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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붓질로 고단한 삶 속 새봄을 그리다

화가 박수근(1914~1965)은 가난했다. 아버지의 광산 사업이 실패한 일곱 살 이후로 죽을 때까지 죽 그랬다. 유화를 그릴 수 있었던 것도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로 연거푸 입선하며 받은 상금 덕분이었다.

탄생 100주년 맞아 기념전 열린 ‘국민 화가’ 박수근 화백

하지만 그림에 대한 애정이 식은 적은 없었다. 열두 살 무렵 밀레의 ‘만종’을 원색 도판으로 처음 보고 “하나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 이래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혼자서 묵묵히 그림을 공부하면서, 심지어 백내장으로 왼쪽 눈을 실명한 마흔아홉 이후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그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서민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고단한 삶을 캔버스에 옮겨내고자 했다. “아버지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담백하고 솔직한 예술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박 화백의 아들 성남(67·화가·아래사진)씨는 이렇게 회고한다. “시장에 가서 과일을 사도 한 군데서만 사는 법이 없었어요. 왜 그러시냐고 여쭤보니 ‘한 아주머니에게서만 사면 다른 아주머니가 섭섭해하지 않겠니’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는 긍정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성남씨는 아버지가 “괜찮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회고했다. “어느 날은 ‘난 참 행복해’라고 하시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추운 날 밖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따뜻한 방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잖니’라고 하시더라고요.”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가 데뷔작 『나목』을 통해 소개했듯 그는 미 8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모은 돈으로 비로소 창신동에 판잣집을 마련한다. 그 창신동 집 마루에서 아버지가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를 집어든 박성남씨는 “아버지는 다시 전쟁이 나서 나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이 그림은 나를 그린 게 아니라 분단 국가의 아버지와 아들을 상징하는 그림이라고 생각한다”고 들려주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박수근의 그림에서는 나무든 인물이든 현재의 고단한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조용히 삶의 새봄을 기다리는 희망이 애잔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특히 그림 속 인물들은 만년으로 갈수록 표현의 사실성에서 의미의 상징성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보았다. “화강암에 새겨진 마애불 같은 느낌”이라고도 했다. 바위가 아닌 캔버스에 그려진, 마애불같이 거룩하고 의연한 인간.

그가 그린 수채화에서도 따뜻한 시선이 묻어 있다. 아내의 것이었을 흰색 꽃신, 여고생 딸이 쓰던 자주색 가방, 식탁에 자주 올랐을 도루묵 등은 간결한 구도와 밝은 채색 덕분에 더욱 해맑게 느껴진다.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전(17일~3월 16일 서울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이 열린다. 2007년 45억2000만원에 낙찰돼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운 ‘빨래터’를 비롯한 유화 90여 점과 수채화 및 드로잉 30여 점 등 120여 점을 볼 수 있는 자리다. “100주년을 맞아 100점은 보여드려야겠다고 마음 먹고 소장가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이옥경 가나아트센터 대표)는 덕분이다.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은 “당시 시대상을 느껴볼 수 있도록 전시장을 입체적으로 구성했다”며 “이번 전시가 박 화백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특별 강연(19일 유홍준, 24일 박성남, 2월 22일 윤범모)도 마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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