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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 → 발표 → 방어’식 정책이 갈등 불씨 제공

강영진 동아일보 기자로 10년간 일하다 산업화·민주화 이후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갈등 분쟁의 해법을 찾기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 하버드대 법률대학원 분쟁해결과정(PON)을 거쳐 조지메이슨대 갈등해결연구원(ICAR)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갈등해결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버지니아주 대법원 인증 전문 중조인으로 실무경험을 쌓았다.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 겸임교수, 갈등해결연구센터장, 서울시 갈등조정담당관 등을 맡고 있다.
22일간의 역대 최장기 철도파업이 끝났지만 노사 간의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생한 여러 갈등처럼 본질은 뒷전으로 밀린 채 이념 대립과 진영논리가 충돌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새만금 사업에서부터 제주 해군기지, 밀양 송전탑 갈등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대형 공공정책 추진 때마다 되풀이되는 양상이다.

국내 1호 ‘갈등해결학 박사’ 강영진 성균관대 교수

지난 3일 국내 1호 ‘갈등해결학 박사(Ph.D in Conflict Analysis and Resolution)’인 강영진(53)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 교수를 만나 우리 사회의 갈등 해결 방안에 대해 들어봤다. 강 교수는 철도파업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 “주된 책임은 정부에 있다”고 말했다. 공공정책을 수립하고 원만하게 집행하는 것은 정부의 의무라는 점에서다.

그는 “역대 우리 정부는 ‘DAD(Decide-Announce-Defend)’ 방식의 전통적 행정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DAD란 정부가 정책을 결정(Decide)한 상태에서 발표(Announce)하고, 반대여론이 생기면 방어(Defend)하는 방식을 뜻한다.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공공정책이 갈등의 불씨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공공정책이 원만하게 실행되기 위해서는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강 교수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갈등 해결 프로세스는 ‘중조(仲調)’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낯선 개념이지만 이미 미국 등 몇몇 나라에서는 대표적인 갈등 해결 프로세스로 자리 잡았다는 게 강 교수의 설명이다.

-‘중조’라는 말이 낯설다. 어떤 의미인가.
“소송은 비용과 노력이 많이 들지만 당사자들이 수긍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중조’는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확산된 ‘대안적 분쟁 해결(ADR·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 방식의 하나다. 중립적인 제3자가 당사자 간 갈등 해결을 돕는 방식이다. 준사법적 강제력을 갖는 중재(Arbitration)나 상급기관이 해결책을 제시하는 조정(Conciliation)과는 다르다. 영어로는 ‘미디에이션(Mediation)’이지만 마땅한 우리말이 없어 새로운 말을 만들었다. ‘잘잘못을 가릴 때 가운데 서서 말리거나 조정한다’는 뜻의 사자성어 ‘거중조정(居中調停)’에서 가운데의 한글 두 글자를 따온 것이다.”

-학술적 개념만으로는 쉽게 와닿지 않는다. 중조를 통해 분쟁을 해결한 사례는 어떤 것이 있나.
“미국에서는 1974년 스노퀄미 댐 건설 분쟁 해결을 첫 중조 사례로 본다. 홍수로 큰 피해가 발생하자 워싱턴주 정부가 댐 건설을 추진했는데 환경단체와 주민들의 반대로 15년간 갈등이 계속됐다. 워싱턴주립대 미디에이션 연구소장인 제럴드 코믹과 제인 매카시가 중조 방식을 도입하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찬반 양측 당사자가 상대방의 주장을 경청하게 했다. 객관적인 검증과 대안도 모색했다. 4개월 만에 대규모 댐 대신 작은 댐을 짓고 홍수통제용 제방을 건설하는 대안이 제시됐다.”

