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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공부가 즐거워요, 노년에 부는 열공 바람

인생은 언제나 도전이다. 서울 종로구 방송통신대 본부 앞에서 함께한 꽃할배?꽃할매 대학생. 왼쪽부터 박홍기(68)·김도현(72)·김인자(63)·이희정(62)씨. 젊은이들과 함께 공부하니 몸도 마음도 늘 즐겁다고 했다. [강정현 기자]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상공비서관을 지낸 전기영(84)씨는 올 2월 방송통신대 경제학과를 졸업한다. 올해로 16년째 늦깎이 상아탑 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는 평소 오전 6시쯤 서울 성동구 방송대 도서관으로 향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1년에 단 두 번, 도서관이 문 닫는 설·추석 명절에만 집에 머무른다. 도서관 고정석도 있다. 제1열람실 88번 좌석이다.

 전씨는 1999년 방송대에 들어갔다. 일어일문·영어영문·경영·법학 4개 전공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경제학은 그의 다섯 번째 전공이다. 앞으로 불어불문학에도 도전한다. 지난해 2학기 불문학 수업도 들었다. 그의 자리에는 프랑스어 불규칙동사를 정리한 메모지와 사전·교재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평남 출신으로 1945년 월남해 경기중·보성고를 졸업한 전씨는 “서울대 수학과 2학년을 다니다 6·25전쟁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웠다. 젊은 시절 중단한 공부를 마치는 것은 인생의 숙제였다”고 했다. 6·25 때 통역장교로 입대한 그는 10년 넘게 군대 생활을 하다 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하자 청와대 비서관으로 들어갔다. 30년대 출생, 60년대 공직 진출, 현재 나이 80세 전후를 가리키는 ‘신386’ 중에서도 맏형 격이다.

"대학 안 갔다면 탑골공원 맴돌았을 것”

 5년 청와대 생활을 마치고 사업에 전념했던 그는 예순아홉에서야 다시 대학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일본 회사와 거래하다 일본어를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방송대에 들어왔는데 이후 공부에 중독된 것 같다. 불문학 다음에 뭘 전공할지 벌써 고민 중”이라고 즐거워했다. 공부할 때는 휴대전화도 받지 않는다는 그다.

 “대학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탑골공원을 맴돌고 있을지 모르죠. 의사가 15년은 더 살 수 있다고 하던데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공부를 놓지 않을 겁니다.”

 방송대에는 아흔이 넘은 학생도 있다. 지난해 2학기 일문과 3학년에 편입한 정한택(92)씨다. 2년 전 영문과에 들어갔다가 전공을 바꿔 재입학했다. 72년 방송대 개교 이래 입학생 240만 명 중 최고령이다. 정씨는 한국의 1세대 심리학자로 꼽힌다. 서울대 교수로 정년(65세) 퇴직 뒤에도 80세까지 호서대 산업심리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제자 중에는 박근혜 대통령도 있다. 그는 70년대 초 서강대 교양과목으로 심리학을 강의하러 갔다가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열심히 수업을 듣던 모범생 박근혜양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했다. “100세가 되더라도 지금처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을 것”이라며 향학열을 다졌다.

 석해균(61) 전 삼호주얼리호 선장도 지난해 3월 방송대 청소년교육과 학생이 됐다. 70년 고교 졸업 후 43년 만의 대학모다. 그는 2011년 1월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된 삼호주얼리호 선장으로 해군의 구출작전(아덴만 여명) 때 리더십과 기지를 발휘해 ‘아덴만의 영웅’이란 별명을 얻었다. “해군 군무원으로 근무 중이라 정규 대학이 아닌 방송대에 응시했다”고 밝혔다.

