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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되고 지루한 어른들 보며 난 그러지 않으리라 맘먹었죠

1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스코트 ‘코비(cobi)’
세계적인 디자인 거장, 스페인 국민 아티스트, 장르를 가리지 않은 전방위 예술 명장-.

스페인 국민 디자이너 하비에르 마리스칼

하비에르 마리스칼(63)의 이름 앞엔 늘 묵직한 수식어가 붙는다. 과장도 아닌 것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스코트인 ‘코비(cobi)’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고, 애니메이션 영화 ‘치코와 리타’를 공동 연출해 2012년 아카데미상 후보에까지 오른 사람이 바로 그다. 이뿐이랴. 2000년 하노버 엑스포 마스코트 ‘트윕시’ 제작, H&M·앱솔루트 보드카·헬로 키티 등과의 협업, 마지스와 모로스의 이름을 단 가구 디자인 등 그가 손 뻗는 예술의 범위는 그야말로 무한도전이라 할 만하다.

이런 이유로 그가 ‘현대카드 컬처 프로젝트’를 통해 국내 전시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잡았을 때 떠오른 그림은 이랬다. 거장의 작품 철학과 예술 철학에 대한 심오한 대화들이 흘러가리라-.

하지만 막상 오프닝을 앞두고 전시장에서 그와 마주 앉았을 때, 상상은 정반대의 현실로 나타났다. 어디로 튈지 모를 말과 행동 때문이었다. 그는 종종 질문에 벗어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거나 뭔가 생각이 떠오를 땐 불쑥불쑥 일어나 자리를 떴다.

결국 쉬는 시간을 갖고 태블릿PC를 손에 넣고서야 차분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를 지켜보며 감지한 건 그가 지금껏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예술을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린아이로서 예술을 해 온 것이 아닐까라는 거였다. 그러니 예술을 놀이로 한 것처럼 대화도 놀이처럼 가벼워져야 했다. 자유롭게, 단순하게, 상상력을 펼치면서.

3 전시 이틀 전 직접 그린 벽화. 불특정한 가상의 도시를 표현했다.
2 어린이용 장난감집 ‘빌라 훌리아’
5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전시장을 찾았을 때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는 이날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달려와 한쪽 벽면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을 지켜보던 누구는 그것이 서울이라 하고, 누구는 뉴욕이라 했다. 그 정체를 밝히려 첫 질문을 던졌는데 그의 답은 그저 ”상상에 맡긴다”였다. “보는 사람 느낌으로 해석하라. (서울 같다고 하자) 정확하다. 세계에 있는 어떤 도시다. 옛날 같으면 뉴욕·파리라고 상상하겠지만 이젠 상하이·태국·서울 어디든 될 수 있다.”

전시는 그래픽·영화·인테리어 디자인·가구 등 다양한 장르에 걸친 1200여 점의 작품을 필모그래피처럼 펼쳐 놓는다. 커튼처럼 수백 장의 드로잉이 걸린 방을 지나면 디지털 화면 속에 그려진 각종 스케치, 알록달록한 대형 알파벳 조형물, 강아지 모양 의자 ‘훌리앙’, 어린이용 장난감 집 ‘빌라 훌리아’ 등이 차례로 보인다. 이번 서울 전시를 위해 따로 제작한 캐릭터 ‘아트 플레이어’는 천장을 장식한다. 하나같이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듯 밝고 생동감 넘치고 기발하다. “우울하고 슬플 땐 화분에 물이나 주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작업 스타일이 왜 나오는지 이해가 될 만한 대목이다.

4 드로잉 수백 점이 커튼처럼 둘러 쳐진 ‘스케치스 룸’ 5 이번 전시를 기념해 만든 캐릭터 ‘아트 플레이어’ 6 조형미와 색채를 부각시킨 알파벳 조각들 7 장난감 어린이집의 미니어처들
8 형형색색 지구본이 돌아가는 ‘Happy World’
“디자이너 역할은 어릴 적 기억 상기시키는 것”
이번 전시의 캐릭터인 ‘아트 플레이어’는 마리스칼의 별칭이기도 하다. 예술이 놀이가 되고, 놀이가 예술이 된다는 것인데, 그게 과연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는 즉답 대신 테이블에 놓인 종이컵을 손에 잡았다.

