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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의 취리히통신] "당첨금 받아 빚 청산" … 스페인 연말 복권 축제의 그늘

스페인 크리스마스 복권 ‘엘 고르도’의 지난해 1등 당첨자들이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다. [사진 스페인 라디오 카데나 세르(cadena ser) 홈페이지]
세계에서 당첨금 규모가 가장 큰 복권은 무엇일까요. 미국의 메가밀리언? 유럽 9개국이 참가하는 유러밀리언? 아닙니다. 스페인의 크리스마스 복권 ‘엘 고르도(El Gordo)’입니다. 1812년 시작됐으니 200년이 넘었습니다. ‘뚱보’라는 뜻의 이 복권은 매년 7월 판매를 시작해 크리스마스 직전인 12월 22일 추첨을 합니다. 올해 당첨금 총액은 22억4000만 유로(약 3조2400억원)에 이릅니다. 다른 복권과 구분되는 특징도 몇 가지 있습니다.



 엘 고르도의 번호는 다섯 자리로 이뤄져 있는데요. 해마다 같은 번호의 복권이 1800∼2000장씩 인쇄됩니다. 1등이 2000명도 나올 수 있단 얘깁니다. 2013년엔 1등 1600명이 각 6억원의 당첨금을 받았습니다. 2등, 3등 당첨자의 수는 훨씬 더 많고요. 확률이 높다 보니 스페인에선 매년 전 국민의 70% 이상이 엘 고르도를 구입합니다. 그중 15% 이상이 어떤 식으로든 당첨이 됩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한 번호의 복권을 여러 장 사서 나눠 갖는 일이 많습니다. 제 남편도 스페인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지난여름 같은 번호를 구입해 120유로에 당첨됐답니다. 심지어 한 동네 주민들이 모두 같은 번호를 구입하는 일도 있습니다. 동네의 작은 복권판매소에서 수많은 번호를 다 구비할 수 없어 네댓 가지 번호만 판매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죠.



 이러다 보니 복권 추첨일엔 희한한 장면이 벌어집니다. 전국의 1등 당첨자들이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얼굴을 공개하고 샴페인을 터뜨리는 겁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고액 복권 당첨자들이 당첨 사실을 숨기려 드는 것과 대조됩니다. 천문학적 금액이 아닌 데다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당첨되는 일이 많아서일 겁니다.



 12월 22일 오전엔 스페인 티비 채널이 추첨을 생중계하는데요. 커다란 둥근 통 속에서 숫자가 적힌 공을 꺼내는 건 어린 소년·소녀입니다.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라는, 수도 마드리드에서 가장 오래된 보육원 출신의 아이들이죠. 두 아이는 맑고 높은 목소리로 번호와 금액에 멜로디를 입힌 노래를 부릅니다. 한나절 동안 이어지는 이 추첨 방송의 시청률은 50%를 웃돌 정도입니다. 1등 당첨자들은 이 아이들에게 당첨금 일부를 선물로 보내거나 대학 입학금을 지원하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복권사업이 아니라 복권축제라 할 만합니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어두운 속사정도 드러납니다. 스페인의 실업률은 현재 25%를 넘어섰습니다. 한 장에 20유로(약 2만9000원)짜리 복권을 사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실직자란 뜻이죠. 이번 1등 당첨자 중 한 명인 30대 남성 레온시오는 방송에서 “4년 동안 실직 상태였는데 처남이 사준 복권에 당첨돼 빚을 갚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식비를 줄인 돈으로 복권을 구입해 3등에 당첨된 노숙자 부부는 “드디어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우리 집을 갖게 됐다”며 기뻐했고요.



 정상적인 노동 기회를 박탈당하고 운에 기대야 하는 사회가 건강할까요.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1984』 한 단락이 가슴을 후빕니다. “비록 복권이 인생을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는 못 될지라도 삶의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는 있다고 믿는 노동자들이 수백만 명은 될 터였다. 복권은 그들의 즐거움인 동시에 그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었고, 진통제이면서 지적인 자극제였다. 간신히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까지도 복권에 관련된 복잡한 계산은 능히 할 줄 알았다.”



김진경 jeenkyung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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