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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중립지대 안의 수용소(1)|인도군의 포로관리(1)

휴전조인이 끝난지도 월서가 지난 53년9월초 인천 앞바다의 미 해군항공모함 갑판 위에는 30여대의 「헬리콥터」가 요란한 폭음을 내면서 북녘을 향해 부산하게 이항했다.
흰 「더번」을 쓴 인도 군인들은 자기들이 타고온 인도군 수송선에서 내려 미 항모에 갈아탄 다음 줄을 지어 「핼」기에 탑승하고.
이는 「귀환설득」을 받게될 송환부원포로들의 관리를 맡은 인도군 1개 여단 6천여명의 병력이 인천항에 도착, 미군 「헬」기에 실려 판문점 부근의 비무장지대로 공륜되는 광경이었다.
<마지막 정치전쟁에 안간힘>
6·25전쟁 중에도 전혀 볼 수 없었던 이 같은 인도군의 대규모 공수작전은 휴전협정 제3조 재51항(B)에 의거, 송환거부 포로처리를 위해 구성된 중립국 송환위원회 (NNRC)의장국인 인도를 몹시 못마땅해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강경한 「인도군의 한국영토 착륙거부」때문이었다.
가까스로 비무장지대에 주둔한 인도 군은 「인도인의 도시(Hind Nagar)」라는 이들 사령부를 설치, NNRC 의장이 된 「티마야」중장과 경비사령관 「드로트」소장의 지휘를 받으며 「유엔」측과 공산 측으로부터 9월24일까지 2만3천여명의 포로를 각각 인계 받았다.
이렇게 해서 53년8월5일부터 9월6일까지 쌍방간의 전쟁프로 교환도 완료한 「유엔」과 공산군은 또다시 판문점 비무장지대에서 한국전쟁의 속??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위 「90일간의 송환불원 포로 설득」의 정치전쟁 서막을 열었다.
3년 동안을 끌어온 6·25전쟁이 7월27일 「휴전」에 의해 군사적인 면에서는 무승부로 끝났지만 자유·공산 양 진영은 이 설득전을 통해 애초부터 「이데올로기」를 배경으로 했던 사상전쟁의 마지막 승패를 가름하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더욱이 휴전회담의 핵심이었던 포로송환문제에서 「유엔」군측의 자유송환 원칙에 부분적으로 굴복하고만 공산측은 군사침략에 실패한 그들의 위신을 조금이라도 만회해보려는 심정으로 북송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에 대한 설득을 악착같이 전개했다.
인도는 「스위스」 「스웨덴」 「체코」 「폴란드」 등과 더불어 5개국으로 구성된 NNRC의 의장국으로 임무수행에 명실공히 절대적인 「열쇠」를 쥐고 있을 뿐 아니라 일체의 포로관리권을 장악하고있었다.
반·친공 적인 중립국이 2대2의 비율인 중립국 송환 위의 「캐스팅·보트」를 행사하게된 인도는 1개 여단의 관리군을 거느리고 비무장지대 안에서 지난한 포로관리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유엔」측은 9월1일 설득전의 사령탑으로 「유엔」군사 송환단을 설치, 포로의 이양과 설득에 관한 업무를 수행키 시작했는데 국군에서는 만반의 태세를 갖춘 영관급 장교 6명이 설득위원으로 UNCREG에나가 활약했다.
인도군은 9월24일까지 포로인수를 완료, 중립지대에 설치된 수용소에 5백명 단위로 분산 수용하고 경비와 설득안내업무를 관장해 나갔다.
그러면 당시 인도군의 프로관리 상황을 설득위원으로 나가 있던 국군장교들로부터 들어보겠다.
▲박영준씨(당시 육본정훈감 겸 한국군포로설득위원단장·준장=예비역 육군소장·현 혜인중기사장·58)<휴전후의 포로교환에서 아군측은 한국군 7천8백여 명과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4천7백여명을 인수하고 북한 공산군 출신 포로6만여명과 중공군포로 5천6백명을 적측에 인계함으로써 질환을 희망하는 전쟁프로 문제는 그런대로 마무리했어요.
<"친공적"이라고 항의각서도>
그러나 6·18석방에 낙오가 돼 아직도 「유엔」군 당국이 억류하고 있는 반공포로 2만2천여명(북한 공산군=7천8백90명·중공군=1만4천7백명)과 공산측이 내놓은 「유엔」군 출신 친공포로 3백69명(한국군=3백35명·미군 및 기타=34명)을 처리해야할 미묘한 과제가 도사리고 있었어요.
휴전협정 부록에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인도·「스위스」·「스웨덴」·「체코」 ·「폴란드」 등으로 구성된 중립국질환위원회의 인도군 관리하에 넘겨 90일간의 설득을 받은 후 다시 1개월간 정치회담의 결과를 기다려 귀환 가부를 결정한다』고 규정돼 있었어요.
이래서 「유엔」·공산 양측은 서로가 반·친공 포로들을 앞에 놓고 입이 마르도록 애를 태우며 『어서 마음을 돌려 내 품으로 돌아 오라』는 정치적인 설득 전을 벌이게 된 겁니다.
이미 포성은 멈추었지만 전쟁의 막후극 같은 이 「쇼」적인 사상극은 그 의의가 자못 큰 것이었고 그에 따른 「에피소드」도 많았어요.
우선 우리 한국정부는 『여하한 인도군도 대한민국 땅을 한발 짝도 밟을 수 없다』고 선언, 포로관리차 내한한 여단병력의 인도군은 미군의 공륜작전으로 간신히 중립지대에 주둔했어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의 경계선인 38선상에서의 휴전』을 주장한 「네루」수상을 못마땅해하던 참인데 인도가 NNRC의 의장국이 되어 포로설득 전에 관여한다니까 인도 군의·한국 상륙을 절대 거부했던 거예요.