“논다는 게 뭘까. 어릴 때부터 누구나 알고 있고 공유하는 거다. 아시아 애랑 유럽 애가 같이 노는 걸 봤다. 꼬마들은 종이컵을 비행기라고 하면서 금세 친해진다. 그냥 상상력으로 소통하는 거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비행기라는 상상력을 잃게 되면 풍요로움까지 잊게 된다. 디자이너의 역할은 바로 놀이의 상상력을 통해 그 어릴 때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말로는 부족했는지 벌떡 일어나더니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예를 들어줬다. 욕실 변기를 닦는 브러시였다. “사람들이 만지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갖고 싶은 것으로 만들면 어떨까에서 출발한 물건이었다.” 그는 뚜껑과 손잡이는 플라스틱 꽃과 줄기 모양으로 바꾸고 색깔은 환한 노란색으로 칠했다.

아무것도 없던 것에서 새로움을 창조하는 마스코트 역시 상상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터다. 올림픽 캐릭터로 최고의 인기를 얻은 ‘코비’는 어떤 이미지를 떠올린 걸까.

“수퍼맨 같은 영웅이 아닌 언제든 함께 놀 수 있다는 느낌이 가장 중요했다. 내 옆에 있는 친구 말이다. 나는 처음부터 성공을 확신했다.”

그러더니 “아, 하나 더 있다”며 코를 찡긋했다. 볼펜으로 자신의 손등에 눈·코·입을 그리고 중지와 약지를 접었다. 영락없는 코비였다. “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다면 최고의 캐릭터 아니겠나.”

나이가 들어도 어찌 이런 감각이 생겨날까 싶어 비결을 물었더니 그는 되레 반문했다. “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지겨운 어른으로 계속 살면서 지내고 있는지 묻고 싶다. 어린이야말로 가장 똑똑하고 무언가를 제대로 볼 수 있고 신속하고 가장 뭔가 궁금해하고 솔직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경직되고 지루한 어른들을 보면서 스스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단다.

9 인터뷰 중 직접 꽃 모양 변기 브러시를 설명하는 마리스칼 10 태블릿PC로 그린 드로잉
난독증 앓아 어릴 땐 모든 걸 그림으로 표현
그의 어린 시절은 남달랐다. 심한 난독증을 앓았기 때문이었다. 글자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니 모든 걸 그림으로 표현했다. 사고체계 역시 문서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모든 게 섞였다.

“가령 냄새를 맡으면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유를 모르지만 심장이 작동하고 그냥 느낀 대로 그렸다.”

4+4=8을 깨우치지 못해 친구들에게도 놀림을 당했던 유년 시절, 그는 늘 슬펐고 위축됐다고 했다. 속 깊은 고백인데도 그는 태블릿PC에 뭔가를 끊임없이 그려대며 무심하게 말을 이어갔다. “우디 앨런이나 팀 버튼처럼 좀 심각한 사람 취급당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가 만든 걸 좋아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것 같지 않더라.”

분위기가 가라앉으려는 찰나, 그는 이내 표정을 바꿨다. “원하는 대로 무언가 만들어볼 수 있는 나는 너무 행복하고 또 행운아다.”

과연 그가 앞으로 무엇을 더 상상해 낼까. 그는 두 가지를 꼽았다. 일단 크리스마스 기간에 직접 영화 시나리오를 써보겠다는 계획이다. 1970년대 바르셀로나 근처 휴양지인 이비자 섬을 배경으로 삼았다. 바로 자신이 술과 연애로 20대 청춘을 보냈던 곳이라서다.

나머지는 더 흥미로웠다. “전문가들과 에너지 센터를 만들고 싶다. 뭔가 단순하고 싸게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거다. 네팔·몽골·아프리카처럼 정수기나 인터넷이 필요한 곳에 에너지 문제부터 해결해 주고 싶다.” 그의 상상력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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