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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윤송|지원작전

수십만 병력과 막대한 군수물자가 부산·대구에서부터 압록강·두만강 가까이의 초산·준진까지 오르내린「대이동」의 한국전쟁온 윤송이 결경적 역할을 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6·25전쟁초의 우리 한국군은 군작전에 이같이 필수불가결한 윤송기능이 극히 미비한 상태였다.
그 단적인 예로는 우리육군에 윤송병과가 처음 창설된 것이 1·4후퇴후인 l951년 2월인것을 보아도 알수있으며 이때까지의 윤송업무는 병참의 당도·자동차대대가 수행했고 선박·항공수송은 해군의 일부 활동외에는 전적으로 미군에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이같은 윤송력의 빈약은 6·25초에 한국군이 많은 보급품과 장비를 부득이 유학한채 후퇴하지 않을수 없는 한 원인이기도 했다.
6·25당시 우리남한의 총윤송력을율 일지하면 철도=2천6백99km·기관차=6백69대·객차=1천1백82양· 화차=1만1천4백31양·도로=1만6천9백80km· 관용차보=4천1백42호·자가용=6천8백74대·영업용=5천3백32대·선박=2천8백95척(6만1천49t)이었다.
<51년부터 윤송체계 본궤도에>
군은 이러한 국내 윤송력을 즉각 전시체제로 동원하지 못하고 산발적인 징발에 의해 관민차량을 작전에 사용하는정도였고 당도를 미군에서 거의 모용함으로써 한국군의 윤송대책에는 애로가 많았다, 그러나 5l년 윤송병과가 창설되면서부터는 제301철도대대가 윤송감실로 예속돼 연대로 승격되고 자동차교육중대가신실되는등 군수송의 체계와 통용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급속히 양성된 운전병들과 미군지원으로 들여온 부산부두의 새「트럭」들에 의해 한국군수송력은 급격히 증강되었다.
51년에는 서울·부산·대구·안동·대전·순천의 6개지구윤송대를 통합관장하는 제303철도 수송관리대가 창설되고 속초·전남북지구의 철도수송도 제301철도운용대대가 대비 관할했으며 2개 자동차대대와 5개자동거중대가 증설돼 육로수송을 추진했다.
한편 해상수송에도 손을 써 제302항회대대가 창설됐으며 징발선박 1백여회과 미군과 해군에서 지원받은 LST3척을 가지고 병력과 물자수송에 임했다.
육군수송당국의 51년 철도수송 실적은 병력 46만7천명 보급물자 36만6천여t에 달하며 동원된 객대차가 3만2천3백76대에 연 운행거리는 2백10만여km였고 52년은 병력65만4천여명에 물자34만6천여t이었다.
한편 2개자동차대대와 12개자동차중대는 51년 한햇동안 총5만8천여대의 차륜을 동원, 백만5천여명의 병력과 15만3천여t의 각종물자를 윤송했고 52년에는 3개대대 15개중대가 72만7천여명의 병력과 45만1천여t의 물자를 실어날랐다.
선박수송도 51년에는 2백59척을 동원, 병력 18만8천여명과 11만1천여t의 물자를, 52년에는 1천9백71척이 38만1천여명의 병력과 11만3천여t의 물자를 각각 윤송했다. 군수송당국은 이같은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 공비들의 기습과 산악고지 험로에서의 전복사고등으로 상망수의 인명피해를 내기도 했다. 전쟁동안의 군용차량 사고중 전복이 60%를 차지했는데 이는 아군작전지역이 대부분 험산준령인데다가 충분한훈련을 받지못한 운전병들의 기술 미숙이 겹쳤기때문이었다.
<트럭타본 장정 모두 운전교육>
하옇든 전쟁초기의 윤송미비는 미군지원에의한 차량과 수송병력의 증강으로 곧 만회할수 있었고 아군기들의 폭격을 피해 야암을 이용, 인력과 우마차에 의존하던 공산군의 윤송능력을 완전히 압도했다.
다음은 군수송 활동에 대한 당시 윤송감들의 이야기.
▲이치업씨(당시육본수질감·대령=예비역육군준장·현한국도로공사감사·52)<51년2월말 제3사단 부사단장으로 동부전선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하고 있는데 육본으로부터 내려오라는 연락이왔어요.
육본에 수송감실이 창설된후 신성말국방장관이 직접 감을 물색하기위해 고급장교 인사기록「카드」를 들춰보다가 내가 철도국에 근무한 경력이 있어 적격자로 지목하고 부르더군요
51년2월초에 창설된 윤송감실은 부대를 계속 확장, 동년말에는 예하에 2개자·동거대연,-2개자동거중대를 갖게 됐는데1개대대는 약2백50대의 차량을 보유했읍옵니다.
한편으로 동해안의 병력수송을 위해 미군으로부더 LST를 지원받아 운행했고 수륙겸용 자동차부대까지 창설, 부산부두에 들어오는 미군지원 군수물자를 하역했어요.
또 전쟁말기에는 제77경비행기중대를 창설해서 고지전을 수행하는 전선 각사단에 공중보급도 해줬구요.
부대를 확장하면서의 제일 큰 애로는운전병양성이었읍니다.
일산「트럭」이 대량 들어왔을때는 10일동안에 운전병을 훈련시켜냈어요.
