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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14좌 베이스캠프를 가다 <19> 시샤팡마(상)

1 시샤팡마 베이스캠프 가는 길 첫날 야영지인 신뎁에 산 안개가 몰려오고 있다. 시샤팡마 지역은 사철 산 안개가 짙게 깔린다.


히말라야 8000m 14개 봉우리 중 시샤팡마(Shisha Pangma·8027m)는 오롯이 중국 영토에 속해 있다. 그래서 쉐칭이라는 이름의 중국인이 1964년 처음 올랐는데, 이는 중국인이 14좌 중 유일하게 첫 등반한 기록이기도 하다. ‘푸른 목초지의 산’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시샤팡마는 산 아래 마을에서 베이스캠프(5300m·이하 BC)까지 가는 길에 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BC까지는 약 20㎞ 거리지만 길이 완만해 걸어서 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다.

안개에 싸인 오르막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고행이 시작됐다



3 시샤팡마 베이스캠프 트레킹의 거점, 니알람 마을.


건물 빼곡한 히말라야의 도시 니알람



시샤팡마 BC의 전진기지는 니알람(Nyalam·3900m) 마을이다. 남면 BC에 진을 치는 원정대와 트레킹팀은 어김없이 이 마을을 거쳐야 한다. 야크에 짐을 싣고 움직이는 카라반이 마을 뒤편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니알람의 인구는 1000여 명으로 규모는 도시와 마을의 중간쯤이다.



니알람은 상하이(上海)에서 시작되는 G318 국도 서쪽 끝에 있다. 니알람에서 남쪽으로 34㎞ 더 내려가면 히말라야 고갯마루를 넘어 네팔로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니알람을 거치는 트레킹 루트는 그대로 ‘트랜스 히말라야(Trans Himalaya)’가 된다.



니알람은 예부터 티베트와 네팔 간에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교역로였다. 지금은 중국 젊은이의 배낭여행지로 인기가 높다. 대부분 시외버스나 히치하이킹(Hitch Hiking)으로 니알람까지 오지만, 더러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오는 경우도 있다. 상하이에서 니알람까지 5350㎞나 되는데 말이다.



니알람의 집들은 빙하에서 발원한 물이 관통하는 협곡 양 옆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아슬아슬한 협곡 양편으로 콘크리트 건물이 빼곡했다. 네팔 국경과 가까워서인지 ‘셰르파(Sherpa·티베트에서 넘어온 네팔 고산족) 숍’이라고 이름 붙인 잡화점이 더러 눈에 띄었다.



마을 분위기는 칙칙했다. 거리는 주인 없는 개로 넘쳐났고, 도로에는 쓰레기가 수북했다. 민가와 식당에서 뱉어내는 오물은 자연스럽게 우유 빛깔 빙하로 흘러 들어갔다.



지난 세기 니알람을 방문한 유럽인의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았나 보다. 20세기 초중반 초모룽마(8848m·에베레스트의 티베트 이름)로 가는 길에 니알람을 방문한 원정대도 니알람을 ‘지저분한 마을’로 묘사했다. 1950년 중국의 티베트 침공 이후 처음으로 입산 허가를 받고 1982년 들어온 영국원정대도 똑같은 내용의 등반 리포트를 남겼다.



히말라야, 특히 티베트 고원은 지구에서 가장 청정한 지역으로 손꼽힌다. 자연만 놓고 보면 틀림없는 말이다. 하지만 인구가 밀집한 시가지는 그렇지 않다. 다른 문명사회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도 급속한 도시화 과정을 밟고 있다. 도시에 사람이 몰리고 식당과 숙소가 늘어나지만 상하수도 등 도시 인프라는 도시화를 따라잡지 못해 오염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순백의 설산과는 딴판이다.



해발 3900m에서의 휴식, 두통이 가셨다



지난해 9월 30일(이하 한국시간) 니알람에서 가장 깨끗한 숙소라는 ‘니알람 스노랜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은 침대 두 개짜리 방이 600위안(약 11만원)으로 꽤 비쌌다. 난방 시설도 없고 샤워부스가 달린 공동화장실을 써야 했지만, 그래도 따뜻한 물이 나와 다행이었다.



호텔 주변에는 쓰촨(四川) 음식을 내놓는 식당이 여러 곳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집은 호텔 정문을 마주한 녹두죽 집이었다. 주인 겸 주방장이 “녹두와 쌀을 물에 넣고 끓이기만 했다”고 했는데도, 국물에서 신기하게도 곰국 맛이 났다. “무언가를 넣었겠지”라며 재차 물어도 대답은 매번 같았다.



