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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 <44> 경북 영양 외씨버선길



































청송·영양·봉화·영월 … 육지 속 섬 연결

우선 ‘BY2C’라는 정체불명의 약자를 알아야 한다. 2010년 지식경제부(지금의 산업통상자원부)가 광역경제권 연계협력사업을 벌이면서 BY2C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BY2C는 경북 봉화군과 영양군, 강원도 영월군, 경북 청송군의 영어 머리글자다.

이들 4개 지역에는 공통점이 있다. 4개 지역 모두 ‘육지의 섬’으로 통할 정도로 두메산골이다. 한 개 지역을 개발하는 데 한계가 있자 4개 지역이 공동 개발사업을 고안했고, 그 핵심 사업으로 외씨버선길 조성사업이 시작됐다. 하여 외씨버선길은 여느 트레일과 달리 행정구역을 자유로이 넘나든다.

현재 외씨버선길은 13개 테마코스와 2개 연결코스를 합해 전체 길이가 240㎞나 된다. 청송 주왕산 입구에서 시작해 영월 관풍헌에서 끝난다. 외씨버선길에는 약 80억원의 예산이 들어갔다. 길의 운영과 관리는 (사)경북북부연구원(원장 권오상 경북대 교수)이 맡았고, 4개 군이 ‘객주’를 운영하며 안내를 한다. 그런데 왜 외씨버선길일까.

외씨버선길 여섯째 길 이름이 ‘조지훈 문학길’이다. 외씨버선길이 지나는 길목, 그러니까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이른바 주실마을이 시인 조지훈(1920∼68)의 고향이다. 그의 시 ‘승무’에 다음의 구절이 있다.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보선(버선)이여’

여기에서 외씨버선길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청송에서 영월까지 이어진 길이 크게 휘어져 있는 걸 보고 조지훈의 시구를 떠올린 것이다. 외씨버선은 오이씨(외씨)처럼 볼이 조붓하고 갸름해 맵시가 있는 버선이다. 길을 내는 과정도, 길 이름을 지은 과정도 여느 트레일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첫날밤 도망간 신랑 기다리다 혼이 되어 …

이번에 걸은 외씨버선길은 여섯째 길이다. 영양군 월악산자생화공원에서 시작해 대티골을 거쳐 우련전에서 끝나는 8.3㎞ 길이다. 이틀 동안 길을 헤집고 다녔지만 기억에 남는 건 길이 아니었다. 일월산(1219m)이다. 길은 일월산의 동북쪽 기슭을 돌아서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이름에 해와 달을 다 품은 산은 일월산밖에 없다. 일월산은 동해 일출이 보이는 산이다. 경북에서 가장 높고, 경북에서 가장 먼저 일출을 볼 수 있는 산이다. 무엇보다 무속인이 우리네 산 중에서 가장 영험하다고 믿는 산이다.

무속인이 일월산을 음지가 강한 산이라고 믿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산에서 동북쪽으로 내려오는 골이 자궁처럼 생겼다고 하고, 겨울에도 계곡이 마르지 않을 만큼 산에 물이 많다고도 한다. 첫날밤 도망간 신랑을 기다리다 원혼이 된 황씨 부인의 전설이 산자락에 서려 있는 것도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일월산은 서 있는 자리부터 묘하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사이, 그 깊은 가랑이 안에 홀로 우뚝 서 있다.

일월산은 흉터투성이 산이다. 골짜기에 즐비한 신당은 사람의 채취라도 묻어난다. 일곱째 길에는 윗대티에서 칡밭목까지 4㎞ 길이의 그윽한 산길이 이어진다. 산허리를 휘감고 도는 이 숲길이 옛 31번 국도다. 일제강점기부터 1991년 새 국도가 날 때까지 일월산 자락에서 벌목한 금강송이 이 길을 따라 팔려 나갔다. 숲길에 소나무보다 낙엽송·굴참나무 따위가 우거진 까닭이다.

일곱째 길의 시점이 전국 최대 규모라는 자생화공원이다. 그러나 이 널찍한 공원을 압도하는 풍경이 산 한쪽 면에 버티고 서 있다. 산을 파고 들어간 가로 30m, 세로 80m 크기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은 1939년 일제가 일월산 일대에서 캔 광물을 처리하려고 지은 제련소다. 흉물스러운 꼴도 꼴이지만 여기에서 나온 독극물이 긴 세월 일대 산하를 물들였다. 2001년에야 오염원을 막았고 2004년 자생화를 심어 공원으로 꾸몄다.