김해 낙동강변에 운전병양성소를 설치하고 내가 직접 모병장소를 찾아다니며 빵꾸를 메워봤거나「트럭」을 타봤다고 손을 드는 1백여명의 장정들을 모아다가 제1차로 운전교육을 시켰어요. 부산부두에 「트럭」은 가득차 있는데 운전병이 없어 한동안 아주 곤란했었어요.
이 일산차량등은 약해서 불과 몇 달만에 전방고지에서 모두 망가지고 후에는 미군GMC로 대치됐는데 51년후반부터는 병참물자,병기,공병자재등 일체의 군수물자는 윤송감실이 책임을 지고 철도와 자동차편으로 전방보급소까지 수송했읍니다.
군윤송을 지휘하다보니 어느때는 전방사정을 제일 잘 알게돼 신성복장관을 비롯한 육군수뇌들이 때로는 나를 불러 전황을 묻기도 했어요.
하옇든 보급물자를 수송하는 차량들이 24시간동안 쉬지않고 계속 줄을 이어 나가고 들어오니까 밤12시이후의 전선상황은수송감실이 잘 파악할 수 있던거예요.
51년말부터는 전국 50여개 주요역에 RTO(철도수송대)를 두고 제303철도수송관매대가 군의 철도운영 업무를 관장했읍니다.
<전선상황파악에도 제일 빨라>
TMO(철드수송대)의 전신인 이 군철도수송사무소는 전쟁중 병력과 물자수송업무 수행에 큰 역할을 했을뿐아니라 증명을 제시하는 휴가병들의 무임승차를 돌봐주기도 했어요.>
▲이당종씨(당시제4대륙본윤송감·준장=예비역육군회장·50) <나는 50년4월일본 「맥아더」사령부에 출장을 갔다가 전쟁이 발발해 미제24사단을 안내,대전에 도착해서 연락장교단에 근무를 하다가 마산에 투입되는 미해병제1여단의 한국군연락장교로 근무했읍니다.
미해병제1여단강 「큐레이그」장군은 상륙직전 해상참모회의 도중 나한테 한국군은 장비가 부족해 무너진다고 하지만 미군은 왜 훌륭한 장비를 가졌는데도 그렇게 패퇴하느냐고 묻데요. 미육군은 도로를 따라 작전을 전개하고 산악고지를 소홀히 하기때문에 산을 타고 덥비는 적의 기습에 당하고 만다고 대답했더니「크레이그」장군은 즉각 예하 지휘관들에게상륙하면 중대이상의 CP를 모두 산꼭대기에 두라고 명령합디다. 그리고는 모든 한국군 통역장교들에게 미해병대 중위계급장과「지프」를 주어 미군과 똑같이 대우하는데 우리 한국군을 좀 얕보던 미육군과는 전혀 태도가 다르더군요.
1·4후퇴후에는 제l7연대장을 하다가 정년6월말 이치당대령 후임으로 제4대수송감으로 부임했읍니다.
<군수물자수송 도로나빠 골치>
범선을 중심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될 이무렵의 군수송은 특히 한국군지역이 산악인데다가 도로가 전혀 정비돼있지않아 아주 애를 먹었어요.
철도수송도 미군후방사령부가 전권을 쥐고있어 우리한국군은 화차배정신청을 해가지고 할당을 받아 사용해야했기 때문에 불편이 많았어요.
나는 한국차용 화차에도 미군용과 같이「디젤」기관차를 사용하려고 교통부당국과 요로에 교섭을 벌였으나 끝내 실현을 못하고 53년부터야 일부 중기기관차가「디젤」로 대치됐어요. 당시 군과 교통부간의 협조는 아주 잘됐었어요.
항만대대는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미군지원 군수물자를 밤을 새워가며 하역들을 했읍니다.
윤송병과가 생기고부터는 병력과 물자의 일체 윤송은 윤송부대가 책임을 졌는데 절대 병력이 부족해 전방 10개전투사단뿐만아니라 지리산 공비토벌에 대한 지원까지 겹쳐 윤송감실은 눈코뜰 사이가 없었고 걸핏하면 밤을 새우는게 다반사였어요.
이렇게 철야근무를 해도 칭찬은 별로 없고 기합이나 안받으면 다행이었어요.나는 참모회의때마다 수송이 잘안됐다고 추궁당하지 않나해서 가슴을 죄었읍니다.
상관들은 창에 물자가 가득쌓여있는데도 왜 윤송을 안했느냐고 기합을 주는통에 경말 혼났어요.
시간에 쫓겨 산악험로를 마구 달리다가 전복·충돌등의 사고로 상당수의 운전병들이 희생됐읍니다.
또 지리산토벌작전 윤송지원에서는 도중 공비들의 기습도 많이 받았구요.>
◆주요일지(1952년12월5∼8일)
※5일▲11대의 적기, 서울야간공습기도하다가 도주▲「아이크」차기대통령, 이대통령과 30분요담▲ 「아이크」3일 방한완료
※6일▲이대통령, 「아이큰에 국군증강요청
※7일▲미공군기, 「미그」기7대격추▲거제도수용소서 도망기도포로 1명사살▲「인도차이나」의 「나산」지구서 최대격전
※8일▲공산측의 남일대표, 거제도의 포로피살에 항의▲평양방송, 「아이크」 방한비난▲ 「체코」서 대숙청진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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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