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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시장들 다 잡혀가 출신지 밝히기도 창피”

20일 전북 임실군 선관위 앞에 공명선거를 호소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임실군에서는 민선 시장 네 명이 모두 구속돼 중도 하차했다. 아래 작은 사진은 경남 거제시청 건물. 류정화 기자
#20일 오후 전북 임실군 시외버스터미널. 버스에서 내리자 길 건너편에 걸려 있는 커다란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유권자 여러분! 네 번의 불명예 또 되풀이하시겠습니까’라는 문구 옆에는 현금을 주고받는 사람의 손이 그려져 있다. 1995년 민선 기초단체장 선거가 도입된 이후 네 명의 군수가 모두 사법 처리돼 임기를 못 채우고 중도에 낙마한 임실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시장·군수들의 무덤’ … 비리로 멍든 지자체 르포

터미널 근처 전통시장에서 만난 신숙자(76)씨는 “그렇잖아도 교회에 갔더니 군수 예비후보자들이 악수하려고 기다리고 서 있는 기라. 되기만 하면 다들 잡혀가는데 뭐 하러 또 나오겠다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근처 수퍼마켓에서 만난 강근식(68)씨도 “이번 군수에 대해서는 일부 동정론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검은돈은 받지 말았어야 했다. 받아야 할 돈과 받지 말아야 할 돈도 구분 못하고 어떻게 군수를 하겠다는 거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19일 오후 경남 거제시 고현시장. 떡집을 운영하는 김모(50)씨는 “역대 시장이 다 잡혀갔으니 어디 가서 거제 출신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럽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거제시도 전직 시장 세 명이 업자들로부터 금품을 수뢰한 혐의로 줄줄이 구속됐다. 도시가 발전을 거듭하면서 인허가권을 둘러싸고 개발업체들과의 뒷거래가 성행하면서다. 터미널 부근 약국에서 만난 주부 김정화(43)씨는 “거제의 교통체증은 서울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온 시내가 공사 중인데, 이걸 보면 어느 시장이 와도 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걱정했다.

시장 관련 비리가 끊이지 않자 주민들 사이에서는 민선 시장제에 대한 회의론마저 고개를 들고 있다. 고현시장에서 인삼가게를 하는 김기진(62)씨는 “민주주의도 좋지만 이럴 바에야 차라리 예전처럼 행정전문가가 시장을 하는 게 낫다는 주민들도 적잖다”며 “서로 형·아우 하는 사이들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비리가 생기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내년 6월 4일 실시되는 제6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160여 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벌써부터 선거 관련 비리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전국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특히 시·군·구 기초단체장과 기초의회 선거를 둘러싼 우려가 적잖다. 선거범죄로 중도 하차하거나 비리로 구속되는 경우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검찰청 자료에 따르면 2002년 이후 치러진 세 차례 지방선거 당선자 1만2175명 중 372명이 선거 또는 직무 관련 범죄로 임기 중 옷을 벗어야 했다. 100명 중 3명꼴이다. 특히 전북 임실과 경남 거제는 ‘시장·군수들의 무덤’으로 불릴 정도다. 왜 이런 비리의 악순환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매번 반복되는 것일까.

‘매표의 유혹’에 낙마 → 재선거 악순환
시장·군수 비리라는 점은 같지만 구체적인 양상은 지역마다 다르다. 거제시는 1인당 연간 평균소득이 3000만원에 달할 정도로 넉넉한 지역이다.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 등 대형 조선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 끊임없이 개발이 이뤄지고, 그 과정에서 인허가권을 둘러싼 행정 비리가 싹트는 구조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중앙정치와의 끈을 내세우기도 한다. 2010년 구속된 김한겸 전 시장에게 1억원의 뇌물을 제공한 이수우 임천공업 대표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친구인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알려져 논란이 됐다. 거제시 시민단체 관계자는 “최근엔 내년 지방선거 예비후보들이 이 지역 3선 의원 출신인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줄을 대려고 서울에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전했다.

경남 창녕군도 상황은 비슷하다. 낙동강 하구에 위치해 연간 퍼내는 모래가 240억원 규모에 달하다 보니 골재 채취 허가권을 둘러싼 뇌물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골재 채취량은 매년 군청이 정하고 군수가 인허가권을 쥐고 있어 유착이 싹틀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셈이다. 결국 창녕군은 2006~2010년 민선 4기에만 군수가 두 명이나 비리로 물러나면서 4년 사이 군수 선거를 세 번이나 치러야 했다.

