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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음악은 일곱 빛깔 무지개

나윤선 1969년생. 건국대 불문과를 나와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다 1995년 프랑스로 건너가 유럽 최초의 재즈스쿨 CIM, 프랑스 보베 국립음악원 등에서 수학했다. 2001년 프랑스에서 1집 ‘Reflect’를 선보이며 유럽 중심으로 활동하다, 2008년 6집부터 독일의 재즈 프리미엄 레이블 ACT에서 36개국에 음반을 발매하며 전 세계에서 러브콜을 받게 됐다. 2009년 프랑스 슈발리에 훈장을 받고 2010년 7집 ‘Same Girl’로 프랑스 골든디스크상, 독일 에코 재즈 어워즈 해외 부문 올해의 여가수상 등을 수상했다. 올해 3월 8집 ‘lento’를 내고 모든 아티스트에게 꿈의 무대라는 파리의 유서 깊은 샤틀레 극장에서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7월에는 권위 있는 스위스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보컬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요즘 유럽에서 제일 핫한 재즈가수는 누굴까. 본고장 미국인이 아니라면 모던 재즈의 메카 프랑스인일까? 프랑스 유력지 레제코(Les Echos)에 따르면 “오늘날 가장 위대한 재즈 싱어는 한국인, 그 이름은 나윤선”이다. 지난 3월 8집 ‘lento’가 발매되자 프랑스 최대 재즈 매거진 ‘Jazzma’는 최고의 음반에 붙이는 찬사 ‘CHOC(shock)’를 수여하며 “수퍼스타 나윤선이 곧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고 극찬했다. 재즈 전문채널 TSF JAZZ는 앨범 발매 전날인 3월 11일을 ‘나윤선 데이’로 정해 하루 종일 그녀의 특집방송을 내보냈을 정도다.

국립극장 최초로 단독 재즈콘서트 여는 나윤선

비교적 재즈에 무심한 한국에서는 ‘해외에서 더 유명한 아티스트’ 정도로 통하지만, 민요 ‘아리랑’까지 부르며 세계인의 가슴을 적셔온 나윤선은 싸이나 소녀시대 같은 K팝 스타보다 몇 발짝 앞선 ‘원조 한류 스타’다. 1년 중 8개월 이상 수십 개국을 돌며 100차례 이상 공연하는 살인적인 스케줄 때문에 좀처럼 한국에서 만나기 힘든 그녀가 연말을 맞아 특별한 자리를 마련했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펼쳐지는 ‘윈터재즈’(12월 21~25일). 1950년 국립극장 개관 이래 최초의 단독 재즈 공연이다. 성탄 시즌에 어울리는 캐럴은 물론, 국악 연주자들과의 협연 프로젝트도 최초로 시도한다는 그녀를 만났다. ‘소울이 생명’이라는 재즈의 세계를 제패한, 누구보다 다소곳해 보이는 이 한국 여인이 가진 무기가 궁금했다.

지난 3월 25일 파리 샤틀레극장 공연 중에서 ⓒ 정상환
마이크 두 개 앞에 홀로 서 성대를 악기 삼아 오케스트라 저리 가라 싶은 반주를 넣으며 노래한다. 속삭이는 천사의 발라드와 날카로운 악마의 헤비메탈을 왔다 갔다 한다. 눈을 감고 들으면 한 사람의 소리라고 믿을 수 없다. 빌리 할리데이나 사라 본 같은 걸쭉한 흑인 소울만이 재즈인 줄 알았다면, 청아한 메조소프라노 음색으로 섬세하고도 강렬한 무대를 이끄는 나윤선을 만나는 경험은 거의 ‘충격’이다. 클래식·팝·록·메탈·가요·민요·월드 뮤직의 영역까지 넘나들며 팔색조 매력을 뽐내는 그녀의 ‘작두 탄 듯’ 신들린 무대에 청중은 넋 놓고 빨려든다.

7집 앨범 제목 ‘Same Girl’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다양한 스타일의 곡들이 천의 목소리로 담겼지만 모두 한 여인이 불렀다는 뜻. 나흘간의 ‘윈터재즈’ 공연도 보여줄 게 너무 많아 이틀씩 다른 프로그램을 짰다. 나윤선 콰르텟의 레퍼토리로 구성된 21·22일과 달리 24·25일에는 거문고 명인 허윤정, 생황 연주자 이향희와 협연도 펼친다.

“국립극장은 전통을 기반으로 한 좋은 공연을 보여주는 곳이잖아요. 예술의 경계 허물기 시도를 하시는 중에 제가 처음으로 하게 된 거라, 국립의 전통과 어울리는 걸 찾았죠. 제가 좋아하는 국악 연주자들을 모셨는데, 늘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못했던 일을 하게 된 셈이에요.”

재즈와 국악은 의외로 꽤 잘 어울리는 조합이란다. 즉흥적이고 연주자 중심이라는 공통점 때문. 같은 곡을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지는 재즈처럼, 진도아리랑·밀양아리랑·정선아리랑도 서로 다르면서 다 같은 ‘아리랑’이라는 얘기다.

