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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3)<제자 박갑동>|<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162)|박갑동

<권력 싸움>
김일성 파 이외 파에 대한 비판을 본다면 소련파의 김 열은 총살, 태성수(노동신문 주필·문화선전부장)는 철직 당하였다.
중공 파로서는 제2군단장인 무형이가 오랫동안 감금당해 있다가 분사하였다.
남로당간부로서는「빨치산」대장으로 나갔으며 공업 상을 지내기도 한 허성택, 그리고 경기도당위원장 박광희, 남 강원도당위원장 조진성 등 이 비판당하였으나 김일·임춘추 등 김일성 파와 같이 복권을 회복하여 다시 출세를 한 자는 한사람도 없다. 한번 얻어맞으면 그것이 최후며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김일성·김일·임춘추·최 광 등 이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였다고 자가선전 하였던 것이 한국동란의 과정에서 사실은 항일무장투쟁을 하였는가 의심할 정도로 비겁한 분자라는 것이 스스로 폭로되고 말았다. 특히 김 일이 담당하였던 인민군 문화부사령이라는 것은 군대내의 당 정치공작을 담당하는 것만큼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의 총책임자인 김일이가『비행기가 없으면 싸울 수가 없다』며 저 혼자 살기 위하여 전투대열을 탈출하여 만주로 달아나 버렸다는 것은 인민군의 정신적·사상적 무장이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때에 군대에 정치훈련을 시키기 위하여 박헌영이 군복을 입고 전선에 나타나게 되었다. 박헌영이 자기 손으로 인민군대안에 총 정치 국을 창설, 총 정치국장에 취임하고 인민군 중장의 군복을 입었었다. 박헌영의 밑에 박금철이가 부국장이 되어 인민군 소장의 군복을 입고 나섰다. 박금철은 다 알다시피 1937년 보천보 습격사건 때 박달과 함께 보천보의 지도를 그려서 압록강을 건너온 김일성에게 제공하여 성공하게 한 공로자로 선전된 자이다.
박금철은 그 사건 때문에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을 살다가 8·15해방 때 석방되었었다. 해방 후 박금철은 박달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보천보 습격당시 김일성을 만나려고 김일성을 찾아갔었다. 가서 만나 보니 이름은 같은 김일성이라도 사람은 달라서 서로 모르는 사람이었다. 박금철은 실망하여 평양에서 취직도 되지 않고 하여 할 수 없이 자강도 강계에까지 가서 강계시 당에서 일을 하다가 시의 조직부장이 되었었다. 동란이 일어나자 군의 문화부장교가 되었다가 박헌영이 군의 총 정치국장이 되자 박금철을 뽑아다가 부국장을 시켰던 것이다.
뒤에 박금철이 당 중앙간부부장 시대에「박헌영·이승엽 간첩사건」이 발생되었었다. 그는 김일성 정권에 반발하여 떨어져 나가는 남로 당원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당부의원장의 지위까지 올라갔으나 드디어 김일성의 손에 의하여 이효순과 같이 숙청 당하고 말았다. 일반 사람들은 박금철을 김일성의 직계로 알고 있었으나(보천보 사건 관계로)사실은 평양의 김일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며 박헌영의 덕을 입은 사람이다.
1950년 10월 평양을 점령당할 때 김일성의 무능함과 비겁함이 감출 수 없이 확연히 드러나자 김일성을 보좌하기 위하여 소련에서 파견되어 있던 부위원장 허가이는 완전히 김일성을 멸시하며 포기하였었다. 그렇기 때문에 허가이는 김일성에 대신되는 최고지도자로 박헌영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허가이는 급속도로 박헌영과 접근하기 시작하였었다. 소련파의 두목 허가이와 남로당의 두목 박헌영이 손을 잡으면 노동당중앙위원의 4분의3의 절대다수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김일성이 박헌영-허가이 동맹에 대항하여 이겨내려면 한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그것은 군사「쿠데타」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직계의 김일·최 광 등은 철 직 당하였고 또 총 참모부도 소련파의 남 일과 남 일을 둘러싸고 있는 소련고문단 수중에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였었다.
김일성이 구사일생을 얻기 위하여 생각해 낸 것이 중국인민지원군의 후원을 얻어 박헌영과 허가이를 타도하는 전술이었다.
그리하여 김일성은 팽덕회 및 그의 사령부의 장병들에게 미녀들과 순금덩어리를 보내어 팽덕회 사령부의 환심을 사기 시작하였었다. 그리고 박헌영과 팽덕회 사령부와의 접근을 단절하기 위하여 중-조 연합사령부의 부사령관 박일우를 추방할 운동을 시작하였었다. 박일우는 중공의 연안파였으나 그가 공산주의 운동에 첫발을 디딘 파벌이 박헌영과 같은 화요파계였다.
김일성은 팽덕회와 박일우를 이간시켜 박일우를 파면시키기 위하여 문갑송을 팽덕회의 수석통역으로 추천, 팽덕회 사령부를 친 김일성 파로 득점하려는 음모를 꾸몄었다. 문갑송은 이미 전에 쓴 바와 같이 3당 합당 당시 서울에서 남로당의 지도권을 박헌영에게서 빼앗아 김일성에게 바치려고 한 김일성의「에이전트」였다.
김일성은 박헌영을 반 중국 파로서 팽덕회에게 무고하여 이간을 시켜야 할 것인데 좋은 자료가 없었다. 그래서 주「헝가리」공사로 있던 권오준이 주 북경대사로 갈 때에 박헌영이 권오준에게『중국은 낙후한 나라이니 가 봤자 더 배울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중국을 멸시하는 모욕적 반 중국적 언사들 농하였다고 문갑송을 시켜 팽덕환에게 밀고시켰었다.
팽덕회는 이 말을 듣고『우리나라는 피를 흘려 가며 너희들을 원조해 주고 있는데 우리를 업신여기고 모욕함이 이보다 더함이 있는가』하고 박헌영에 대하여 크게 분개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팽덕회 사령부에 들어오는 정보마다 박헌영은 소련파두목의 허가이들과 접근하고 있을 뿐 아니라 소련에 대하여서는 말마다『위대한 소련』이라고 하고 있으나 중국에 대하여는「위대한」이라는 말은 한번도 하는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당시 북한에서「위대한」이라는 말은 소련과「스탈린」에 한하여만 썼지, 다른 나라와 다른 사람에게는 쓰지 않았었다. 그것은 박헌영 혼자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팽덕회의 눈에는 박헌영이「위대한 소련」이라고 할 때 그것은 중국의 세력이 북한 안에 대두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쓰는 것 같이 보았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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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