반면 전북 임실과 경북 청도는 개발이 덜 된 지역에다 인구도 적은 현실이 비리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임실은 인구가 3만 명이 채 되지 않아 1만 표만 얻으면 안정권으로 분류된다. 1인당 5만원씩 뿌려도 5억원이면 당선된다는 뜻이다. 이태현 임실애향본부장은 “조금만 더 쓰면 당선될 것 같은 생각에 후보자들이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오다 보니 비리가 끊이지 않는 것”이라며 “전문 브로커들인 ‘임실 5적’이 선거판을 흐리고 있다는 소문도 흉흉하게 돌고 있다”고 전했다.

임실은 또한 ‘박사골’이란 마을이 있을 정도로 교육열이 높은 지역이다. 하지만 소득 수준이 낮고 일자리가 적다 보니 자리 다툼이 그 어느 곳보다 치열하다. 임실군의회의 한 의원은 “인사청탁을 너무 많이 받아 주민들 만나기가 겁날 정도”라며 “서로 뻔히 아는 사이라 마냥 외면할 수도 없어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고 토로했다.

청도군도 마찬가지다. 유권자가 3만9000여 명에 불과해 후보들 사이에 ‘매표의 유혹’이 발동하기 쉬운 구조다. 그렇다 보니 2005년 재선거, 2006년 지방선거, 2007년 재선거 등 3년 내리 군수 선거를 치르는 기록을 남겼다. 2007년엔 당시 정한태 당선자가 6억7000만원을 뿌려 읍·면·동 조직책 50여 명이 구속되고 주민 1400여 명이 불구속 입건되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지방선거 비리가 터지기도 했다.

다른 지역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경기도 가평군은 1995년 이후 일곱 차례 군수 선거에서 여섯 번이나 무소속이 당선돼 ‘무소속 불패신화’가 자리 잡은 곳이다. 하지만 정당 지원 없이 홀로 뛰다 보니 선거자금 마련을 위해 검은돈의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되면서 비리-낙마-재선거의 도미노 현상이 빚어졌다. 가평군청의 한 간부는 “2007년 이후 두 명의 군수가 낙마한 상태에서 내년 선거에서도 비리 의혹이 재연되지 않을까 모두들 걱정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감시·견제 힘든 싹쓸이형 지방의회 구조
지방에서 시장·군수 선거 때마다 금품수수가 되풀이되는 근본 이유는 따로 있다. 전문가들은 ▶감시·견제 역할의 미비 ▶중앙에 종속된 구조 ▶현지 토호들의 부패 카르텔 등을 주된 원인으로 들고 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한 정당이 오래 집권하고 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이 같은 당 소속인 경우가 많아 체계적인 감시·감독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도 “지방의회가 싹쓸이형이다 보니 시장·군수가 의정감시의 사각지대에 놓이기 쉬운 구조”라고 분석했다.

이행규 거제시의원(무소속)은 “의정감시를 하려 해도 법적·제도적 수단이 미비한 게 현실”이라며 “시의회는 수사 권한도 없고 감사도 일주일 안에 끝내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정책감사를 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중앙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는 많지만 일부 중소도시를 제외하고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가 없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현지에서는 중앙당과 지역구 의원이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 공천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다 보니 출마자들이 지역 현안보다 당내 권력구조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노재하 거제경실련 사무국장은 “지역구 의원이 점지하는 후보가 100% 당선되는 현실에서는 아무리 신망이 두텁고 주민들 평가가 좋은 사람도 어쩔 도리가 없다”며 “시장은 10억원, 군의원은 5억원, 시의원은 1억~2억원의 공천헌금이 필요하다는 소문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고 말했다. 한병규 전주경실련 사무국장도 “정당이 공천한 후보가 비리로 낙마했어도 단 한 번도 사과하는 걸 보지 못했다. 권한만 행사하고 책임은 회피하는 중앙의 정당정치에 지역만 멍들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다 보니 일각에선 정당공천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거세다.

지역 토호들과 조합장·이장 사이에 형성된 부패 고리가 지방자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단체장이 잇따라 낙마한 곳의 공통점은 지역은 넓고 사람은 적다는 점”이라며 “이런 곳에서는 개발권 등을 놓고 토착세력 간에 강고한 카르텔이 형성되기 마련이며, 어느 단체장도 이 구조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선관위도 비상이 걸렸다. 임실군 선관위 관계자는 “동네 경로당과 노인대학을 찾아다니며 어떤 형태로든 금품을 받으면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검도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한 흑색선전이 급증할 것으로 보고 대응책 마련에 들어갔다. 이광재 사무총장은 “단체장이 비리로 낙마하면 지방행정이 올스톱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지역주민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유권자 모두 깊이 새겨야 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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