“어느 한쪽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다 튀도록 ‘즐겁게 한판 놀아볼’ 생각이에요. 허윤정 선생의 거문고는 그 힘이 정말 놀라워 언젠가 꼭 같이하고 싶었어요. 생황은 국악기 중 유일하게 화음을 내는 악기고, 아코디언과 음색이 비슷해 저희 아코디어니스트와 만나면 어떨까 궁금하고요. 저와 함께하는 외국 뮤지션들도 첫 협연이라 기대가 커요.”

즉흥적인 재즈 무대는 호흡이 생명이니 국악 연주자와의 만남이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부담보다 호기심이 크단다. “재즈 뮤지션들은 소리에 특히 민감해요. 상대방과의 교감이 끊임없이 이뤄지는 음악이니까. 귀를 쫑긋 열면 아주 옛날부터 알던 사람들처럼 반응할 것 같아요. 시작은 정하겠지만 중간부터 산으로 갈지 들로 갈지는 모르겠는데, 그래서 더 재밌는 무대가 될 것 같아요.”

지난 3월 25일 파리 샤틀레극장 공연 중에서 ⓒ 정상환
“재즈와 국악의 만남에 기대”
국악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그녀가 지금껏 협연을 미뤄온 건 단순히 서양음악을 국악기로 흉내 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처음엔 국악기를 제대로 공부한 뒤 함께해야 할 것 같았죠. 그런데 국악기가 난생 처음 본 악기라면 어떨까 생각해 봤어요. 이 악기의 소리를 처음 듣는다면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거문고는 굉장히 음역이 넓고, 현악기지만 힘이 좋고, 마치 퍼커션 같은 소리도 들리네, 그런 접근이죠. 이 악기가 이렇다면 이 음악과는 어떻게 어울릴지 서로 아이디어를 내 자유롭게 만들어 보려 해요. 어설프게 서로를 흉내 내는 게 아니라 각자의 소리를 내도록 한다면 오히려 잘 어울리지 않을까요.”

그녀의 대표 레퍼토리 ‘아리랑’도 국악 협연으로 들을 수 있다. 2007년부터 공연 때마다 빼놓지 않는 ‘아리랑 전도사’지만, 그에게 아리랑에 눈뜨게 해준 사람은 스웨덴 기타리스트 울프 바케니우스였다.

“외국인이 아리랑을 좋아한다니 신기했어요. 민속음악이 공통적으로 사람을 끄는 힘이 있나 봐요. 단순하고 반복적이고 따라 부르기 쉽고 한번 들으면 안 잊혀지는. 스웨덴에도 아리랑 같은 민속음악이 수두룩한데, 그 음악이 지금의 클래식이고 재즈고 팝이 된 것이라더군요. 이제 저뿐 아니라 외국 뮤지션들도 많이 연주해요. 우리 아코디어니스트도 자기 공연 때 강원도아리랑을 연주하고요. 한번은 벨기에 드러머가 해보고 싶다며 제게 메일로 이것저것 묻더군요.”

외국인들이 가사도 모르면서 운다는 게 정말이냐고 물으니 처음엔 자신도 믿기 어려웠단다. “아리랑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후에 KBS에서 제 공연 다큐를 찍으러 프랑스에 오셨는데, 관객들이 우는 걸 보고 카메라맨도 전염돼 우느라 제대로 못 찍으셨다죠. 드라마 ‘모래시계’ 주제가도 러시아 민요지만 우리가 많이 울었던 것처럼 민속음악엔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지난 7월 10일 프랑스 니스 재즈 페스티벌 공연 중에서 ⓒ 나승렬
아리랑 전도사 … 외국 뮤지션도 레퍼토리 삼아
사실 만남을 청해놓고 걱정이었다. 공연 때 신들린 듯 노래하다 잠깐 멘트를 넣을 때면 극도로 긴장된 모습을 보이는지라, 낯선 만남에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을 성싶지 않았다. ‘나는 노래로 얘기하는 아티스트’라며 도망가지 않을까….

그런데 확실히 반전 있는 여자였다. 시종일관 훈훈한 미소로 여유를 잃지 않았고, 비슷한 질문을 수없이 받았을 텐데도 마치 처음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상대에게 기분 좋은 에너지를 전염시켰다. “노래는 24시간 부를 수 있지만 제정신이 돌아와 많은 사람이 눈에 보이면 너무 떨리더라고요. 1대1로는 밤새도록 얘기할 수 있는데…남들이 ‘광녀’라고들 하죠.”

전 세계를 돌며 공연을 밥 먹듯 해온 그녀지만 이번 공연은 각별하단다. 초대 국립합창단장을 지낸 아버지 나영수씨 덕에 어릴 적 놀이터가 국립극장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단장을 맡으신 게 1974년도인데 40년 후 제가 여기 서게 되었다는 게 정말 기적 같아요. 아버지도 무척 흐뭇해하시죠. 나흘이나 되는 큰 공연이라 걱정도 하시고요.”

