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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의 성탄편지 "생각 바꾸면 눈부신 아침"

“스크루지도 자신의 생각을 바꿈으로써 어제와 똑같은 성탄절의 아침을 눈부신 기쁨으로 맞이하게 됐습니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24일 고 최인호(1945~2013·사진) 작가의 편지가 거짓말처럼 도착했다. ‘사랑하는 벗이여’로 시작하는 유고집 『눈물』(여백)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을 소개했다. 수전노(守錢奴) 스크루지가 크리스마스 전날 밤, 꿈속에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미래의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상처와 죄를 씻어낸다는 이야기다.

 고인은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루카 6.43)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스크루지가 생각을 바꿨던 것처럼) 사과의 좋은 열매를 맺고 싶다면 우리가 먼저 좋은 사과나무가 되어야 한다”고 썼다.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과 함께하라는 성탄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글귀다. 유고집 『눈물』은 고인이 올 9월 25일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직접 교정을 보며 다듬던 것이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았으므로 유고집엔 ‘작가의 말’도 ‘목차’도 없다. 그저 ‘사랑하는 벗이여.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억지로, 강제로 내 생명을 연장시키려 노력하지 말 것을 부탁합니다’라는 토막글만 남겼을 뿐이다.

고 최인호 작가의 유고집에 실린 눈물의 흔적. 고인은 암 투병 중에 매일 나무 책상에 앉아 “글 좀 쓰게 해 달라”며 기도했다. 그때 흘린 눈물이 아기 발자국처럼 남았다. [사진 여백]

 유고집 대부분은 가톨릭 서울주보에 연재했던 칼럼 ‘말씀의 이삭’으로 채웠다. 작가·화가 등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성경 구절과 연결해 고인만의 통찰을 담아냈다. 그는 1987년 어머니의 죽음 이후 가톨릭에 귀의했다. 5년간 침샘암 투병을 하면서 신앙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생전에 좋아했던 『그리스인 조르바』『햄릿』『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 고전 속 예수의 목소리를 전하면서 사랑과 겸허의 메시지를 풀어냈다.

 고인의 아내가 책 더미 속에서 발견한 미공개 원고 200장도 수록했다. 병마와 싸우며 느낀 고독과 공포, 글쓰기를 중단해야만 하는 근심과 번민이 절절히 녹아 있다. 하지만 그에게 좌절이란 단어는 없었다. “깊은 고독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도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부활의 길이야말로 절대 고독 이상의 초 절대고독,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의 어둠 속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생명의 빛’이 아니겠습니까”라며 스스로를 격려하기도 했다.

 오랜 벗이자 암 투병 중인 이해인 수녀에게 보내는 편지에선 여유로움마저 느껴진다. 항암치료를 받은 수녀에게 “몸이 마르셨느냐”고 물으며 “나는 8㎏이 줄었습니다. 완전히 물레를 돌리는 간디의 모습이 되었습니다”라고 농담을 던진다. 죽기 보름 전 지인인 배우 안성기씨에게 구술로 남긴 시에도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살아 있다.

 ‘먼지가 일어난다. 살아난다. 당신은 나의 먼지//먼지가 일어난다. 살아야 하겠다//나는 생명, 출렁인다.’

 쇠락해가는 육체로 생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유고집의 제목 ‘눈물’ 속에 답이 있다. 작가는 성모님과 십자가상이 있는 탁상 앞에 앉아 “이렇게 글을 쓰면서, 이렇게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이라며 매일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그때 쏟은 눈물이 나무 책상에 포도송이 모양으로, 아기 발자국처럼 남았다.

 그는 “부끄러운 마음에 알코올 솜을 가져다 눈물 자국을 닦았습니다. (…) 그러나 뜻밖에도 알코올이 증발해 버리자 이내 눈물 자국이 다시 그대로 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눈물은 한 인간이 죽음과 벌인 치열한 사투의 흔적인 것이다. 고인은 스페인 화가 엘 그레코의 그림 ‘베드로의 눈물’로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한다.

 “인간은 영혼의 아픔 없이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 인간이 위대한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처 때문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도 슬퍼하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자비심 때문입니다.”

김효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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