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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띄우는 편지 ① 문태준 시인

갑오(甲午)년 청마(靑馬)의 해다. 들판을 질주하는 힘찬 말처럼 진취적이며 역동적인 한 해가 되길 소망하는 2014년 새 아침, 올해 등단 20주년을 맞는 시인 문태준이 독자에게 새 날의 희망과 다짐을 담은 편지를 띄웠다. 모두에게 상서로운 기운과 행복한 나날이 가득하길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겨울의 들판은 황량하지만 봄을 기다리는 생명을 품었기에 따스하고 포근하다. 하얀 눈이 내려 앉은, 그 위로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무결의 겨울 들판을 걷는 시인의 마음도 새로운 시를 틔워낼 따스함을 품은 그대로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모든 사물에게 형제이고 자매여라

새해가 밝았다. 새해는 새뜻하다. 서설(瑞雪)이 내린 눈길을, 아무도 앞서 걸어간 이 없는 조용하고 맑게 빛나는 눈길을 걸어가는 듯한 기분이다. 한천(寒天)은 고드름의 둘레를 두껍게 감으며 빙빙 돌지만, 한 마리 새는 하늘의 정수리에 높게 떠 대자유의 창공을 날아간다. 새는 높은 의지로 떠 있다. 나무는 모든 장식을 벗었다. 벗고 섰다. 남을 것만 남았다. 굳고 깨끗하다.



 새해 아침이면 나는 찬물을 한 컵 받아 입을 헹군다. 이것은 나의 어머니로부터 배운 신성한 새해의 의식. 어머니는 숭배하고 맞이할 것이 있을 때마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침착하게 찬물로 입을 헹구셨다. 그래, 신성한 새해 아침이 시작된 것이다.



 “비시(非詩)일지라도 나의 직장(職場)은 시(詩)”라고 썼던 김종삼 시인의 시 ‘평화롭게’를 펼쳐 읽는 아침이다.



“하루를 살아도 / 온 세상이 평화롭게 / 이틀을 살더라도 / 사흘을 살더라도 평화롭게 // 그런 날들이 / 그날들이 / 영원토록 평화롭게―”라고 쓴 시를 읽는 아침이다.



연이어 ‘내가 재벌이라면’이라는 시를 읊조리는 아침이다. “내가 재벌이라면 / 메마른 / 양로원 뜰마다 / 고아원 뜰마다 푸르게 하리니 / 참담한 나날을 사는 어린 것들을 / 이끌어 주리니 / 슬기로움을 안겨 주리니 / 기쁨 주리니.” 이제 받을 만큼 받고 살았으니 내가 얻어 가진 것을 나눌 줄 알며 살겠다는, 푸진 생각도 가져보는 아침이다. 메마른 겨울을 봄이 푸르게 하듯이 세상을 푸릇푸릇하게 만드는 데 미력이나마 보태며 살겠다는 생각도 가져보는 새해 아침이다.



 배포도 두둑하게 가져본다. 이 우주의 물건 가운데 제일 큰 것이 하늘과 땅, 해와 달이지만, 두보(杜甫)는 일찍이 해와 달이 새장 속의 새에 불과하고, 하늘과 땅은 물 위에 뜬 부평초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마음을 졸렬하게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구애됨이 없이 살겠다는 의지도 세워본다. 마음은 부리기 나름 아니던가. 마음은 본래 큰 것으로 말하자면 세상을 품고, 작은 것으로 말하자면 바늘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니 마음의 장광(長廣)을 대해(大海)처럼 설원(雪原)처럼 가져볼 요량이다. 설령 피로와 고통이 거센 파도처럼 눈보라처럼 내게 밀려오더라도.



 새해에는 양지(良知)도 얻었으면 한다. 양지는 의(義)와 불의(不義)를 헤아리는 것이니, 명나라 때의 유학자 왕양명(王陽明)은 제자에게 다음의 시를 지어 양지를 얻을 것을 간곡하게 당부했다. “양지는 바로 홀로 알 때이니, 이 양지 밖에 다른 양지가 없다. 누군들 양지를 갖고 있지 않으리오만 양지를 아는 자는 도리어 누구인가?” 양지를 얻는 것은 혼자만이 가능하다는 뜻이니, 새해에는 나의 내면에서 이 양지를 발견하려 한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은 나로부터 말미암는다. 내가 씨앗을 뿌리고, 내가 자라게 하고, 내가 열매 맺게 하고, 내가 거둔 것이다. 언젠가 탄허 스님이 쓴 한문 구절을 노트에 옮겨 적은 적이 있고, 그것을 눈이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았으니 그 문장은 이러하다. “텅 빈 방(마음)에서 흰 빛(광명)이 나오는 것은 밖에서 얻은 것이 아니요, 집안 가득 봄기운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이 얼마나 멋진 가르침인가.



 융통성도 좀 가졌으면 좋겠다. 그동안은 얼마나 가차 없이 살았던가. 그때그때의 사정과 형편을 보아가며 살아도 좋을 일. 자물통처럼 벽돌처럼 새해를 살 수는 없는 일. 스스로를 폐광처럼 황폐하게 만들지 말고 살아 갈 일을 생각한다. 가벼움과 환함과 트임의 세계에 살 일을 생각한다. 풋사과처럼, 감귤처럼, 여울처럼, 두레박에 담긴 우물물처럼, 물안개처럼, 물렁물렁한 구름층처럼, 하얀 백지처럼, 잘 발효된 빵처럼, 차오르는 달처럼, 붉은 뺨에 생겨난 미소처럼 살 일을 생각한다.



 대접 받을 마음은 버릴 생각이다. 언젠가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이 세상에 당신이 불쌍해할 사람은 없어요.”라고. 그는 이 말을 그의 아버지로부터 거듭해서 들었다고 했다. 불쌍해할 사람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모든 존재는 동등하다는 뜻일 것이다. 동등하게 고귀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므로 박정하게 대할 어떤 까닭도 없다. 얕잡아 보아서도 안되는 것이다. 애초부터 가련하게 탄생한 존재는 없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시 ‘금언’에서 “그렇게 너는 모든 사물에게 / 형제이고 자매여야만 한다, / 그것들이 네게 아주 스며들도록, / 네가 내 것 네 것을 구별할 수 없도록. // 어떤 별도, 어떤 잎도 떨어지지 말기를― / 네가 더불어 죽어 가야 하니! / 너는 또한 그렇게 그 모두와 더불어 / 시시각각 부활할 것이다.”라고 쓴 뜻도 이와 같을 것이다.



 새해에는 굽은 길을 많이 걸어볼 계획이다. 곧게 난 길이 아니라 휘어진 길을 선택해서 오래 걷는 시간을 자주 가질 생각이다. 산길이나 들길이나 해변을 따라 난 곡선의 길을 걸을 생각이다. 꼿꼿한 것을 버리고 구부러짐을 얻으려는 함은 무엇 때문인가. 순함과 온화함과 부드러움을 얻기 위함이다.



 또한 거친 말은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거친 말을 ‘발 씻은 대야의 물’에 비유해 수구(守口)를 강조한 한 이는 부처였다. 좋은 말을 종이나 경쇠를 고요히 두들기듯 하게 되기를 바란다.



 새해의 태양이 떠올랐다. 내 맘에 꼭 맞는 당신의 마음속에 일광(日光)이 가득 하길 빌어본다.



◆문태준=1970년 경북 김천 출생. 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 등이 당선되며 등단.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산문집 『느림보 마음』 등. 미당문학상·소월시문학상·동서문학상·노작문학상·유심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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