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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아직은 달빛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갑오년은 운명적으로 역사가 뒤엉키는 해다. 1894년은 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엉켰고, 1954년에는 미·소 냉전이 엄습했다. 2014년, 사관이 엉켜 역사전쟁이 점화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답답했던지 ‘균형 잡힌 역사관’을 요청했다. ‘1794대1’, 모든 고교에서 ‘최종 수정된 교학사 한국사’(이하 敎韓)를 전멸시켰기 때문이다. 기존 7종 교과서(이 중 가장 인기있는 한 권을 이하 旣韓)를 채택하면 애국·반일이고, 교한은 친일·독재미화 낙인이 찍혔다. 일부 언론은 교한의 역사왜곡을 대서특필했고, 민주당 대책위원회도 여론몰이에 나섰다. 궁지에 몰린 정부는 국정(國定) 전환을 들고 나왔다. 글쎄, 국가가 개입하면 정사(正史)가 만들어질까? 국정이 시대에 역행하는 옹색한 발상이듯 ‘1794대1’에도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서둘렀던 거다. 보수정권 출범에 맞춰 역사교육에도 보수적 안전지대를 가설하고 싶었다. 몇 개월 만에 집필을 강행한 탓에 수백 개 오류와 인터넷 스크랩 흔적을 남겼던 거다. 거기까지는 의욕적이라 쳐도 교육부 심사위원회가 그런 오류를 짚지 못하고 검인 도장을 찍었다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다. 입시성적에 민감한 학부모들이 오류투성이의 교과서를 채택할 리 없다. 국정 전환을 결행하기보다 부실 검증의 책임 소재를 가려내는 게 먼저다.



 그런데 범시민적 분노를 자아낸 표현들은 부실 검증 탓일까 아니면 의도적 결과일까? 알려진 대로 ‘의병 토벌’ ‘조선인 위안부가 따라다녔다’는 표현과, 한 구절로 그친 안중근 의사, 친일인사 미화, 김개남의 살육·약탈 행위, 싼값의 쌀 수출, 4·3사태 양민학살 왜곡 등이 공분을 샀던 내용이다. 이 문구들이 최종 수정본에서 삭제 내지 수정되었다 해도 더러는 본문 속에 남아 여진을 일으킬 소지는 충분하다. 집필진은 이를 의식적으로 썼을까, 또는 심사위원들은 이를 알고도 내보냈을까? 그 진의가 밝혀져야 세간의 비난이 가라앉을 것이다.



 교한이 전멸한 배경이 이것이다. 진보사관에 대한 졸속방어의 결과였다. 그래서 읽어봤다. 마침 필자가 역사서를 출간한 후여서 관심이 갔다. 두 종류를 찬찬히 읽어보니 역으로 기한의 단점이 다가온 것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솔직한 독후감은 이렇다. 기한은 근대의 연원인 조선사를 내팽개치고 근현대사에 과다한 비중을 할애했다. 서술도 건성건성이었다. 전반적으로 문맥이 난삽하고 사건의 경중과 분량이 들쑥날쑥했다. 국사는 분명한 인과관계로 자국의 자발적 대응을 부각해야 한다. 일례로 강화도조약에는 서계(書啓)문제가 핵심인데 뇌관이 빠졌다. 기한을 읽은 학생들은 갑작스러운 일본의 함포 위협을 의아해할 것이다. 열강 침략에 맞선 대한제국의 대응인 광무개혁에 겨우 1면을 할당했고, 한·일관계의 초미 쟁점인 독도와 간도에도 1면을 썼을 뿐이다. 반면 교한은 서계를 언급했고, 광무개혁에 4면을 독도에 5면을 각각 할애했다.



 친일논쟁을 불러왔던 그 쟁점들에서 기한은 상대적 우위를 말할 수 있는가? 감히 말하건대, 일제 비판 역시 체계가 없었고 편파성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인상이다. 안중근 의사가 그냥 ‘안중근’이었고, 그렇게 날을 세운 의병항쟁도 짧은 지면을 할애했을 뿐이다. 특히 국내외 민족운동에서 기한은 사회주의를 부각하고 노동·농민운동을 반복적으로 조명했다. 지주, 상공인, 중상층이 과연 민족운동에 헌신했는지 학생들은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기한은 교한에 대해 승전가를 부를 자격이 없다. 사회과학 전공영역인 현대사에 이르면 모두 갈피가 흐트러지는데 기한도 교한도 사건의 경중 조절과 중립성 유지에서 이탈했다. 오히려 기한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실정에 과도 집중함으로써 학생들을 ‘음지현대사’로 인도한다. 현대사의 분기점인 6·25에 겨우 3면을 할애한 이유도 이해할 수 없다. 기한의 부실과 편향성은 왜 그동안 지적되지 않았을까?



 근현대사 분야에는 기라성 같은 사회과학자, 국사학자들이 다수 존재한다. 그들의 연구와 균형적 시각을 교과서에 담아냈다면 편파적이고 수준 낮은 교재들이 양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정 전환은 결코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방안이 아니다. 함량 미달의 편향된 교과서가 생산되는 데에는 학자들의 유유상종 관행이 한몫을 한다. 의기투합의 결과다. 백 년의 근현대사를 한 권에 꾹꾹 채우는 데서도 부실이 발생한다.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해 이제 신뢰와 존경을 받는 학자들이 나설 때 아닌가 싶다. 5·16에 저항한 소설가 이병주가 말했다. ‘달빛에 젖으면 신화가 되고,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된다’고. 정사(正史) 만들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역사전쟁, 그런데 아직은 달빛에 젖은 채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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