-철도파업을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는 데도 중조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중조의 핵심은 이해당사자들의 참여다. 정부가 수서발KTX 자회사 설립과 철도경쟁체제 도입이라는 정책목표를 수립했지만 추진 과정에서 이해당사자인 철도산업 종사자와 국민들의 참여가 부족했거나 생략됐다. 2004년에 첫 논의가 시작됐지만 진전이 없다가 이명박 정부 말기에 갑자기 불거졌고, 이번 정부 들어서도 충분한 당사자 참여 절차 없이 추진됐다. 갈등 예방 노력은 물론, 갈등이 불거진 뒤 해결하는 절차가 모두 잘못됐다. 미국은 철도·항공 등 국가기간 교통망 분규가 발생했을 때 연방 중조위원회가 우선 중조를 시도한다. 매년 100건 내외가 회부되는데 95%는 45일 이내에 합의 종결된다. 갈등의 양상은 우리나라와 똑같다. 중조를 통한 해결제도가 체계적이고 전문화돼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이해당사자의 참여나 이해를 구하지 않은 공공정책 추진 과정의 갈등은 모두 정부의 책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불법 파업을 강행한 노조도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앞서 말했듯이 공공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것은 정부의 의무다. 정부가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현행법상 불법 파업을 강행한 노조의 책임 역시 짚어볼 문제다.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는 파업 대신 철도산업발전 논의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낼 방안을 강구했어야 했다. 하지만 당사자의 참여와 이해 없이 일방적으로 공공정책을 추진해 온 우리 정부의 행정 패러다임이 갈등의 원인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철도파업을 둘러싼 갈등의 종국적인 해결방법은 무엇인가.
“파업은 파생적인 문제다. 지금부터라도 철도산업발전에 대한 제대로 된 토론, 검증 절차를 밟아야 한다. 국회가 나서서 파업을 종결시킨 것은 의미 있는 진전이지만 본질에 대한 사회적 대화는 시작되지도 못했다. 이미 정부는 갈등의 당사자가 돼서 이를 조정할 수 없게 됐다. 그렇다면 국회가 사회적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미국의 의회 청문회처럼 이해당사자들을 불러 의견을 듣고 전문가 검증도 해야 한다. 언론은 이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야 하고. 중조 방식을 통한 대화가 시작되면 모두가 원하는 정책목표, 철도산업의 경쟁력 강화 방안에 대한 합리적 대안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공공정책 추진 과정의 갈등은 이념·진영 갈등으로 변질되는 것 같다. 외부 단체들이 개입하면서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 아닌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밀양 송전탑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밀양은 송전선로뿐 아니라 연결된 원자력발전소 문제가 같이 쟁점으로 깔려 있다. 국가 에너지정책이 주된 쟁점 중 하나란 점에서 환경단체도 당사자 그룹 중 하나로 봐야 한다. 밀양 송전탑 갈등의 주역은 현지 주민이다. 중앙 언론이 ‘외부세력론’을 지나치게 조명해서 그렇지, 주민들이 빠져 있었다면 갈등 사안으로 발전하기 어렵다. 중조 선진국은 쟁점의 분리를 통해 갈등을 해결한다. 밀양의 경우에도 정부가 에너지정책 문제를 분리 대응했다면 갈등 해결이 좀 더 쉬웠을 것이라고 본다.”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 공공정책 추진과 관련한 갈등이 많이 발생하는 것인가.
“역시 정부의 접근 방법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중조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려면 당사자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쓰레기매립장 설치에 반대하는 주민들을 인터뷰해 보니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반대한다’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아직도 시골에서는 ‘나라에서 하는 일에 백성이 어떻게 반대하느냐’는 인식이 강하다. 그런데도 반대를 하는 것은 ‘시골 사람이라고, 노인네 몇 명 사는 곳이라고 얕보는 것 아니냐’는 반발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전에 양해만 구했어도 이 정도로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답변이 많았다.”

-결국 이해당사자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이 중조를 통한 분쟁 해결 방식의 핵심이란 얘긴가.
“그렇다. 갈등해결학에서 중요시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론(Basic Human Needs Theory)’이다. 인간에게는 반드시 존중돼야 할, 침해돼선 안 되는 네 가지 욕구가 있다는 이론이다. 안전(security) 보장과 정체성(Identity) 존중, 자기결정권(Self-Determination)과 인정(Recognition)의 욕구다. 철도파업에 이를 대입해 보자. 철도산업 종사자들은 수서발KTX 자회사 설립과 경쟁체제 도입이 신분에 변화를 줄 것이라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 또 공공에 봉사한다는 자존감, 즉 인정의 문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정부는 여러 차례 민영화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를 설득하는 과정, 당사자들의 기본적 욕구를 침해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었어야 했다. 결국 당사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패착이다.”

-중조는 갈등이 불거졌을 때 이를 해결하는 방법인데, 애초에 갈등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갈등은 정부가 법규를 개정하거나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촉발되기 마련이다. 갈등해결학에선 ‘협상에 의한 법규 제정(Negotiated Rulemaking)’을 제시한다. 법령이나 규제를 만들 때부터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당사자들을 참여시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프로그램이다. 미국 환경부는 1983~2006년까지 21건의 법규 제정에 이 방식을 도입했는데 참가자 전원이 완전 합의에 이른 것이 15건이나 된다. 이렇게 제정된 법규나 규제의 분쟁 발생 건수는 일반 법규나 규제와 비교해 3분의 1에 불과했다. 예방적 분쟁 해결이 가능하다는 방증이다.”

-중조자(仲調者) 역할을 하려면 양측의 신뢰가 필수적이다. 소규모 갈등이라면 몰라도 철도파업처럼 전국 규모의 사회적 갈등 상황에서 중조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나 단체가 있을까.
“작은 갈등이 진영논리나 이념갈등으로 번졌을 때 중조자 역할을 할 사람이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사회적 중조자 역할을 종교계나 언론이 해야 하지만 함께 진영논리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다. 한국사회에서 회색지대가 필요한 이유다. 우선 작은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전문 중조자 집단을 양성할 필요가 있다. 서울시가 갈등관리심의위원회를 구성해 크고 작은 공공정책 추진 과정의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미국의 법학전문대학원처럼 대학 중조 전문가 교육과정도 만들어야 한다. 사회적 갈등의 경우에는 단기적으로 국회와 언론기관이 중조자 역할을 해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갈등을 중조할 수 있는 전문가 그룹을 키워내는 것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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