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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마을 된 『오발탄』 속 남산 판자촌

해방촌 식당으로 한 외국인이 들어가고 있다. 이들 식당에서는 외국인들의 입맛에 맞춰 개발한 햄버거, 피자 등을 팔고 있다. 해방촌에는 외국인 1000여 명이 살고 있다. [김경빈 기자]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 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허덴 더뎅이처럼 깔렸다.”

 이범선(1920~81)의 단편소설 『오발탄』(1959)의 한 대목이다. 소설의 배경은 남산 자락에 위치한 해방촌. 용산 2가와 후암동 일대를 일컫는 곳이다. 『오발탄』에 묘사된 해방촌은 반 백 년 세월이 흐르면서 그 모습이 많이 변했다.

이북실향민, 상경노동자 첫 정착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이 사라진 자리에 2~3층짜리 양옥이 들어섰다. 흙먼지가 날리던 비좁은 골목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됐다. 담벼락마다 벽화가 그려져 동네 분위기도 밝아졌다. 하지만 가파른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집들과 복잡하게 얽힌 전깃줄에선 무허가 판잣집이 빼곡했던 50여 년 전 해방촌의 흔적이 묻어났다.

 해방촌은 해방 직후인 1946년 생겼다. 이북에서 몰려온 실향민들이 주인 없는 남산 자락에 자리를 잡았다. 해방 직후 마을이 생긴 데다 월남한 실향민들이 이북 지역이 해방(통일)되면 다시 돌아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 ‘해방촌’이라 불렸다.

요즘은 10명 중 1명은 외국인

휴전선 너머 강원도 철원이 고향인 황성우(67)씨는 “집을 지을 땅에 새끼줄을 쳐놓고 파출소에 신고하면 ‘내 땅’이 됐다”며 “북한 정권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온 평안도 선천 사람들이 워낙 많아 ‘선천국민’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해방촌 인구가 급격히 불어난 건 60년대 이후다. 일자리를 찾아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 서울역에서 가깝고 집세가 싼 해방촌으로 몰려들었다. 남산 기슭 산길마다 미군 부대에서 나온 합판과 기름을 먹인 종이, 속칭 ‘루삥’이 사용된 판잣집들이 가득 들어섰다. 장정림(88)씨는 “60년대 전남 해남에서 서울로 돈을 벌러 와 해방촌에 자리를 잡게 됐다”며 “당시에는 골목마다 판잣집들로 가득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해방촌 주민들은 대개 인근 남대문시장에서 일하거나 가내수공업에 종사했다. 가내수공업 중 ‘요코’(스웨터 가내수공업)공장이 호황을 누렸다. 박신자(85)씨는 “미싱일을 하며 다섯 식구를 먹여 살렸다”며 “해방촌 사람들은 대부분 요코공장이나 담배를 말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요코공장이 돈을 벌며 해방촌도 덩달아 발전했다. 판잣집을 대신해 슬래브 지붕을 얹은 집들이 들어섰다. 90년대 들어 요코공장은 자취를 감췄다.

이국적 카페·식당 … 서울 명물로

 최근 해방촌은 HBC(Hae Bang Chon)라는 영문 지명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곳에 둥지를 튼 외국인이 늘었기 때문이다. 해방촌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1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해방촌 주민(1만2000여 명) 10명 중 1명이 외국인인 셈이다. 캐서린(26·캐나다)은 “해방촌은 집값도 싸고 외국인 친구도 많아 외국인 입장에선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해방촌에는 요즘 이색적인 카페·음식점 등이 많이 들어섰다. 동네 골목길을 누비는 20~30대 젊은이들도 쉽게 눈에 띈다. 하지만 여전히 해방촌의 주인은 한국전쟁 전후 해방촌에 자리 잡은 동네 주민들이다. 해방촌을 녹지 공간으로 만들고 인근 후암동으로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계획도 주민들의 반발로 사실상 무산됐다. 해방촌에서 커피 전문점을 연 김석(34)씨는 “해방촌은 아직 옛 정취가 남아 있는 동네”라며 “쉽게 변하지 않는 게 해방촌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글=안효성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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