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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괭이부리마을 '행복한 재개발'

26일 괭이부리마을 주민들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서로 끌어안았다. “추운 겨울이지만 어울려 사는 게 행복하다”는 이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왼쪽부터 김명광(71), 김금선(76), 김향자(75), 이순자(74), 정성숙(58)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인천지역의 대표적 판자촌으로 손꼽히던 괭이부리마을(동구 만석동 9번지 일원). 이곳에서 60년 넘게 살고 있는 김영철(67)씨에게 요즘 웃음꽃이 피었다. 어릴 적부터 원했던 따뜻한 ‘보금자리’의 꿈을 이뤘기 때문이다. 2013년 12월은 남은 인생 동안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기억될 듯하다.

60년 역사 인천 대표적 판자촌에 빨간 지붕 새 집 98가구
원래 살던 주민 100% 재입주는 처음 … "두 발 뻗고 사니 좋아"



 김씨가 꿈꾸던 보금자리는 고층 아파트나 고급 주택이 아니었다. 낮에는 햇살이 들어오고, 비가 와도 물이 새지 않는 집이면 족했다. 겨울에도 온기가 돌아 편하게 쉴 수 있고, 공동화장실 앞에서 줄 서지 않아도 되는 집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랐다.



26일 희망키움터 3층 공동작업장에서 주민들이 볼펜조립 작업을 하고 있다.
 김씨의 꿈은 새로 지은 ‘괭이부리마을 보금자리주택’에 아내 방인숙(64)씨와 함께 입주하면서 현실이 됐다. 지난 2일 준공식을 한 이곳은 괭이부리마을 남쪽 언덕 위에 세워진 지하 1층, 지상 4층의 2개 동, 98가구의 연립주택 단지다.



 김씨는 전용면적 38㎡(약 11.5평)짜리 영구임대주택을 분양받았다. 그는 “아내와 함께 여생을 보내기엔 최적의 보금자리”라며 “몸이 불편한 아내도 마음 편하게 두 발 뻗고 쉴 수 있어 행복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전에 살던 집은 워낙 비좁아 아들 가족이 찾아오면 서로 무릎이 맞닿을 정도였다. 여기는 새집이라 깨끗하면서 넓고 아늑한 것이 마음에 든다”고 덧붙였다.



 괭이부리마을 보금자리주택은 여러모로 특이하다. 우선 ‘원주민이 행복한 재개발’을 목표로 건설됐다는 점이다. 낡은 집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집을 짓는 것까지는 여느 재개발과 비슷했다. 다른 점은 누가 새집에 들어와 사느냐 하는 것이다. 환경이 열악한 주택가를 재개발하되 기존 주민을 쫓아내지 말자는 공감대가 행정기관과 주민 사이에 이뤄졌다. 저렴한 공공임대주택을 지어 원주민이 다시 살 수 있게 하고 외부인에겐 입주자격을 주지 않는다는 원칙이 마련된 것이다. 임대주택 건설비 110억원 중 인천시는 57억원, 중앙정부는 53억원을 부담했다. 재개발 규모가 작고 대부분의 땅이 국공유지였기에 사업 진행 과정의 어려운 점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명국 인천시 주거환경정책관은 “전국 처음으로 원주민이 100% 재정착할 수 있도록 지은 임대주택”이라며 “혼자 사는 노인 가구가 많은 마을 상황을 고려해 절반이 넘는 50가구를 원룸형(전용면적 18㎡)으로 배치했다”고 말했다. 그는 “임대료는 주민들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감안해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집 따뜻하고 온수 잘나와 살맛 나”