 ‘꽃할배·꽃할매 대학생’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은퇴 후 ‘제2의 인생’의 좌표를 공부에서 찾는 사람들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이 펴낸 『평생교육통계자료집』에 따르면 2012년을 기준으로 대학 학점이 인정되는 교육과정(학점은행제)에 등록한 60세 이상 학생은 1만8114명으로 집계됐다. 2008년(4594명)에 비해 네 배 가까이 늘었다. 지역별로는 서울(1만1718명)·경기(1953명)·인천(206명) 등 네 명 중 세 명 이상(77%)이 수도권에 집중됐다.

 이정의 국가평생교육진흥원 정책연구실 박사는 “평균수명이 높아지고 고령자의 건강도 좋아지는 것을 감안하면 노년 향학열은 자연스러운 추세다. 베이비붐 세대(55~63년생)의 은퇴가 본격화되면 고령 학생의 증가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비붐 세대는 이전 세대에 비해 학력 수준이 높고 경제적 여유도 있는 편이라 대학 공부에 대해 심리적인 부담감이 적다”고 설명했다.

 대입 등을 목적으로 고교 졸업 자격 검정고시를 치는 고령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고졸 검정고시에서 60세 이상 응시자는 1167명이었으며 이 중 합격자는 615명(합격률 53%)에 달했다. 2008년(응시 616명, 합격 177명)에 비해 응시자 수는 89%, 합격자 수는 247%나 급증했다.

서울대 수학과 2학년을 다니다 6·25전쟁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한 전기영(84)씨는 “공부를 마치는 게 인생의 숙제”라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문진철 교육부 학생복지정책과 교육연구관은 “젊은 시절 못 배운 설움을 풀고 싶어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다. 고령 응시자를 위해 활자가 큰 시험지를 만들거나 응시료를 면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정규 4년제 대학에 다니는 ‘꽃할배·꽃할매 대학생’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28년 동안 군생활을 마치고 원사로 퇴직한 허영남(70)씨는 지난해 3월부터 대전 배재대 복지신학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종손자(형의 손자)와 같은 학교, 같은 학번 동기가 됐어요. 보통 오전 8시쯤 등교해 강의를 들어요. 나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같은 과 학생들과 학생식당에서 점심도 함께하죠.”

 허씨는 월남전 참전용사로 화랑무공훈장도 받았다. “당시 고입시험에서 1등을 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 2등을 하자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으로 갔다”며 “2010년 대전시가 모집하는 국가시험 감독관에 응시했다가 중졸 학력 때문에 떨어지면서 다시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강원도 원주 한라대 미디어콘텐츠학과 김태희(70)씨는 올 8월 꿈에 그리던 대학 졸업장을 받는다. 젊은 시절 가정형편상 고교 1학년까지만 다녔던 그다. 김씨는 “고교 내신성적 1등급을 받고 2008년 4년 장학생으로 대학에 들어왔다. 지난 6학기 동안 평균 학점은 4.0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경기도 용인의 집에서 원주의 학교까지 고속도로로 왕복 세 시간이나 걸려 다른 학생들과 술자리 한 번도 못해 본 게 아쉬워요. 중고차 마련을 위해 1년간 휴학하고 입시학원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기도 했다오.”

 이 학과의 허남진 교수는 “할머니 학생이 항상 진지한 자세로 수업에 임하며 다른 학생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니 강의실의 면학 분위기 형성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경기대 사학과에서 ‘인물로 보는 한국사’를 강의하는 박준규(73) 박사의 사연도 감동적이다. 그는 2000년 회사원으로 은퇴하기 전까지만 해도 초등 4학년이 학력의 전부였다. 은퇴 후 아내와 해외여행도 다니고 친구들과 골프도 치며 시간을 보냈으나 ‘배움에 대한 갈증’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2000년 말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하고 중졸 검정고시(2001년 8월)와 고졸 검정고시(2002년 4월)에 내리 합격했다. 2002년 서울 지역 최고령 수능 응시생(61세)으로 화제가 됐다.

