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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화무십일생, 북한 실세들의 허망한 운명

채병건
정치국제부문 차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최승철 통일전선부 부부장, 박남기 국가계획위원장과 장성택 행정부장. 이들은 모두 남한이 접해본 북한의 최고위층 엘리트들이다. 실세답게 남한에선 실력자의 자신감이나 테크노크라트의 전문성을 숨기지 못했다.

 2000년 9월 남북 국방장관 회담을 위해 제주에 내려온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을 수행했던 남한 해군 장교에 따르면 김일철은 제주의 명물인 도깨비 도로를 관광할 때 차에서 내려 한참을 유심히 관찰할 정도로 여유로웠다. 2년 후인 2002년 4월 대통령 특사로 평양을 찾은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만찬장에서 “김일철 부장이 제주도에 다녀와서 그렇게 아름답고 좋은 곳이라고 (방문을) 자랑하더라”고 말했다. 2007년 11월 남북 총리회담으로 서울에 온 최승철 부부장은 청와대에서 열린 환송 오찬장에서 갑자기 와인 잔을 들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다가가 건배를 제의해 남측 인사들을 긴장시켰다고 한다. 오찬에 참석했던 한 인사의 후일담이다. 그해 방북했던 남한의 유력 정치인을 만난 최승철은 대화 시작부터 “청와대를 들러서 오셨습니까”라며 직설적으로 노 전 대통령의 메시지 여부를 물었다. 당시 방북 일행의 한 인사는 “최승철은 정말 자신만만했다”고 말했다.

 2002년 10월 말 경제시찰단으로 서울을 찾은 박남기 국가계획위원장은 방한 기간 내내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엘리트 기술관료의 속내는 숨기지 못했다. 경부고속철을 접하곤 레일이 견디는 하중이 어느 정도인지 등의 전문적 수치를 묻고, 삼성전자 수원공장에선 “기술개발이 중요하다”고 한마디 했다. 시찰단의 명실상부한 실세였던 장성택이 묵었던 경주의 호텔에선 그가 복도로 나서자 북한 실무진이 도열하듯 벽 쪽으로 붙어 공간을 터주는 모습이 남측 인사들에게 포착됐다.

 그럼에도 이들은 모두 북한에서 숙청됐다. 최승철은 이명박정부 들어 북한의 공식 직책에서 사라졌다. 김대중정부 시절 조성태 국방부 장관을 맞상대했던 김일철은 3년 후 희한하게도 국방위 부위원장에서 국방위 위원으로 한 단계 내려가더니 2009년엔 또 인민무력부장에서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으로 강등됐다. 다음 해엔 북한이 이례적으로 “연령상 관계로 모든 직무에서 해임한다”고 발표했다. 11년 전 ‘시찰단장님’으로 남한 전역을 둘러봤던 박남기는 2010년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지고 공개 처형됐다. 북한의 2인자라던 장성택도 ‘양봉음위’ ‘건성건성’의 역적죄로 죽었다.

 북한의 실세들은 남한에서 자신감과 실력을 드러냈지만 그때뿐이었다. 북한으로 돌아갔던 이들의 말로는 그쪽에선 누구건 갑자기 권력집단의 일원에서 나락으로 추락하거나 아예 죽는 게 일상임을 또 각인시켰다. 권력의 쇠락을 꽃에 빗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하는데 북한에선 목숨을 내놓는 화무십일생(花無十日生)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다시 한번 확인된 남북의 차이다.

채병건 정치국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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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