희망키움터 4층에서 본 괭이 부리마을의 전경. 올해 지붕 개선 사업으로 안전해진 빨간 지붕이 인상적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달 초 보금자리주택에 입주한 최한순(73)씨는 “나이가 드니까 귀도 잘 안 들리고 다리도 불편해 밖으로 움직이기가 힘들었는데 새집에 오니까 따뜻한 물도 잘 나오고 화장실도 집 안에 있어 살 것만 같다”며 행복해했다. 그는 “충청도에서 20대 초반에 올라와 그동안 별별 일을 다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며 “이제라도 마을 환경이 점점 좋아지는 것이 눈에 보이니까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월 2만~16만원의 임대료를 힘들어하는 주민도 있다. 가장 작고 싼 집(전용 18㎡)은 임대보증금 135만원에 월 임대료는 2만6000원(기초생활수급자 기준), 가장 크고 비싼 집(전용 38㎡)은 보증금 1100만원에 월 임대료는 16만원이었다. 입주자 김인호(68)씨는 “예전 집은 낡고 허름하긴 해도 내 집이라 임대료를 낼 일은 없었다. 새집은 깔끔해 좋긴 한데 임대료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괭이부리마을의 이런저런 사정이 알려지면서 온정의 손길도 잇따른다. 인천 원동초등학교 학생들은 지난 12일 마을 주민들을 위해 써 달라며 280만원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달했다. 전교생 910명이 고사리손으로 한 푼 두 푼 모은 돈이다. 인천에서 중소건설업체를 운영하는 은영일씨도 300만원의 성금으로 독거 노인 두 명의 입주 보증금을 대신 내줬다. 인천도시공사 신우회에서도 노인 한 명의 입주 보증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은씨는 “올겨울은 많이 춥다고 하는데 연세 드신 분들이 좀 더 편안하게 쉴 수 있으면 하는 마음에 작은 정성을 보탰다”고 말했다.



 괭이부리마을이란 지명이 우리 사회에 비교적 널리 알려진 시기는 2001년 이후다. 김중미 작가가 펴낸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다. 김 작가는 마을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괭이부리말(마을)은 인천에서도 가장 오래된 빈민지역이다. 지금 괭이부리말이 있는 자리는 원래 땅보다 갯벌이 더 많은 바닷가였다. 그 바닷가에 ‘고양이섬’이라는 작은 섬이 있었다. 호랑이까지 살 만큼 우거진 곳이었다던 고양이섬은 바다가 메워지면서 흔적도 없어졌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그곳은 소나무 숲 대신 공장 굴뚝과 판잣집들만 빼곡히 들어찬 공장지대가 되었다. 그리고 고양이섬 때문에 생긴 ‘괭이부리말’이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새로 지은 보금 자리주택에 입주한 김영철(67)씨가 아내 방인숙(64)씨의 볼에 입맞추고 있다. 김씨는 “아내와 여생을 보내기엔 최적의 보금자리”라고 말했다.
 괭이부리마을이 있는 만석동은 조선시대엔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쌓아 두는 창고가 있던 곳이다. 20세기 접어들어 이나다 가쓰히코(稻田勝彦)라는 일본 상인이 고양이섬 주변 갯벌을 메워 육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인천항과 인천역이 가까워 교통이 편리한 만석동이 대규모 공장지대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소설가 강경애의 『인간문제』란 작품에는 ‘천석정’에 있는 ‘대동방적’이란 회사에 취직한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천석정은 만석동, 대동방적은 당시 동양방적(현 동일방직)을 가리킨다.



 괭이부리마을은 20세기 한국 근·현대사의 한 장면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듯하다. 이 마을에 본격적으로 판자촌이 형성된 것은 6·25 때다. 황해도 해안가에서 피란민이 한꺼번에 이리로 내려오면서였다. 전형적인 사례가 김영철씨 가족이다.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난 김씨는 1950년 6·25가 터지자 온 가족이 나룻배를 타고 인천으로 피란을 왔다. 부둣가에 내린 뒤 아버지의 목말을 타고 괭이부리마을로 흘러들었다. 김씨 가족은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지만 전쟁이 끝나도 고향으로 가는 길은 열리지 않았다. 초기엔 아버지와 고모부가 굴비사업에 성공한 덕분에 그런대로 살 만했다고 한다. 김씨는 “마을 근처에 있는 화수부두가 예전엔 굴비사업으로 번창했던 곳”이라며 “당시 연평도 근처에서 잡아온 조기는 알도 굵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했다.



 그러나 김씨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3학년 때 시련이 닥쳤다. 거센 풍랑에 고깃배가 뒤집히고 배에서 일하던 어민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어민들의 사망 보상금까지 물어 주고 나니 김씨 가족은 살 길이 막막해졌다. 이때부터 김씨의 아버지는 아홉 식구를 굶기지 않기 위해 새벽부터 화물선이 들어오는 부두로 일거리를 찾아 돌아다녔다.