아버지는 물론 1세대 뮤지컬배우 어머니 김미정씨로부터 끼를 고루 물려받은 그녀지만 20대 중반이 되도록 음악에 뜻이 없었다. 유명한 부모님의 그림자가 너무 컸다. “아버지가 국립합창단을 만드셨을 때만 해도 합창곡은 외국 아리아가 대부분이었죠. 아름다운 우리 노래를 합창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 때문에 밤잠도 못 자고 애를 많이 쓰셨어요. 이제는 세계의 뱃노래 중에 우리 합창곡 ‘뱃노래’가 최고라죠. 음악을 한다는 건 저런 거구나 싶어 감히 꿈도 못 꿨어요.”

대학 시절 프랑스문화원 샹송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로 노래를 잘했지만 어디까지나 취미였다. 불문학을 전공하고 대기업에 취직까지 했다. 하지만 운명처럼 자꾸만 음악으로 ‘떠밀려’ 갔다. 1994년 친구에게 떠밀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 출연했지만 설경구·방은진 등 동료들의 ‘배우 포스’에 기죽어 한 달 만에 그만뒀다. 그러자 이번엔 엄마가 떠밀어 창작 뮤지컬 ‘번데기’에 출연해 엉겁결에 서울연극제 대상까지 탔다.

“떠밀려 하다 보니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 게 노래 아닐까 싶더군요. 일단 공부를 해야겠는데 친구가 재즈를 권하고, 저는 샹송을 배우고 싶어서 두 가지 다 가능한 프랑스로 갔죠.”

음악의 길도 녹록지 않았다. 샹송을 3년 공부하니 ‘프랑스 사람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자각이 왔고, 처음 들어본 재즈는 발음 따라 흉내 내기에 급급했다. 세월만 보내다 이도 저도 포기하려는 찰나, ‘재즈가 꼭 이것만은 아니야’라고 알려준 스승이 있었다. ‘누군가의 흉내를 낼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걸 깨닫자 동양인으로서 가진 ‘다름’을 무기로 한 맹렬한 질주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열등감이 있었죠. 나는 흑인도 유럽인도 아니고 스윙은 핏속에 들어있지도 않은데 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들이 가진 게 없기에 나만 가진 것도 있더군요. 누구처럼 해야 될 것 같은 게 제일 위험해요. 재즈는 악기건 노래건 내 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죠. 유럽인이었다면 고정관념이 있었을 텐데 워낙 다르니까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만일 영국 팝을 했다면 이렇게 되지 못했을걸요. 재즈는 서양 클래식, 민속 음악과 아프리카 흑인 음악이 합쳐져 태생 자체가 잡종인 열린 장르라 우리도 패밀리에 들어갈 수 있는 거죠.”

지난 7월 10일 프랑스 니스 재즈 페스티벌 공연 중에서 ⓒ 나승렬
파괴 가능한, 안 되는 게 없는 재즈
자신만의 색깔도 거저 얻어진 건 아니다. 음악학교 4군데를 동시에 다니고 개인레슨까지 받으며 다양한 테크닉을 섭렵했다. 프랑스 보베 국립음악원을 수석 졸업하고, 재즈스쿨 CIM에서는 졸업 후 최초의 동양인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니, 유학 가서 오로지 공부만 한 모양이다. 재즈는 잘 놀아 ‘소울’이 몸에 밴 사람들의 음악 아니던가. 그는 “내가 아는 모든 뮤지션은 엄청나게 공부한다”고 정색한다.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매일 연습하듯 재즈피아니스트도 마찬가지죠. 죽을 때까지 미국인이 타고난 스윙감은 못 갖지만 다행히 재즈는 한 가지 색깔이 아니에요. 다르게 발전하는 속성 때문에 아직 살아남은 거니까. 만일 제가 그들의 스윙을 흉내 냈다면 반기지 않았을 걸요.”

개성적인 스타일이 돋보이긴 하지만, 콧대 높은 유럽인들이 그녀를 ‘세계 최고’로 치켜세우는 이유는 뭘까. ‘지킬 앤드 하이드’ 같은 야누스적 매력 때문 아니냐고 묻자 “그럴 수도 있겠다”며 얼굴을 붉힌다.

“유럽은 재즈 역사가 오래돼서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데 열광해요. 하지만 재즈란 혼자가 아니라 같이하는 음악이니까. 뮤지션들과 주고받는 것도 큰 역할을 하고, 관객들로부터도 기를 받아요. 저는 매일 다른 데서 공연하니까 만나는 사람, 하는 말, 먹는 것이 늘 달라요. 그러니 매일매일 마치 처음인 것처럼 새로운 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재즈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니 스펙트럼은 넓지만 색깔을 정의하기는 어렵다는 얘기엔 “내 음악은 일곱 빛깔 무지개”라고 응수한다.

“물처럼 어디에 넣어도 그 모양이 되는 거죠. 재즈 자체가 안 되는 게 없어요. 클래식이라면 꼭 지켜야 할 게 있고, 팝도 기승전결이 확실히 있어야 하지만, 재즈는 파괴가 가능하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게 재즈의 매력인 것 같아요. 그렇다고 내가 새롭게 만든 건 없어요. 낯설게 들리는 것도 아프리카나 북유럽 원주민들이 다 하는 거죠. 단지 나윤선 목소리는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걸로 빚어내는 것뿐이에요.”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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