 그는 2003년 경기대 행정학과에 입학하고 사학과를 복수전공으로 선택했다. 2007년 학부 졸업 뒤에는 같은 학교 대학원 사학과에 진학해 석사(2009년)·박사 학위(2013년)를 따냈다. 조선 전기의 개혁가 조광조(1482~1519년)에 심취해 ‘조광조의 정치활동과 사회개혁에 관한 연구’(석사)와 ‘16~17세기 조광조 추존사업과 정치세력의 동향’(박사)이란 논문을 썼다. 2년 전부터 사학과 강사로 재직 중이다.

 박 박사는 “학부 시절 등·하교에 시간이 많이 걸려 2년6개월 동안 젊은 학생들과 4인 1실 기숙사 생활도 했다. 남학생은 형님, 여학생은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MT를 갔다가 좁은 방에서 같이 뒹굴기도 하고 술자리에서 술값도 많이 쐈다”고 말했다.

컴퓨터 실력 달려 리포트 작성 애먹기도

 20대 때 전자공학을 전공했던 이종한(77)씨는 2012년 8월 대구대에서 ‘현대 사진술을 이용한 동양화적 묘사’란 논문으로 산업정보디자인 석사학위와 총장 공로상을 받았다. 경북 포항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이씨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동양화의 느낌을 풍기는 예술사진의 창작 기법을 연구했다. 그는 “조만간 40점 정도 작품이 모이면 서울에서 전시회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학원 5학기 동안 수업 한 번 빠지지 않고 리포트도 쓰고 파워포인트로 주제발표도 했어요. 새로운 지식을 알아가는 쾌감 때문에 더욱 깊게 탐구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죠.”

 한서대 한정란(노인복지) 교수는 “평균수명 증가로 우리 모두 노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기간이 늘어나게 됐다. 대학은 여생을 창조적으로 지낼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통계청이 발표한 ‘2012년 생명표’에 따르면 60세까지 생존한 남성은 평균 21.5년, 60세 여성은 26.6년을 더 살 것으로 예상됐다. 70세 남성의 기대 여명은 평균 13.8년, 70세 여성은 17.6년이었다. 일흔부터 시작해도 4년제 대학을 3~4회나 더 다닐 수 있다는 얘기다. 한 교수는 “건강이나 안전 같은 기본적인 욕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계발이나 자아 실현을 위한 배움의 욕구는 계속 커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년의 공부는 건강관리에도 도움이 된다. 중앙대 의대 김보아(정신건강의학) 교수는 “복잡한 인지 기능이 요구되는 활동을 하면 뇌 기능을 유지하고 치매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며 “성적·취업에 압박감을 느낄 나이가 아니므로 노년의 대학생활은 건전한 지적 자극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양대 의대 남정현(정신건강의학) 교수는 “노년기에 사회적으로 고립되면 우울증이 생길 위험이 커지는데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 새로운 사회그룹이 생기는 효과가 있다”며 “다만 공부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면 건강에 마이너스 요인이 될 수 있으므로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꽃할배·꽃할매 학생들이 대학생활의 애로사항으로 주로 꼽은 것은 컴퓨터 실력이다. 허영남씨는 “한참 글을 입력하다가 무엇을 잘못 눌렀는지 갑자기 화면이 사라져 당황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태희씨도 “리포트를 쓸 때 젊은 학생들은 30분 정도 걸릴 것을 나는 두 시간도 넘게 끙끙거린 적이 있다”고 했다.

 등록금 부담도 만만치 않다. 방송대는 한 학기 35만~40만원 정도지만 정규 4년제 대학은 학기당 400만~500만원을 내야 한다.

 김태희씨는 “학부는 다행히 4년 전액 장학금을 받아 해결했지만 대학원도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대학원을 포기한다면 대학 부설 평생교육원에서라도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종한씨는 “학비 때문에 고민하는 주변 친구를 많이 봤다. 고령자에게 학비를 감면해 주는 등 정책적 지원이 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글=주정완·이상화 기자
사진=강정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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