 7남매의 둘째였던 김씨도 닥치는 대로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추운 겨울에도 무거운 물지게를 등에 지고 좁고 미끄러운 언덕길을 오르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부둣가 석탄창고 근처를 돌아다니며 땅에 떨어진 석탄을 주워 모아 식당에 갖다 주고 먹거리를 얻어 오는 날도 많았다. 겨울에는 얇은 판자 벽으로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와 감기를 달고 살아야 했다. 김씨는 “아버지가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비 오듯 땀을 흘리시는 것을 보면 어린 나이에도 ‘얼마나 힘드실까. 저렇게 해야만 먹고살 수 있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김씨의 일생은 괭이부리마을 주민들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의 우여곡절은 69년 김씨가 운전병으로 군대 생활을 하던 때로 이어졌다. 당시 대대장이 귀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나중에 장가 밑천이라도 마련하려면 월남(베트남)에 다녀오지 않겠나.” 김씨는 가난한 집안을 일으킬 기회는 이때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겁도 났다. 대대장은 “죽고 사는 것은 결국 운명에 달린 것”이라고 설득했다. 결국 그는 월남전에 가겠다고 손을 들었다. 그의 부대에선 모두 다섯 명이 자원해 월남으로 가는 배를 탔다. 그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김씨뿐이었다고 한다.



 제대하고 괭이부리마을로 다시 돌아온 김씨는 마을 근처 공장에서 생산직 근로자로 일하며 30년 동안 ‘기름밥’을 먹다가 정년퇴직했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 독학으로 중·고교 과정을 마치고 야간대학도 졸업했다. 현재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10년째 근무 중이다.



 6·25 피란민이 괭이부리마을의 1세대 주민이라면 60~70년대 산업화에 따른 이농민은 2세대 주민을 형성했다. 가난한 농촌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면서 마을의 인구가 급격히 늘었다. 슬레이트 조각으로 지붕을 얹고 판자를 엮어 벽을 만든 집집마다 16.5㎡(약 5평) 남짓한 좁은 방에 온 가족이 모여 살았다. 집 안에는 수도가 없어 우물이나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고, 아침마다 재래식 공동화장실에는 길게 줄이 이어졌다. 나무 판잣집이 대부분이어서 한 집에 불이라도 나면 순식간에 옆집으로 옮겨붙었다. 하지만 소방차가 들어올 수 있는 도로가 없어 대형 화재로 번지기 일쑤였다.



없는 살림 ‘공동 반찬’ 해먹으며 정 나눠



정영관(65)씨가 연탄난로를 고치고 있다. 정씨는 “예전에 비해 지금은 정말 살 만해졌다”고 말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쓰이던 90년대 후반까지는 좁은 골목길에서 뛰노는 아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제는 골목길에서 아이들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태어난 지 3~4개월 만에 어머니 등에 업혀 괭이부리마을로 왔다는 장은제(48)씨는 “젊은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마을을 떠났다. 어릴 때부터 워낙 고생을 많이 해 이 마을을 떠나는 게 꿈이었던 사람들”이라며 “어느새 나 같은 사람이 그나마 젊은 축에 속하고 60~70대가 마을 주민의 다수를 차지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어머니를 모시고 큰 불편 없이 살고 있어 마을을 떠날 생각은 없다”며 “이렇게 저렇게 도와주는 분들이 있어 마을의 모습도 점차 좋아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인천쪽방상담소에 따르면 한때 수천 명을 헤아리던 괭이부리마을 주민은 현재 113가구, 182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 중 65세 이상은 절반 가까운 87명에 달했다. 60대 초반까지 포함하면 100명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쪽방상담소가 파악한 아동·청소년 인구는 10명뿐이다. 장씨는 “다른 곳으로 가면 어울릴 또래가 없다며 일부러 마을을 떠나지 않는 어르신들도 많다”며 “대부분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큰 걱정 없이 정답게 잘 살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행복은 가진 것에 비례하지 않는다”며 “다른 동네에선 옆집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한참 있다가 발견되는 일도 있다지만 이 마을에선 상상도 못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26일 오전 마을 가운데 위치한 희망키움터 3층. 할머니 10여 명이 공동 작업장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볼펜을 조립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작업장에선 정다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맨손체조를 했다. 김향자(75)씨가 대표로 혼자 일어나 구령을 붙였다. “자, 이제는 옆구리, 하나 둘, 셋 넷….” “반대로 하나 둘, 셋 넷….” 70대 노인이 대부분이라 아무래도 몸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떤 할머니들은 “끙끙” 하며 신음소리도 냈다. “이렇게 운동하다 초상 치르는 거 아녀?” 누군가 농담으로 던진 한마디에 폭소가 터졌다. 그러자 김씨는 “우리가 죽으려고 운동하남. 다 오래 살려고 하는 거지”라고 맞받았다.



