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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체제' 넘어서자

1894년 갑오개혁은 정치·경제·사회·군사 전 분야에 걸친 210건의 방대한 개혁안이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국민과 유리된 채 외세의 힘에 의존한 탓에 동력을 구할 수 없었다.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은 과거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새롭게 만들 신(新)갑오개혁이 성공하려면 ‘1987년 체제’의 극복과 ‘포스트 87년 체제’로의 전환을 첫 손에 꼽고 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87년 민주화 이후의 정치 지도자들이 새로운 국가 운영 논리를 찾아내지 못해 지금 사회 전 분야가 싸움판으로 변했다”며 “87년 체제로는 현재의 갈등을 해결해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2014년의 대한민국은 87년 6월 민주화 운동의 결과물인 ‘제9차 개정 헌법’으로 27년째 작동하고 있다. 세종대왕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대통령 5년 단임제, 진영논리에 갇힌 채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정치, 불요불급한 법안이라도 미로에 빠뜨리고 마는 국회를 갖고 있다. 그 속에서 청년들은 철도 민영화에 반대하는 대자보를 붙이면서도 한편으론 공기업·공무원 시험엔 구름같이 몰리고 있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만3679달러에 이르지만 ‘하우스푸어’ 말고도 ‘실버푸어’(빈곤노인층), ‘에듀푸어’(교육비 지출로 인한 빈곤층) 같은 푸어족이 넘치고 있다.

 정종섭 전 서울대 법대학장은 “87년에 대통령 직선제를 해서 주요 정치적 리더들이 5년에 한 번씩 대통령을 했는지 몰라도, 민주화 시대 이후에는 이런 ‘1인 리더십’이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9차 개정헌법의 5년 단임제는 ‘1노3김’(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만장일치로 만들어낸 산출물이었다. 군사정부에 대한 우려와 피해의식도 작용하긴 했지만 5년 단임제의 이면에는 1노3김이 돌아가며 한 번씩 대통령을 할 수 있다는 암묵적 공감이 있었다. ‘빅 보스’ 4인이 만장일치로 합의한 결과는 공고했다. 5년 단임제의 한계는 지속적으로 드러났으나 이들이 한 번씩 대통령 역할을 마치기 전까지 어느 한쪽 정파의 의견만으론 건드릴 수 없었다. 87년 체제는 헌법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그해 36.6%의 역대 최저 득표율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은 이듬해 4월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를 만났다.

선거법을 중·대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꾼 결과였다. 영·호남, 충청을 분점한 지역주의 구도가 그때 생겨났다.

빅 보스 노태우 대통령과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간 국정운영의 기본 질서는 ‘나눠먹기’였다. 대법관 추천 몫을 대통령과 여야가 나눠서 갖고,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이나 공영방송 이사진까지 분점하는 구조의 뿌리는 1987년 체제다.

 87년 체제는 결국 ‘3당 합당’(90년), ‘DJP 연합’(97년) 같은 비정상적 정치를 불러왔다. 임기 후반의 대통령은 항상 레임덕에 시달리다 불행한 퇴임을 했다.

 이제 이런 ‘87년 체제’의 리모델링 없이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어렵다는 의견들이 많다.

 통일 준비를 위해서도 87년 체제의 극복이 필요하다. 89년 발표된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은 자주·평화·민주의 3대 통일 원칙 아래 남북한을 동반자 관계로 발전시켜 ‘민족공동체헌장 채택→남북연합→통일민주공화국 실현’ 등 3단계에 걸쳐 통일을 이룬다는 내용이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를 거쳐 박근혜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해설 자료에까지 깔려 있는것도 ‘민족 공동체 통일’의 개념이다. 그러나 이 또한 주변국과의 관계, 민족의 개념 변동, 다문화 사회로의 전환 등을 반영하지 못하는 87년 체제의 한 부분이다.

 이재열(사회학) 서울대 교수는 “권위주의를 극복하려던 87년의 시대정신과 지금의 시대정신은 다르다”고 말했다. 정종섭 전 학장은 “개헌은 개헌 논의대로 진행하고, 별도로 ‘내셔널 어젠다’를 설정해 정상 국가를 만드는 작업을 5년 내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강민석·장세정·채병건·허진·정원엽 기자

◆87년 체제=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면서 형성된 정치체제를 일컫는 말. 전두환 전 대통령이 대통령 간선제를 지키겠다는 호헌(護憲)조치를 발표한 후 6월 민주화 항쟁이 발생했고,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등을 담은 6·29선언을 발표해 5년 단임제를 골자로 한 9차 헌법개정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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