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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천상에서 지상으로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시키면 절대 마다하지 않고,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다 부르는 것이 음치의 조건이라고 하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노래를 못하는 사람에게 노래를 강요하는 게 얼마나 가혹한 짓인지. 박근혜 대통령의 지금 심정이 그렇지 않을까. 결국 TV로 생중계되는 신년 기자회견을 하기로 했다니 하는 말이다.

 당선된 지 1년이 넘었지만 박 대통령은 국내 언론을 상대로 단 한 번도 기자회견이란 걸 하지 않았다.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자들의 질문에 즉답하는 형식의 대(對)국민 소통 말이다. 짐(朕)이 곧 국가인 절대왕정 시대도 아니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불통(不通)의 상징’이었던 이명박(MB) 대통령도 당선 직후부터 1년간 15번의 기자회견 또는 ‘국민과의 대화’를 했다. 같은 기간 노무현 대통령은 18번을 했다.

 박 대통령의 기자회견 기피증에 대해 한겨레신문(12월 21일자)은 박 대통령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질의응답을 싫어할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후보 TV 토론 때 지하경제 ‘양성화’를 ‘활성화’로 잘못 말해 입방아에 올랐다. ‘전화위복’을 ‘전화위기’로, ‘인혁당’을 ‘민혁당’으로, ‘이산화탄소’를 ‘이산화가스’로 말한 적도 있다. 취지와 무관하게 지엽적인 문제에 꼬투리가 잡혀 곤욕을 치렀던 나쁜 기억 때문에 기자회견이란 소통 방식 자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자회견 얘기가 나올 때마다 청와대는 박 대통령이 언론과의 대화 자체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취임 이후 언론사 편집·보도국장단, 정치부장단, 논설실장단을 청와대로 초대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던 사실을 상기시킨다. 사전에 조율되지 않은 질문에 일일이 대답을 했고, 그 모든 내용이 가감 없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물론 TV로 생중계되진 않았다.

 지난해 TV 토론에서 확인했듯이 박 대통령은 순발력 있게 말을 잘하는 타입이 아니다. 꼼꼼하게 미리 준비하고, 또박또박 말하는 스타일이다.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나 국무회의 때 깨알같이 준비한 모두(冒頭) 발언을 대국민 메시지 전달 수단으로 자주 활용하는 이유일 것이다. 예기치 못한 돌발 질문에 대응해야 하는 불확실한 상황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것이 박 대통령의 솔직한 마음 아닐까 싶다.

 일부 비방꾼들의 말대로 능력의 한계 때문일지 모르지만 그보다는 스스로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타고난 성격 탓이 커 보인다. 하지만 국민은 완벽한 대통령을 원하는 게 아니다. 말실수를 하고, 어딘가 허점이 보이더라도 말과 행동에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그런 대통령을 원한다. 순발력 있고, 조리 있게 말을 잘하는 것이 대통령의 조건이라면 박 대통령은 애당초 자격 미달이다. ‘결식아동’을 ‘걸식아동’으로, ‘관광산업’을 ‘강간산업’으로 바꿔 말해 국민에게 웃음을 선사했던 김영삼(YS) 대통령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비록 어눌하고 말실수가 있어도 진정성을 담은 메시지를 필요한 타이밍에 국민에게 전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지도자가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국민과의 거리는 멀어진다. 박 대통령은 공주도, 여왕도 아니다. 국민이 뽑아준 대표일 뿐이다. 박 대통령은 완벽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 천상(天上)에서 지상(地上)으로 내려와야 한다. 푸근한 엄마와 아줌마의 모습으로 국민에게 다가서야 한다. 박 대통령 스스로 가깝다고 여기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3선에 성공한 비결이 바로 ‘무티(Mutti·엄마) 리더십’ 아닌가.

 박 대통령의 지지율에 빨간불이 켜졌다. 지난주 발표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박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지지율은 48%를 기록했다. 지지율이 50% 아래로 떨어진 것은 청와대 인사 참사 논란이 있었던 지난 4월 이후 처음이다. 국정수행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처음으로 40%를 넘어섰다. 긍정적 평가를 부정적 평가가 빠르게 잠식해 가는 모양새다. 부정적 평가의 첫 번째 이유가 ‘소통 미흡’이란 점을 청와대는 명심해야 한다.

 지금 박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허허실실(虛虛實實)’의 리더십이다. 법과 원칙도 좋지만 감싸안을 땐 감싸안고, 귀 기울여야 할 때는 귀 기울여야 한다. 경청과 공감이야말로 지금 박 대통령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박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자의 모습만 고수하다가는 진짜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 있다. “국민을 이길 수 있는 대통령은 없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 박 대통령이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했던 말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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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