 박종숙 쪽방상담소장은 “공동 작업장은 추운 겨울에 따뜻한 난방이 되는 곳에서 이웃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점심도 같이 먹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 주목적”이라며 “이분들이 집에 혼자 계시면 전기요금과 난방비를 아끼려 어둡고 춥게 지내시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소장은 “인천시의 노인일자리 지원금을 합쳐 한 분이 한 달에 20만원 정도 벌어 간다. 이분들에겐 상당히 벌이가 괜찮은 일자리에 속한다”며 “외부에서 무료로 나눠 주는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일해 돈을 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던 지난 24일 오후, 마을에 있는 행복주거문화센터에선 시끌벅적한 대화소리와 닭고기·멸치를 볶는 고소한 냄새가 골목길까지 흘러나왔다. 동네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동 반찬을 만드는 자리였다. 메뉴는 통마늘닭살볶음과 마늘효소멸치볶음 두 가지였다. 장은제씨도 팔을 걷어붙이고 할머니들이 요리하는 것을 거들었다. 장씨는 “옆집에 사는 어머니한테 갖다 드리려고 한다. 다른 분들도 이 자리에 오지 않은 이웃들과 나눠 먹을 것”이라며 “예전부터 이 동네는 뭐라도 하나 생기면 이웃과 나눠 먹는 동네였다”고 말했다.



 이날 반찬 만들기 모임을 주선한 이상선 목사는 “혼자 사는 노인들은 집에서 반찬을 잘 안 해 먹는다. 그래서 냉장고에 저장해 두고 먹기에 좋고 건강에도 좋을 것 같은 메뉴를 골랐다”고 소개했다. 지난 6월부터 마을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그는 “주민들이 가급적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면서 건강한 마을 공동체를 이어 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오후 마을 골목길에선 재능기부 활동을 하고 있는 이윤정·강정연 건축사를 만났다. 그들이 들고 다니는 마을 지도엔 현재 사람이 살고 있는 집과 비어 있는 집, 화장실이 있는 집과 없는 집 등이 표시돼 있었다. 낡고 오래된 주택에 대한 실태조사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인천시가 2018년까지 추진 중인 ‘괭이부리마을 주거환경개선사업’에 기초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이 건축사는 “10명 정도의 여성 건축사가 시간이 날 때마다 번갈아 마을에 들러 조사하고 있다”며 “건축도면조차 없는 집이 대부분이라 일일이 도면을 그리면서 주거환경을 파악하고, 앞으로 어떻게 집을 개량할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고 소개했다. 강 건축사는 “일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 우리끼리는 ‘재능기부’가 아니라 ‘재능착취’가 아니냐고 농담을 한다”며 “실태조사가 마무리되면 구체적인 마을 리모델링 계획을 세우는 데도 도움이 되겠지만 향후 역사적인 자료로서 가치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시와 동구청은 괭이부리마을(전체 부지 2만246㎡, 약 6135평)을 둘로 나눠 주거환경개선사업을 벌이고 있다. 한쪽(3078㎡, 약 933평)에선 이미 판자촌을 전면 철거하고 보금자리 임대주택을 지었다. 나머지 부지(1만7168㎡, 약 5202평)에선 주민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기존 주택을 고쳐 쓰도록 할 계획이다. 몇몇 주택에선 비가 새는 슬레이트 지붕 위로 붉은색 방수 지붕을 덧씌우고, 삐거덕거리는 낡은 나무 창틀도 하얀색 새시로 깔끔하게 교체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을 철거한 터에는 공원 같은 녹지공간을 조성하고 주민들의 자활능력을 키우기 위한 작업장·창고 등 공동시설도 확충할 예정이다.



 하명국 정책관은 “관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해 주민에게 따라오라고 하기보다는 주민과 지역 전문가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면서 지역의 역사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사업을 진행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주정완·이상화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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