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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계 원자폭탄 표범 브로치 도도한 자태 뽐내다

세계 최고의 주얼리 제작 및 판매업체 중 하나로 꼽히는 메종 까르띠에(Cartier). 1847년 파리의 작은 보석 가게에서 시작한 이 프랑스 브랜드는 그 자체로 유럽 장식예술의 역사다. 17세기 고전적인 스타일부터 기하학적이면서 이국적인, 그리고 파격적인 아르누보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사회의 취향에 대한 흥미로운 증거라 할 수 있다.

파리 그랑 팔레의 까르띠에 ‘스타일과 역사’전

12월 4일부터 2014년 2월 16일까지 파리 그랑 팔레의 살롱 도뇌르에서 열리는 ‘까르띠에, 스타일과 역사’ 전시는 그 궤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자리다. 1847년부터 1970년대까지 등장한 주얼리, 고급 액세서리, 시계, 미스터리 클락 등 600여 점을 시대별 예술적 관점에 따라 구분해 당시의 트렌드와 장인 정신을 함께 부각했다. 까르띠에 소장 컬렉션을 중심으로 공공기관(파리 장식미술관·의상장식박물관·국립도서관·장식미술도서관)과 개인 소장자들로부터 대여받은 50점도 추가했다. 또 화집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아이디어 노트, 스케치 등 300여 건의 오리지널 자료들도 내놓았다.

전시장 사진: Pierre-Olivier Deschamps © Cartier, 워크숍 사진: Pierre-Emmanuel Rastoin © Cartier, 아카이브 사진: J.-M. Del Moral © Cartier, 제품사진: © Cartier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까르띠에 전시 전경
전시장은 크게 11개의 테마로 구성됐다. 도입부에는 까르띠에가 이름을 알린 19세기 말의 시대 배경을 알 수 있도록 주얼리와 함께 당시 그림과 사진, 귀부인 의상까지 복도 좌우에 전시했다.

복도 중앙에 마련된 원형 쇼윈도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10개의 티아라(여성용 왕관)가 관람객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사실 까르띠에의 명성은 호화스러운 티아라 제작에서 본격화됐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이 거행된 1902년에는 각국 왕실로부터 한꺼번에 27개의 왕관을 주문받았을 정도다.

진입부를 벗어나자 거대한 마술상자 같은 공간이 펼쳐졌다. 어두운 천장에 영사된 알록달록한 애니메이션이 음악과 함께 천천히 움직이며 주얼리로 채워진 거대한 만화경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선사했다. 1200 평방m, 17m 높이의 웅장한 공간이 환상의 장소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픽 디자인 에이전시 ‘안토니+마뉴엘(Antonie+Manuel)’이 제작한 넓이 135m, 높이 13m의 ‘까르띠에로스코프(Cartieroscope)’ 덕분이다. 전시 영상을 만들기 위해 살롱 도뇌르를 방문한 안토니와 마뉴엘은 이 공간을 그레방 박물관(Musée Grevin)의 ‘거울의 방’처럼 만들어야겠다 생각했고 까르띠에 주얼리 이미지를 사용해 8가지 테마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이 영상은 이들의 홈페이지(http://www.antoineetmanuel.com)에서 테마당 45초씩 감상할 수 있다).

1914년 제작된 미스터리 클락 / 1922년 제작된 싱글 악스 미스터리 클락 / 1923년 제작된 포르티크 그랜드 미스터리 클락
장인정신의 결정체, 미스터리 클락
까르띠에는 20세기 초반부터 자신만의 독특한 주얼리를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러시아 파베르제의 세밀한 보석 공예, 일본의 인로(印籠·약 등을 넣어 허리에 차는 타원형의 작은 함) 등 섬세한 공예품, 20년대 이집트 투탕카멘 왕릉의 발견 등은 이들의 창작력에 불을 지폈다. 30년대 중국 모티브가 대유행일 때는 중국의 전통적 색상 매치나 모티브를 재빨리 낚아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두 마리의 키메라(용)가 머리를 서로 마주보고 있는 팔찌다. 이 시리즈는 50년대 이후 다시 제작될 정도로 대 히트를 쳤다.

