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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지원작전(9)|공병(3)

공병의 보병전투는 50년7월 하순부터 9월초 사이의 낙동강 방어전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특히 제1201 건 공단과 제8사단 공병대대는 구산동 전투와 영천작전을 통해 전사에 길이 남을 전공을 세웠고 이로 말미암아 6·25 전쟁중 한국군으로서는 최초의 미 동성 훈장을 받았다.
한편 이 무렵부터는 제1101, 제1102 야 공단과 제1201건 공단 등이 창설되는 등 부대가 대폭 확장되어 공병작전에 적합한 체제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50년9월 창설된 제301 교육 대는 폐교된 공병학교를 대신해서 많은 공병장교와 기간요원을 배출, 병력증강과 기술연마에 기여했다.
각 공병단은 미군지원을 통해 각종 시설자재를 충분히 확보하고 한국군 군단에 배속돼 교두보의 방어와 반격작전을 돕고 마산에서 울산에 이르는「데이비슨·라인」의 축성공사를 하는 등 본연의 공병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니까 낙동강 전선에서의 우리 공병은 보병전투와 공병작전을 겸하면서 편제와 병력을 정비, 증강해서 공병의 기간을 튼튼히 다진 셈이었다.
<폭파된 안동 철교 이틀에 완공>
한국군 공병은 개전 초의 혼란기와 낙동강 전선에서의 정비 기를 거쳐 1951년부터는 본격적인 활동기로 들어가「캔서스」선의 축성·국도 4대간선 확장·강릉비행장 공사·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신축·논산 제2훈련소 공사 등을 담당하였다.
한편 제1101·제1102 야공단은 보병 제1군단 및 제2군단에 배속돼 휴전 때까지 일선 작전을 지원해 줬다.
그러면 이같은 공병들의 활약상을 다시 지휘관들로부터 들어보겠다.
▲윤태일씨(당시 제1201건공 단장·대령=예비역 육군중장·전 서울시장·54)<우리 제1공병단은 50년7월 금 천에서 제1201 건설 공병단으로 개편됐습니다.
7월31일 우리 1201건 공단은 수도사단 기갑 연대가 밀려난 청송 구산 동에서 공병 단독으로 보병전투를 전개, 적의 진격을 저지하고 큰 전과를 올렸어요.
나는 구산동 전투 때 고향 친구이며 육사 동기생이었다가 6·25 전해에 월북한 공산군 최모 군관으로부터 아군 포로 편에 보낸 투항을 권유한 내용의 밀서(?)를 받았습니다.
나는 이 편지를 곧바로 장도영 정보국장한테로 보내 정보자료로 쓰도록 했습니다.
9월초 영천지구 전투에서는 김 묵 소령이 지휘하는 제8사단 공병대대가 적 포병 진지를 공격, 분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북한 공산군 제15사단을 섬멸시키고 9·16 총반격전의 발판을 만드는데 큰 공헌을 했지요.
이 무렵 육본지시에 의해 내가 경주에서 창설한 제1101 야공 단은 김덕진 중령이 단장이 돼 국군 제l군단의 군단공병으로 배속됐어요. 이 공병단은 한국군 최초의 야전공병단이었고 공병편제 정비의 전기가 된 겁니다.
북진 때는 2군단 군단공병으로 평북군 우리까지 올라갔었는데 일선 지원 대대는 희천·온정 리까지 나갔었습니다.
우리 건공 단은 1·4후퇴 직전 군 우리에서 김 묵 중령이 지휘하는 제1102 야공 단과 임무를 교대하고 서울로 내려와 정부간 국도 정비작업을 벌였어요.
1·4후퇴 뒤에는 단 본부를 포항에 두고 포항∼강릉∼양 양간의 동해안 군사도로를 닦고 확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의 도로가 된 것입니다.
도로공사를 마치고 51년 7월부터는 강릉에 주둔하면서 공군 제10 전투 비행단이 이동해 올 비행장 확장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작업은 정말 대공사였는데 나는 강릉비행장 구축 명령을 받고 우리 건 공단의 4개 대대와 전방의 3개 공병연대를 지원 받아 철야 작업을 강행, 미8군서 90일 예정했던 것을 42일만에 완성시켰옵니다. 하여든 우리 작업 속도에 모두들 경탄합디다.>
<「데이비슨」선 구축공사 벌여>
▲박병순씨(당시 제1공병단 제1대대 3중대장·대위=예비역 육군소장·현 호남광업 사장·51) <나는 6월27일 부평에서 중대 병력을 총동원해 한강교 폭파 등 폭약 4천5백「파운드」를 노량진으로 싣고 나와 공병학교에 인계해 줬옵니다. 우리 제3중대는 28일 최창식 공병 감의 구두 명령으로 제7사단에 배속돼 아직 끊지 못한 한강철교 하나를 폭파시키라는 임무를 받고 1천「파운드」의 폭약을 가지고 교초 부분을 때려 파괴시켰어요.
