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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살바도르 발리의 비누 사용기

손철주
미술평론가
새해 첫날부터 해외로 여행하는 호강을 누렸다. 더위가 반가운 섬, 발리에서 웃통 벗고 놀았다. 신년 신수가 일찍 폈던 것도 아니요, 피한(避寒)은 팔자에 없는 사치였는데 딸이 용케 내 팔을 끌고 간 덕분이었다.

구실이 있기는 했다. 딸이 내 나잇값을 쳐준 것이다. 말을 바꾸면, ‘효도 관광’이다. 내가 쑥스러워할 줄 안 딸은 선바람에 나서자며 을러댔고 식구들은 허둥지둥 여장을 꾸렸다. 해 바뀌자마자 하늘을 나는 기분에 적잖이 우쭐했다. 깨달음은 높은 곳에서 일어난다. 늘 해대는 푸념과 걱정은 다 속 좁은 탓이라 여겨진다.

 발리는 ‘지상 최후의 낙원’이란다. 발리인이 지어낸 말은 아닐 테다. 보는 사람이 겪는 사람보다 수다스러운 법이다. 맘 편히 먹고 쉬면서 문리가 터졌다.

자연은 짙푸르고 사람은 느긋하다. 왕궁의 정원을 거니는 이구아나는 점잖고, 사원의 석탑을 적시는 빗줄기는 공손하다. 바다에 몸을 담갔더니 뭉친 살이 풀렸다. 밤하늘의 별은 떨어질 듯이 흔들렸다. 초승달이 그믐의 달처럼 앵돌아앉아 놀랐다. 나그네의 감상이라 덜 여문 말이겠지만, 자연은 사람을 기르고 사람은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을 믿는다. 풍경에 안기면 내가 풍경이 되고프다.

 나온 김에 시장조사를 하겠다는 딸이 쇼핑가를 찾았다.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나도 시장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스미냑이란 곳이었다. 관광객의 발꿈치가 가벼운 길가에 가게가 다닥다닥하다. 안내서에 스미냑은 ‘발리의 베벌리힐스’라고 돼 있다. 빌라들이 어깨를 겨루고 쇼핑백이 줄지은 낙원은 낯설다.

명품점에 들어서자 딸이 눈을 찡긋한다. 시간이 걸려도 참으라는 신호다. 여행 경비는 딸이 냈다. 돈은 힘이 세다. 짐꾼 노릇 시켜도 마다할 수 없다. 하지만 세련된 옷과 핸드백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눈빛이 빛날 때, 시장조사만 하기를 속으로 빌었다.

가게 안에 전시된 팝 아트 스타일의 포스터가 마침 눈에 띄었다. 마오쩌둥 얼굴 위에 큼지막한 영문이 씌어 있다. ‘잘 사는 것이 최고의 복수다’. 그 곁에 또 있다. 이번에는 비너스가 눈에 안대를 하고 등장한 사진이다. 그 위에도 글씨가 적혔다. ‘충족된 욕망’. 뭔가 심상찮은 해석을 낳을 구호 아닌가. 낙원에 천사가 없어 경쟁이 난입한 모양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딸은 복수를 하지 않았고 쇼핑백에 넣은 욕망은 홀쭉했다.

 명품점 앞에 유기농 전문 카페가 마주 보고 있다. 입구에 나붙은 표어가 마음에 쏙 든다. ‘날것이 진짜다’. 진짜는 그럴지도 모른다. 대부분 먹을거리이고 향이 들어간 생활용품도 더러 보였다. 눈대중만 하다 비누를 모아놓은 코너에서 신기한 제품을 발견했다. 포장이 책 표지처럼 생겼다. 제목은 ‘어느 비누 이야기’. 저자는, 놀라지 마시라, 살바도르 발리다. 저자명이 달리의 서명을 빼닮았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를 끌어온 아이디어가 제법 신통하다.

표지를 넘기자 여덟 개들이 비누가 목차처럼 죽 이어진다. 서문이 혀를 찰 내용이다. ‘이 비누는 세상 모든 비누를 끝장내는 비누이자 씻어야 할 모든 것을 씻어주는 비누의 어머니다’. 성분 표시는 기가 막힌다. ‘발리 해변에서 채취한 코코넛 오일과 자바의 산에서 찾아낸 팜유(油), 산속 호수에 부는 바람 한 줄기와 은하에서 떨어져 나온 극소량의 별빛, 그리고 최소한의 마술을 섞었다’. 달리의 귀여운 허풍과 영악한 비틀기를 흉내 내 사지 않고는 못 배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살바도르 발리의 비누를 썼다. 짐짓 사용법에 적힌 대로 해봤다. ‘벗은 채 비누를 손에 든다. 잡념을 비우고 숨을 깊이 들이쉰 뒤 몸을 적신다. 꿈에서나 본 놀라운 씻김의 의식 앞에 나는 서 있다. 젖은 몸을 비누로 문지른다. 거품이 내 비참한 삶의 걱정을 덜어낸다. 이제 새로워진 나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나는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복수도 욕망도 떨쳐낸 내가 홀가분해졌다. 다만, 아내가 소리를 질렀다. “옷 좀 입고 나와요, 제발.”

◆약력 : 미술평론가. 학고재 주간 역임. 우리문화사랑 운영위원. 저서 『사람 보는 눈』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등.

손철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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