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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0)<제자 박갑동>|<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108)|박갑동

<주도권 논쟁>
박헌영이 황해도 해주에서 서울의 당 지도부에 독자적인 통솔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허송세월 할 즈음 서울의 당내에서는 남로당의 영도권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즉 남로당을 지도하는 자가, 최고의 지도자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내 기억으로 이 문제가 공식석상에서 크게 문제된 것은 47년 여름 남로당 중앙위원회 간부 부장인 이현상이 소련 공산당 최고당 학교에 유학하러 가는 도중 평양에 들렀을 때였다.
당시 북로당 중앙 간부 부장은 이상조로 그는 평양에 들른 남로당 중앙 간부 부장을 환영한답시고 주연을 베풀었었다. 그 자리에는 북로당 중앙 선전 부장 김창만 등 부장급 간부들이 참석했는데 몇순배의 술이 돌아 거나하게 취하자 『조선인민의 최고 지도자가 누구냐』는데 화제가 모아졌다.
그때는 북로당이 결성되어 서울의 남로당과 형식상 동등한 지위는 됐으나 누구나 「서울중앙」, 즉 남로당이 조선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정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북로당 간부 부장인 이상조와 선전 부장 김창만이 『평양이 우리 나라의 정치적 중앙이며 김일성이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라고 억지를 쓰며 이론을 폈다.
이·김 두사람은 통일성이 남주에서 오랫동안 항일 유격 투쟁을 했느니 하며 김일성이 공산당을 주도해야 한다는 등 긴말을 늘어 놓았다.
이현상이 뒤에 한말이지만, 그같은 문제로 더군다나 평양에서 그들과 다투는 것이 조금도 이로울 것 같지 않아 참으려 했으나 두사람이 어찌나 끈질기게 덤벼드는지 한마디했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말하는 그 사람은 조선의 국토와 인민으로부터 떨어져 외국에서 성장했고, 외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그들의 지시로 외국의 이익을 위해 투쟁한 것밖에 더 있는냐. 그러나박헌영은 국내에서 투쟁했다. 그것도 그 사람보다 15년이나 일찌기 말이다. 박헌영은 25년에 조선 공산당과 조선 공산 청년 동맹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고 혹독한 일제 탄압에도 국내에서 투쟁해 왔다. 그의 경력이야말로 한점의 흐린데도 없는 사람이다.
김일성은 내가 듣기로는 분명이 김성주라고 하는데 언제부터 왜 김일성이 됐는가 명백하지도 않고 그의 투쟁 경력도 확실한 것을 알리지 않아 불투명한데가 많다. 어떻게 박헌영을 제쳐놓고, 해방 후 외국에서 갑자기 나타난 경력 불명의 자를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겠는가.』 이현상은 그 자리에서 공산주의자로서는 처음으로 김일성에 대한 비판과 결정적으로 그를 인정할 수 없다는 반론을 폈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상조·김창만은 크게 화를 내며 『김일성만이 소련 및 중국 공산당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며 현실적으로 북쪽을 지배하고 있다. 누구의 힘이 더 강한가』고 소리치며 벌려놓은 술상을 치며 이현상에게 달려들었다 한다.
술자리는 양파의 싸움으로 수라장이 됐고 어느 한쪽도 지지 않겠다는 듯 욕지거리를 해가며 싸웠다.
그런데 다음날 이 사건이 김일성과 박헌영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사태는 야릇하게 진행됐다. 즉 두사람의 입장이 모두 난처해졌다.
박헌영은 이 소식을 듣자 재빨리 이현상에 대해 견책 처분을 내린다고 밝히고 당초 예정된 소련 유학을 취소시키고 서울로 돌려보냈다.
박헌영의 이러한 조치에 대해 김일성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지 다음날로 이상조를 간부 부장직에서 해임시켜 상업관리국장으로 강등시켰다.
남과 북의 공산당이 서로 이같은 조치를 했기에 당시 험악하던 박헌영과 김일성 사이의 최고 지도자론을 둘러싼 논쟁은 정면 충돌을 일시적으로나마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소문은 곧 서울에까지 알려졌다. 서울의 반 박헌영파, 즉 사로당계는 이 소문을 듣자 곧 반격에 나서는 듯 했다.
그들은 북쪽에 쫓겨가 있는 박헌영이 이론 투쟁에서 패배해 평양에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남로당원들을 자기네 편에 끌어들이려는 공작을 꾸미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즈음 어느날 종로 뒷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강병도를 만났다.
강병도는 해방 후 공산당 기관지인 해방일보에 나와 같이 근무하다가 46년 여름 박헌영을 반대하고 떨어져 나간 뒤 대회파의 중책을 맡는 바람에 당에서 제명된 자였다.
그러나 그는 기회를 보는 눈이 빨라 대회파가 열세에 몰리자 다시 재빨리 자기 비판을 한 뒤 남로당에 들어왔다.
나는 이같은 그의 변절이 못마땅해 별로 가깝게 지내지 않았는데 그날은 유독히 반가운 얼굴로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은 채 나에게 다가왔다.
『박헌영이 평양에서 체포된 사실을 아시오. 김일성에게 붙잡힌 사실을 아느냐 말이요』하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순간 진실의 여부를 가릴 겨를도 없이 큰 변동이 일어나겠구나 생각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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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