당시의 예술사조와 패션 경향이 주얼리 제작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여성의 실루엣을 강조하는 의상이 제작되면서 긴 목걸이가 등장했다. 이렇게 되자 진주와 다이아몬드가 많이 사용됐다. 마침 남아프리카에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면서 다이아몬드 공급이 늘어났다. 20년대까지 진주목걸이는 여성의 로망이었는데, 까르띠에 매출의 60%가 진주 제품에서 얻어질 정도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선호되던 블랙과 화이트의 매치가 핸드백·티아라·목걸이 및 각종 소품 제작에도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볼 수 있었다. 큐비즘과 미래파가 유럽의 주 예술사조로 자리 잡을 때에는 까르띠에 제품들도 기하학적으로 변했다. 덕분에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풍부한 아르데코 시대로 진입할 수 있었다.

19세기의 마술사 장외젠 로베르우댕이 개발하고 시계 장인 모리스 쿠에가 완성한 ‘미스터리 클락’은 기계 장치와 분리된 시계바늘이 크리스털 속에서 독립적으로 마법처럼 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둥근 유리 전시장에 진열된 15점의 작품들은 숙련된 장인들이 끈기와 정성으로 만들어낸 정교함과 장인정신의 결정체다. 방문객들은 진열장을 수차례 돌면서 제작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눈을 부라렸지만 결국 아무 소득 없이 다음 코너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마하라자 부핀드라 싱 경의 요청에 의해 제작된 거대한 의식용 목걸이. 1928년 / 투티 프루티 스타일의 목걸이. 1936년 / 윈저공이 공작 부인을 위해 터키석을 제외한 모든 보석을 제공하면서 까르띠에에 제작 주문한 빕 네크리스 / 윈저 공작부인의 팬더 브로치
벨기에 여왕의 갈란드 스타일 티아라, 1910년
2930개 총 1000캐럿 다이아로 만든 목걸이
역사적 인물, 시대의 트렌드 세터와의 연결을 조명한 섹션은 매우 흥미로웠다. 사실 까르띠에를 애용한 저명 인사도 부지기수다. 헤밍웨이의 주옥 같은 소설이 까르띠에 만년필로 쓰였다. 영화배우 리처드 버튼이 69년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생일선물로 준 69.42캐럿짜리 물방울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영국 윌리엄 왕자와 결혼한 케이트 미들턴이 결혼식에서 착용한 종려잎 모티브의 다이아몬드 티아라도 까르띠에 제품이었다.

전시장에서는 영화배우 글로리아 스완슨(왼쪽 사진)이 ‘완전한 이해’(1933)와 ‘선셋 대로’(1950)에서 착용해 유명해진 록 크리스털-다이아몬드 플래티넘 뱅글팔찌도 보였다. 반달형으로 절단한 록 크리스털의 가장자리를 플래티넘으로 에워싸며 다이아몬드를 박은, 전형적인 아르데코 시대의 볼드하고 기하학적인 이 두 개의 팔찌는 반세기가 넘은 지금 봐도 현대적이다. 또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소장하고 있는 브로치, 윈저공과 공작부인의 홍학 브로치,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의 우아한 취향을 알 수 있는 컬렉션 등 세기의 커플들이 사랑의 징표로 구입했던 주얼리들도 눈길을 끌었다.

28년 파티알라(Patiala)의 마하라자 부핀드라 싱 경의 요청에 의해 제작된 거대한 의식용 목걸이도 화제였다. 2930개 총 1000 캐럿의 다이아몬드로 제작된 이 목걸이는 다섯 줄의 다이아몬드 루프와 중앙에 드비어스가 발견한 234.69 캐럿의 쿠션 커트 옐로 다이아몬드가 부착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목걸이 중 하나다. 가슴을 다 덮을 정도로 커서 과연 진짜 다이아몬드인지 의심이 들 정도인 이 목걸이가 공식석상에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마하라자의 아들 야다빈드라가 착용한 1946년. 한동안 종적을 감췄다가 반세기가 흐른 후 런던의 한 중고 보석상에서 발견됐다. 중앙에 세팅된 드비어스의 옐로 다이아몬드와 다른 큰 다이아몬드들이 없어진 채였다. 까르띠에는 이를 구입해 2년간의 보수 작업을 거쳐 지금의 목걸이로 재탄생시켰다. 옐로 다이아몬드 부분은 똑같은 형태와 크기의 합성 다이아몬드로 대체했다.

전시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윈저 공작부인이 소유했던, 1949년 제작된 표범 브로치였다. 타임지가 ‘보석계의 원자폭탄’이라 언급했을 정도로 까르띠에 역사상 가장 특별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정교하고 우아하게 제작된 표범 형상에 카시미르 캐보션 사파이어를 포함한 총 152.35캐럿의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를 조각해 세련된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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