그걸 내가 어떻게 믿소?”

“우리 사나이끼리 약속합시다. 당신 조직이 있잖소. 만약 당신이 내게 한 이야기와 다르게 보도되면 내게 보복하시오.”

나의 좀 ‘과격한’ 제안에 그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참 형사에게 말했다.

“형님, 나… 저 기자하고 얘기 좀 하고 싶소.”

이렇게 돼서 경찰 묵인하에 김태촌과의 단독 인터뷰가 이뤄졌다.

“황 사장과 호텔 나이트클럽을 공동 운영하기로 한 뒤 고향 친구인 김병조(개그맨)와 평소 매니저와 친한 가수 혜은이, 김연자 등을 우정 출연시켜 돈을 벌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황 사장이 약속은 안 지키고 도리어 나를 모함했어요. 그래서 ‘저 영감, 등산 못 가게 다리나 분질러 놔야겠다’고 생각했죠.”

김태촌은 또 자기 조직이 70년대 후반에 가장 강했는데 자신의 구속 이후 약화됐으며, 본인 특기는 칼이 아니라 주먹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았다. 검사 앞에서나 자백할 내용을 기자에게 미리 다 말해버린 셈이다. 이후 생생한 조직폭력배들의 세계를 조금씩 알게 됐다.


라이벌 조양은도 평생 폭력에 빠져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

김태촌은 16세 때 불량배들이 노점상을 하는 부모에게 행패 부리는 것을 제어하려다 폭력 세계에 들어왔다고 했다. 결국 본인도 평생 폭력의 그늘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86년 인터뷰할 때만 해도 30대 후반의 그에게는 순수한 기색이 있었다.

“이런 사건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우선 나 자신이 밉지만 인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앞으로 교도소에서 성경책을 보면서 신앙에 몰두하겠습니다. 국민들에게 죄송합니다.”

그는 이후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뒤 실제로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도움으로 신앙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다시 구속되고 이후 죽을 때까지 여러 범죄에 연루됐다. 간혹 그의 얼굴을 TV에서 보면 인상은 더욱 표독스러워졌고 눈빛도 나빴다.

그것은 김태촌의 라이벌인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도 마찬가지다. 그는 75년 서울 명동을 주름잡던 신상사파를 야구방망이와 회칼로 기습 공격한 ‘명동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으로 일약 거물로 떠올랐다.

95년 초 감옥에서 출소한 조양은도 개과천선하겠다고 약속하고 결혼과 영화 ‘보스’의 제작·주연 등의 새로운 모습을 보이려고 했으나 결국 내면에 숨겨진 범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김태촌과 조양은은 원천적으로 법이 금지한 폭력을 업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매일 범법과 일탈 행위를 반복하다 보니 자연 범죄 자체가 습관화되고 죄책감도 사라진다.


겉으론 스마트한 사회, 속은 더 난폭
그러나 범죄는 조폭 같은 ‘특별한’ 이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서진 룸살롱사건 보도 때도 그랬다.

당시 사건의 상당 부분을 내가 취재했지만 다음 날 출근해보니, 공(功)은 당직 데스크의 것으로 돼 있었다. 내 취재기는 그의 무용담으로 둔갑했다. 나는 선배의 그 뻔뻔한 행각에 하소연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기만 했다. 이른바 명문대를 나오고 일류 직장을 다니면서 후배의 공을 가로채다니…. (그는 몇 년 뒤 신문사를 떠났고 나중에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우리는 김태촌의 폭력성을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폭력성은 간과하고 있다. 남을 힘으로 제압하고, 군림하고, 남의 것을 빼앗고 싶어 하는 그 욕망 말이다. 김태촌이 눈에 보이는 주먹으로 폭력성을 나타냈다면 우리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폭력성을 나타낸다.

무심코 툭 던진 말 한마디, 문자 메시지, 댓글, 눈빛, 표정, 생각의 편린이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으며, 반대로 그런 공격에 엄청난 내상(內傷)을 입을 수도 있다.

지금 21세기 사회는 겉으로는 스마트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예전보다 훨씬 더 난폭해졌다. 날로 심화되는 왕따, 막말, 사이버 폭력, 성도착증, 나아가 ‘묻지마 살인’과 무차별 테러 등….

또한 폭력성은 남을 넘어서 바로 자신을 향한 자해(自害) 행위로 변형된다. 천륜을 어기는 존속살인극, 가족과의 동반자살 등은 결국 자기에 대한 극단적인 폭력이다. ‘강렬한 햇빛’ 때문이라는 엉뚱한 이유로 사람을 살해한,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1942)의 주인공 뫼르소는 21세기 관점에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21세기에 이처럼 폭력이 더욱 흉포화 혹은 내재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정치나 경제, 이념, 시스템 등 외부 탓으로 돌리지만 그건 아닌 듯하다. 지금 우리는 역사상 가장 발전된 인권 및 민주 시스템 속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시대 폭력적 상황의 상당 부분은 우리 내면의 폭력성에서 비롯된다. 김태촌이 일상화된 폭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평생 폭력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듯이, 우리도 마음의 폭력성을 일상에서 대수롭지 않게, 거리낌 없이 발산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김태촌과 공범관계다.




함영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 jmedia21@naver.com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민대 겸임교수를 거쳐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마흔이 내게 준 선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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