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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의 시시각각] '블랙아웃' 허수아비 보고 있나

이규연
논설위원
“에너지관리시스템은 창조경제의 핵심이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던진 화두다. 창조의 상징이 될 정도로 최첨단 분야다. 이를 국가로 확장한 전력관리시스템은 세상에서 가장 정교한 모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수천, 수억의 크고 작은 전선을 타고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거대한 에너지의 그물망을 상상해보라. 요즘 이 복잡한 세상이 허수아비 논란에 휩싸였다.



 2011년 9월 15일, 그날을 기억하자. 이상 더위 속에서 전력예비력이 떨어진다. 블랙아웃(대정전)을 우려한 전력거래소는 일부 지역의 전기 공급을 끊는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엘리베이터는 멈추고 수술은 취소됐다. 주무 장관은 옷을 벗고 주무 과장은 늑장 보고로 중징계를 받는다. 왜 예비력이 부족했을까. “관계자들이 실수로 수요예측을 실패한 탓”이 정부가 밝힌 사고원인이었다. 한동안 9·15 사태는 잊혀지는 듯했다. 몇 달 뒤 국회 기술보고서가 나오기까지는.



 ‘전기관리시스템의 뇌(전력계통운영시스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따라서 정확한 예비력 자체를 내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블랙아웃의 수호자라고 믿고 있는 예비력이 사실상 허수아비라는 게 보고서의 골자였다. 이에 민주당 전정희 의원은 허수아비의 실체를 파고든다. 그 무렵, 필자도 보고서를 접하고 사내 탐사보도 기자에게 전파한다. 이후 전 의원의 제기로 국회·정부 합동 기술조사가 벌어진다. 정부 추천 전문가들은 일제히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낸다. 하지만 김영창 아주대 교수 등 국회 추천 전문가들은 정반대로 판단한다. 기술조사가 붕당 정치처럼 됐다.



 한국 기자는 수치·과학지식에 약하다. 전문용어로 무장한 사안에는 몸을 움츠린다. ‘신탁’을 내려주어야 할 권위자의 견해가 둘로 나눠진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일반 정치·사회 문제라면 당연히 메인 의제로 삼아야 할 사안도 피하려 한다. 고백하건대 필자도 그랬다. 열독률이 떨어질 것으로 보이는 복잡한 소재를 뒤로 미루었다.



 그런데 며칠 전, 사건의 변곡점이 왔다. 서울행정법원에서 9·15 관련 판결이 나왔다. 당시 징계를 받았던 주무 과장이 억울하다며 낸 소송에서 그가 이긴 것이다. 한 공무원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은 둘째 문제다. 전력거래소가 정부에 보고해온 예비력이 ‘허수’였으며, 이를 10년간 은폐해 9·15가 촉발됐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재판부가 전력관리시스템의 ‘뇌 상태’를 직접적으로 판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허수아비의 그림자 정도는 드러난 것이다. 전력거래소도 이전의 문제점은 일부 시인했다.



 그렇다면 지금도 블랙아웃의 위험에 노출돼 있을까. 허수아비의 고발자들은 그렇다고 본다. 지금도 뇌를 제대로 쓰지 않고 있어서 정확한 예비력을 추정해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전력거래소·산업부는 뇌가 정상이니 예비력도 정확하다는 입장이다. ‘뇌의 미래’를 놓고도 논쟁은 여전하다. 정부는 3년 전 ‘한국형 전력운영시스템’을 개발했다. 전력거래소·산업부는 이 시스템을 쓰면 전력 관리의 신뢰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한다. 허수아비의 고발자들은 3년 동안 전면 배치하지 않을 만큼 부실하며 개발 비리 의혹까지 있다고 비판한다. 관련 사안을 조사 중인 검찰이 풀어야 할 숙제다.



 전력은 민생과 산업의 기둥이다. 기둥에 금이 가거나, 일부 기둥이 없는 게 맞다면 블랙아웃의 위험성은 열려 있다. 또 허수에 속아 과잉방어를 하며 수천억원의 관리비용을 더 쓰고 있는지 모른다. 유교의 뿌리가 강한 한국사회에서 거대 과학기술을 둘러싼 논쟁은 낯설다. 정전사태 이후 2 년, 해법은 꼬이고 논란은 커졌다. 공학도 출신의 대통령 정부에서 이전과 격(格)이 다른 해법을 찾을 수는 없을까. 권력 스캔들만 특조 대상인가. 제3의 조사기구에 기술 검증을 맡기는 것은 어떨까. 아무튼 궁금하고 중요하다. 정말 허수아비인가.



이규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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