구산동 전투 때는 우리 1201건 공단 제1대대가 주력이었는데 내가 지휘한 제3중대는 정면 좌측을 맡았었습니다.
그후 우리 3중대와 제2중대는 한강 쪽에서 요 주로 넘어오는 무가리 고개 방어전을 전개하다가 서재훈 제2중대장이 적탄에 맞아 전사했옵니다.
나는 대대장이 돼 10월6일 38선을 넘어 주로 도로 정리를 하면서 철원-평강-평양-순천-군우리-덕천까지 들어갔었어요.
우리 대대는 제1102 야 공단에 편입돼 계속 임무를 수행하다가 1·4후퇴를 당해 서울-단양-영천을 거쳐 1월말 삼랑진으로 내려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1102공병단은 미8군 군수 사령부에 배속이 돼 단 본부를 양산에 두고 국민 방위군 1만 명을 지원 받아 마산에서 울산에 이르는 소위「데이비슨」선 구축공사를 벌였어요.
이 방위선은 부산 교두보의 최후 저항선으로 만든 것인데 8개 사단을 동시 배치할 수 있도록 철조망·호·지휘소 등을 구축하는 방대한 작업이었어요.>
▲이만복씨(당시 제1공병단 제9야공 대대 작전과장 중위=예비역 육군소장·현 도로공사 업무 이사·50) <우리 101대대는 1개 혼성 중대를 편성해 전적진 대대장의 지휘로 제201건 공 대대와 함께 구산동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나는 중대장 보좌관으로 참전, 7월29일 좌측 201건 공대대 제1중대의 지원 명령을 받고 저녁에 계곡을 건너가던 중 앞줄의 사병 한 명이 물을 먹다가 대열을 놓치는 바람에 뒤따르던 사병 7명과 함께 낙오가 돼 아군으로부터 적으로 오인 받고 총격을 당해서 아주 혼났어요.
밤8시쯤 되니까 음성으로 봐 17, 8세 밖에 안돼 보이는 적 소년 병들이 호각소리와 함께 함성을 지르며 돌격을 시작합디다. 고지 후사 면에 매복했던 아군들이 일제히 반격을 가하니까 적병들은『소대장 동무, 분대장 동무 나 죽어요』하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더군요.
육박전 중에는 피아 구분을 머리를 만져 봐 짧게 깎았으면 적으로 간주하고 찔러 죽였는데 우리 소대장 이도준 소위(고인)가 짧은 머리 때문에 아군에게 적으로 오인 당해 죽을 뻔했어요.
또 건공 대대 1중대장 김희훈 대위는 적 1중대장과 맞붙어 육박전을 전개하다가 밑으로 깔렸는데 마침 옆에 있던 당번 병이 이를 발견하고 적중대장을 사살해 버려 위기를 면했고요.
김희훈 대위와 박욱남 상사는 구산동 전투의 전공으로 개 전 이래 대한민국 육군으로서는 최초의 미동성후공 훈장을 받았습니다.
우리 야공 대대는 구산동 전투를 마치고 금호로 나와 주둔하던 중 차 형기 대위가 지휘한 중대가 경주북방의 한 국민학교에서 취침 중인 적과 새벽녘에 조우전을 벌여 대승을 거둔 일이 있어요. 이 기습 전은 적을 낙동강 전선에서 최초로 퇴각시킨 승전이었습니다.
<가교 만들어 사단 병력을 도하>
반격작전 때는 우리 야공 대대의 제1, 제2중대가 안동∼낙동리 사이의 낙동강에 모래가마와 전주로 임시가교를 놓아 1사단병력과 2군단 사령부를 도하시켰는데 후미부대가 막 건너자 다리가 떠내려가 버렸어요.
나는 10월20일께 평남 성 천에서 제202대대 작전과장 겸 부대대장으로 전속돼 서울 서대문 국민학교로 내려와 부대 창설에 주력을 했습니다. 우리 202대대는 1·4후퇴를 당해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거제도로 건너가 포로수용소 설치 작업을 했습니다.
52년 2월 나는 공병감실 서울 파견대장으로 올라와 문관 25명을 데리고 불탄 육본과 용병사령부 신축 설계를 했습니다.
