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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그 뒤엔 민심이 없었다

조선은 1894년 근대 국가로의 변화를 꾀했다. 개화파 관료들에 의해 주도된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 분야에 걸친 210건의 개혁안과 건의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한 개혁안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갑오개혁은 보여주고 있다.



신년기획 - 신갑오개혁 <상>
친일·친청·친러파 외세에 의지
서로 싸우다 주권 상실의 길로

 조선 침략을 꾸준히 준비했던 일본은 조선의 내정개혁을 개화파 관료들에게 맡겼다. 조선인의 반발을 최소화하고 청나라 등 제3국의 개입을 차단하려는 포석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백성들은 개화파 뒤의 일본을 더 주목했다. 김홍집(당시 52세)을 위시한 개화파 관료들을 친일파로 인식했다. 당시 개혁 주도층은 동학농민군을 비도(匪徒) 등으로 칭해 백성의 지지를 얻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근본적으론 조선 안팎의 정세가 개혁을 실패로 만들었다. 1894년 2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청에 원군을 요청했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역시 조선에 파병했다. 청일전쟁의 서막이다. 그해 6월에 시작된 전쟁은 청의 패배로 끝났다. 거기에 러시아는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는 상황. 그 속에서 조선 내부는 분열했다. 일제시대의 국어학자이자 교육자인 외솔 최현배는 1926년 9월 30일 동아일보에 게재한 ‘조선민족 갱생의 도’에 “친청파, 친일파, 친로(러시아)파라는 당파들이 제각기 자당의 의뢰처가 가장 공고하야 (조선이) 능히 살아나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하다가 필경에는 사방팔방의 의뢰가 그만 허지로 돌아가버려서 타국 의뢰가 자국전도의 결과를 초치할 따름이었다”고 적었다. 서로 주변국에 의지하자고 싸우다가 결국 그중 하나에게 주권을 내주게 된 시대상이 반영돼 있다.



◆특별취재팀=강민석·장세정·채병건·허진·정원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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