본의 아니게 니알람에서 하루 더 묵게 됐다. 본래 일정보다 하루 먼저 도착했는데, 야크 몰이꾼이 “예정된 날짜가 아니면 출발할 수 없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해발 3900m에서 보낸 하루의 휴가는 달콤했다. 살짝 지끈거린 두통도 말끔히 가셨고, 몸과 마음 모두 가뿐했다. 남는 시간은 인터넷 카페에서 소일했다. 우리 일행의 식사를 담당한 조리사 솔롱 소남(38)은 트레킹 도중 간식으로 먹을 바나나·사과·계란 등을 보충했다. 그의 이름을 듣고 ‘솔롱고스(Solongos)’라는 말이 떠올라 한국과 몽골·티베트의 역사를 설명했다. 일행 중에 조선족 가이드가 있어 그가 통역을 담당했다.



“몽골인은 지금도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불러. 예전 몽골 제국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고려 사람의 옷차림을 보고 솔롱고스라고 불렀대.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는 뜻이야.”



“오, 그래?” 솔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당시 고려의 여자아이는 색동저고리라는 옷을 즐겨 입었어. 소매에 무지개 색깔을 넣은 옷이야. 아마 너의 이름인 솔롱도 몽골 사람들이 왔을 때 붙인 것일 수 있어.”



순전히 나의 주장이었지만 듣고 있던 솔롱이 신기해했다. 티베트의 전통 의상도 우리의 한복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어깨에서 양팔까지 무지개 빛깔처럼 화려한 색을 자랑한다.



유목민족인 티베트와 몽골은 12세기 이후 교류가 잦았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당시 티베트 라마불교의 수장 팍빠를 스승으로 삼았다는 기록도 있다. 16세기 후반에는 몽골의 알탄 칸이 티베트 겔룩파(Gelugpa·라마교의 주류 종파)의 지도자 소남 갸초(Sonam Gyatso)를 몽골로 데려와 불교를 전파했다. ‘호수처럼 큰 스승’이라는 뜻의 ‘달라이 라마’라는 호칭도 알탄 칸이 소남 갸초에게 내린 이름이다.



2 야영지인 신뎁은 시샤팡마 남쪽에서 내려오는 빙하 두 개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우직한 야크처럼 한 걸음씩 전진·전진 …



10월 3일 니알람을 출발해 시샤팡마 BC로 향했다. 길에 들어서자마자 짙은 산안개가 몰려와 시야를 가렸다. 동서로 2400㎞나 되는 히말라야 산맥을 여인의 몸으로 치면, 시샤팡마 지역은 잘록한 허리 부분에 속한다. 산 아래 협곡에 자리 잡고 있어 일기 변화가 심하다. 머리 위로는 8000m 설산이지만, 자동차로 1시간만 내려가면 아열대 지역이다. 이 때문에 이곳의 기상은 마녀의 심술처럼 예측하기가 어렵다.



4000m 지점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자 중국 트레킹팀의 캠프가 보였다. 캠프에서 만난 한 사람이 “하루 전에 시샤팡마 베이스캠프를 향해 출발했지만 5시간을 걸어도 나오지 않아 5200m 지점에서 여기로 다시 돌아왔다”고 말했다. 베이스캠프(5300m)가 바로 눈앞이었지만 산안개 때문에 찾지 못하고 되돌아온 것이었다.



정오가 지나면서 산안개가 살짝 벗겨졌다. 순간, 민둥산의 사면을 따라 난 좁은 길이 말 근육에 드러난 핏줄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안개 때문에 오르막길의 끝을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고행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럴 때는 우직한 야크 한 마리로 변신하는 게 좋다. 호흡을 가다듬고, 보폭을 좁혀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전진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우리 일행은 이미 수차례 히말라야 14좌 베이스 캠프를 갔다 온 경험이 있어 고도차 200m를 30분 만에 올라갔다. 문득 차가워져 고도를 알려주는 손목시계를 보니 해발 4200m 지점이었다.



첫날 야영지는 시샤팡마 남벽에서 흘러내린 빙하 두 개가 합수하는 지점이었다. 가이드가 신뎁(Shinthep·4600m)이라고 이름을 일러줬다. 캠프 옆으로 물줄기 여러 갈래가 빙퇴석 자갈밭 위를 흐르고 있었다. 해질 무렵 산안개가 더욱 짙어져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시계가 50m 정도에 불과했다. 안개 속에서 첫날밤을 보내야 했다. BC는 걸어온 만큼 하루를 더 가야 있었다.



시샤팡마(중국)=김영주 기자

사진=이창수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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