설계작업을 하는 중인데 하루는 경무대에서 이대통령이 부른다는 연락이 와 계엄민사부장 김완용 대령과 함께 접견실로 들어갔더니 중앙청 건물을 좀 헐어 버려야겠는데 어떻겠느냐는 거예요.
나는『각하 일제가 나빴지 저런 건물이야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후일 박물관으로라도 쓰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당돌하게 반대했더니 옆에 섰던 비서가 지당하다고 안 하면 큰일난다고 귀띔을 해주데요.
이 박사는『왜놈들이 저 중앙청을 지어 경복궁을 막아 놔서 내 가슴이 답답해 그래. 나는 지금 일본을 쳐들어가 궁성자리에 우리 총독부를 짓고 싶은 심경일세』라면서 목소리가 격해집디다. 비서는 다시 내 옆구리를 찌르더군요.
이박사가『자네하고는 얘기가 안 된다』면서 엄홍섭 대령을 불러오라고 하길 래 나는 나와서 대구로 전화를 했습니다. 이튿날 나는 대구서 올라온 이종찬 참모총장·엄홍섭 공병 감과 함께 다시 경무대로 들어갔어요.
전날 밤에 나는 이종찬 총장한테 중앙청을 헐려면 폭파하는 수밖에 없고 GMC20만대 분을 실어 내야 된다고 했었는데 이날 이 총장이 이대통령한테 얘기하는데는 차량 1백만 대가 필요하다면서 곤란하다고 하데요.
그러자 이 박사는 그러면 그냥 놔두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돼서 까닥하면 헐리고 말 뻔했던 중앙청이 안 헐리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당시의 내 반대가 과연 옳았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공병학교 개교로 졸업생 내고>
▲서윤택씨(당시 공병학교장·중령=예비역 육군소장·현 원호처 차장·52) <2사단이 해체된 후 우리 공병 대대는 경북 고산 국민학교에서 제301교육 대대를 창설, 내가 대장이 돼 공병학교를 대신해서 공병교육에 임했습니다. 우리 301교육대대는 서울 수복 후에는 서빙고의 옛 기갑 연대 자리에 올라와 있다가 1·4후퇴를 당해 김해로 내려갔어요. 6·25전쟁 중에는 화학 병과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 공병이 화염방사기를 맡았었는데 50년 8월초부터 우리 교육대대가 그 사용법을 교육시켰옵니다.
51년2월에는 육군종합학교 공 병과와 우리 301교육대가 합쳐 공병훈련소로 됐다가 3월10일 공병학교로 개교했습니다. 51년 5월에는 4대 간선도로 확장 공사에 동원될 각 도-군의 토목기사들을 징집해 다가 우리 공병학교에서 10일간씩 교육을 시켜 내보냈어요. 졸업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병과학교 졸업식으론 처음 참석해 성대히 치렀습니다.
51년 말 황인권 중령이 공병학교 교장으로 오고 나는 제1101 야공 단장으로 나가 양양 교를 가설했어요.
이 다리는 사고하나 없이 6개월만에 완공했는데 한국군 공병으로서는 처음으로「아이빔」 군용 교를 놓은 거였지요.
52년 초부터는 각 공병단에 소위 지게 부대로 불리던 공병작업대가 1개 대대씩 배속됐는데 장비라고는 지게뿐이었어요.
이들 공병은 제설·측구 정리 등 주로 인력을 동원하는 작업들을 맡아 했는데 설음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우리 공병에는 제301, 302, 303, 305, 306대대 둥 5개 공작 작업대대가 있었습니다.>
<주요일지> (1952년 11월4일∼7일)
※4일 ▲지상전투는 돌연 소강 상태 ▲「고그」미 재향군인 회장, 한국전에서의 원폭 사용 지지 ▲영 여왕, 한국 휴전 성취 희망
※5일 ▲「밴플리트」사령관 금화전선 시찰 ▲이대통령,「아이크」당선에 축전 ▲미 국방성 소식통, 공화당 집권해도 한국 정책 불변 언명.
※6일 ▲경찰, 경남 도내에서 10월중 27명의 공비 사살 ▲이대통령,「아이크」에게 한국 방문을 공식 초청 ▲상공장관에 이재형씨 임명.
※7일 ▲「미그」회 곽서 공중전 계속 ▲중 석불 사건 관련자에 구속영장.
▲정정=본 연재 4백22회 본문기사 중 서윤택「대위」와 박기석「대위」는 각각「소령」으로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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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