외씨버선길 일곱째 길은 일월산 자락에 괸 숱한 흉터를 더듬는다. 그러니까 치유가 필요한 건, 길을 걷는 사람보다 사람에게 길을 내준 산이었다.

손꼽히는 자연치유생태마을 ‘대티골’

대티골 김종수(65)·권기순(63) 이장 내외의 황토 구들방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늦은 저녁 이장이 술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고, 대티골에 들어온 지 10년 됐다는 마을발전위원회 권용인(54) 위원장이 뒤이어 들어왔다. 장작을 넣어 아랫목이 뜨뜻했다.

대티골은 30여 가구 60여 명이 사는 외진 산촌이다. 행정구역은 일원면 용화2리 일대로, 윗대티와 아랫대티로 나뉘어 있다. 대티는 ‘큰 고개’를 뜻하는 대치(大峙)에서 나왔다. 대티골은 영양에서 봉화로 넘어가는 일월산 고갯마루 해발 400∼600m 지대에 들어서 있다. 봄에는 산나물 캐서 팔고 가을에는 고추 내다 팔던 대티골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자연치유생태마을이다.

대티골은 2009년 (사)생명의 숲이 주최한 ‘아름다운 숲길’ 공모에서 ‘어울림’ 상을 받았다. 대티골이 상을 받은 길의 절반이 옛 31번 국도다. 대티골은 옛 31번 국도 4㎞ 구간과 칡밭목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마을로 내려오는 4㎞ 산길을 이어 길을 냈다.

황토 구들방은 대티골이 운영하는 민박이다. 마을에 모두 9채가 있는데, 주민이 손수 황토방을 지어 주민 각자가 운영하고 있다. 황토방 수익의 일부는 마을 공동사업에 쓰인다. 봄에 열리는 산나물축제도 마을이 진행하고, 산자락에서 나는 재료로 건강밥상도 내어 놓는다. 김종수 이장은 “1년에 1만 명이 대티골을 방문한다”고 소개했다.

외씨버선길 일곱째 길은 대티골에서 시작해 대티골에서 끝난다. 자생화공원 건너편이 아랫대티고, 옛 31번 국도가 시작하는 지점이 윗대티 이장집 앞이다. 윗대티를 지나 고개를 넘으면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즉 우련전이다. 대티골을 지난 외씨버선길이 봉화로 접어드는 것이다.

대티골이 있어 외씨버선길 일곱째 길은 치유의 길이 될 수 있었다. 사람이 산에 상처를 내 길을 냈고, 그 길을 사람이 지켜 산을 되살리고 있었다. 권용인 위원장이 몇 번이고 당부했다.

“길을 걷는다고 길만 바라보면 안 됩니다. 길가에 사는 사람을 봐야 합니다. 사람이 있어야 길이 됩니다.”

전국에 595개나 된다는 트레일 가운데 제일 이름이 예쁜 길은 어디일까. 제주올레는 이름을 부를 때 입에서 울리는 느낌이 좋고, 충북 제천의 자드락길은 이름에서 한갓진 오솔길이 떠올라 흐뭇하다. 그러나 외씨버선길만은 못한 것 같다. 길이 지나는 마을에 살았던 시인의 시구(詩句)에서 길 이름을 따왔다는 얘길 듣고는 외국에도 이런 사례가 있나 궁금했으니 말이다. 외씨버선길 열세 개 길 중에서 경북 영양에 난 일곱째 길을 걷고 왔다. 일곱째 길의 다른 이름은 ‘치유의 길’이었다. 길을 걷기 전에는, 길 이름을 듣고 요즘의 힐링 열풍에 기댄 얄팍한 계산 정도로 오해했었다. 그러나 길을 걷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8.3㎞에 이르는 이 오붓한 산길은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이번에 알았다. 길이 때로는 누군가가 남긴 상처일 수 있다는 걸. 오랜 세월 제 몸에 흉터를 새긴 뒤에야 비로소 길이 된다는 걸.

글·사진=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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