NNRC의 의장국으로 거드름을 떨던 인도 군은 벽두부터 난관에 봉착, 코가 좀 납짝해진 셈이었지요.
나는 8월초 백선엽 참모총장으로부터 포로설득 전에 나설 적격자를 선발, 지휘하라는 지시를 받고 김형일 정보국장(현 국회의원·신민)과 상의해서 최각균·윤하준 중령 및 김귀수·선우전·김진구·김동식 소령 등 6명을 설득위원으로 뽑아 특수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9월초부터 나는 이들 영관장교 6명을 데리고 「햄블린」 미 육군회장이 지휘하는 문산 UNCREG로 들어가 중립지대의 설득 장을 직접 드나들며 ①설득업무 ②우리 반공포로들과 헌병총사령부와의 연락관계 ③국방부·육본에 대한 모든 보고 등을 지휘했어요.
인도군의 포로 관리태도가 친공적이라고 해서 우리 정부는 정식 항의각서도 내고 국내여론이 비등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렇게까지 편파적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티마야」중장을 비롯한 인도 군 장교들은 우리 「캠프」나 UNCREG사무실에 자주 놀러와서는 공산측의 실정들을 솔직이 얘기해주는 등 때로는 상당히 우호적이었어요.
우선 언어소통이 잘되니까 「티마야」장군 등 영어에 유창한 인도군들은 자연히 우리측에 친밀감을 가졌던 게 사실이예요.
<언어소통 잘돼 한국측에 호의>
그러나 소수의 하급장교나 사병들이 약간 친공적이었던 것은 공산 측이 이들을 개성 등지로 초대해서 환대를 베푼 반면우리 국군에서는 정부방침을 때라 저녁한번 안 사줬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미군 측에서는 더러 술과 식사를 대접하는 일도 있었습니다만요.>
▲선우전씨(당시 UNCREG 포로설득위원·소령=현 국방부 정훈국장·48)<우로 한국군 설득위원 6명은 8월초부터 미군 후방기지사령부 안에 부설된 「유엔」군 포로설득 장교 교육 대에 들어가 2주간의 교육을 받고 UNCREG에 배속됐습니다. 「유엔」군사는 9월22일까지 송환 불원 반공포로들을 모두 군사분계선 남방 중립지대의 인도군 관리하의 신설 수용소로 인도를 완료했고, 24일에는 공산 측으로부터 「유엔」출신 친공포로들이 역시 인계됨으로써 인도군은 포로관리의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어요.
북한 공산군은 반공포로들이 인도군에 인계되는 도중부터 나와서 협박적인 태도로 규정에 절대 금지돼있는 설득대상포로의 주소·성명을 알아내려고 발악을 합디다. 즉 빨리 주소를 파악해 반공프로들의 가족을 찾아가 위협, 귀환을 기어이 시켜 보자는 수작이었지요.
그러나 공산거들은 우리 반공포로들이 던지는 돌덩이에 얻어맞고 한국정부의 강경한 부고를 받자 어이없이 물러서고 말았어요.
인도군에 대한 우리반공포로들의 처음인상은 같은 동양 문화권이라 그런지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디다.
인도군들은 신분의 귀천이 엄격한 가운데에도 사병과 장교가 완전히 구분되어 있고 군기가 매우 엄한 듯이 보이더군요.
<바지는 미국제, 신발은 소련제>
사병들은 50m정도의 원거리(?)에서도 장교들한테 원기있고 절도있는 거수경례를 붙이며 지나가구요.
또 일부 인도 군들은 「중립」을 지킨답시고 모자는 인도의 「터번」을, 「자키트」와 바지는 미·영제를, 신발은 공산 군 가죽장화를 신고 으시대면서 익살스러운 「쇼」를 부려 사람들을 많이 웃겼어요. 인도군사령관이며 NNRC의장이기도 했던 「티마야」장군은 아주 「유머러스」한 영국 풍의 훌륭한 군인이었어요.
그는 인도군 경비병이 설득장에서 앙탈을 부리는 여자 친공포로를 제지하느라 땀을 뺐다는 얘기를 듣고 『포로관리를 하러오면서 여군을 안 데리고 온 것은 인도군의 천려일실이었다』고 「조크」를 합디다.
개인장비를 제외한 인도군의 모든 장비와 소요경비는 그들의 한국체재기간동안은 「유엔」군이 부담했습니다.>
◆주요일지(1953년5월21일∼24일)
※21일▲동부전선서 중공부과 12시간격전 ▲이 대통령, 영국군 시찰 ▲「수에즈」군하 거주 영국인 철수권고
※22일▲「해리슨」대포, 납북인사 송환에 최선 다짐 ▲소 경비정, 7척의 일어선 나포.
※23일▲지난1주일에 「미그」28대 격추 ▲평양방송, 「유엔」측에 공산제안수락촉구
※24일▲하 외무, 중공군 잔류 허용하는 휴전반대성명 ▲「퀴리노」대통령, 자유당에서 차기 대통령후보지명획득
<알림>=6·18반공포로석방 때 광주에서 석방된 김은국씨 행방을 형인 김용준씨가 찾고있으니 본인이나 이본 소식을 아는 분은 충북 영천군 영천읍 완산3동 「아카데미」극장 앞의 김용준씨나 중앙일보 편집국 「민족의 증언」담당자 앞으로 알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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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