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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흔든 시 한 줄] 이해인 수녀

피정(避靜) 중이라 촬영을 할 수 없는 이해인 수녀는 낭송 음성 녹음을 보내왔다. 낭송 자료화면은 joongang.co.kr.
밥상을 들고 나간 자리에
밥풀 하나가 오도마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바깥을 나가려든 참에 다시 되돌아보아도
밥풀은 흰 성자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
바쁜 발걸음 아래에서도 발길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밟히면 그 순간 으깨어지고 마는 두려움,
그런 두려움도 없이
이 아침, 분주한 방바닥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이 어린 성자의 얼굴로

- 권영상 ‘밥풀’


방바닥에 떨어진 밥풀 한 알에서 성자의 모습을 발견한 시인의 예리한 감성과 통찰에 감탄하면서 이 시를 읽으면 내 마음이 따뜻하고 차분해진다. 이 시를 지은 이의 동시집 표제작이기도 한 시 ‘밥풀’을 나는 더러 강의 중에 인용하고 많은 친지들에게 적어 보내기도 했다.

 내가 사는 수녀원에서는 8개의 밥상에 10명씩 앉아서 밥을 먹는데 어느 땐 서열 순으로 어느 땐 또 다른 방식으로 섞여서 앉기도 한다. 나는 요즘 5번 밥상의 큰언니인데 어느 날 내 축일을 축하해 주는 카드에 어느 아우수녀가 ‘수녀님과 한 식탁임을 기뻐하는 밥알들 올림’이라고 적어 준 게 인상적이었다. 사실 큰 공동체 안에 함께 살다보면 밥알들끼리 서로 좋아해서 붙어 있기도 하지만 다름에서 오는 사소한 갈등과 아픔을 못 견뎌 갈라지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한다. 우리가 같은 집안에서 밥을 먹고 산다는 것은 그만큼의 인내와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더욱 귀한 인연일 것이다. 하루 세끼 밥을 먹을 적마다 내 그릇에 담긴 밥알과 내 옆자리에 앉은 수녀밥알들을 감사와 사랑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며 새삼 행복한 나날들이다.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마칠 때 이 시를 한 번씩 읽어보며 새해를 보내고 싶다. 다른 이의 모습에서 ‘성자’를 볼 수 있는 사랑의 넓고 밝은 지혜를 구하고 바쁨 속에서도 마음의 고요를 즐길 수 있는 수행자의 마음을 새롭게 해 준다. ‘밥풀’이란 이 시는.

이해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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