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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시각각] 원칙이 우릴 삼킬지라도

권석천
논설위원
지난 일요일(8일) 아랍에미리트(UAE)의 아부다비에서 특별한 강연 하나가 열렸습니다. 연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 헌법재판관 알비 삭스(78·사진). 삭스는 남아공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와 평생을 함께했던 친구이자 동지입니다. 백인인 그는 인권변호사로 만델라의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참여했고요. 수차례 투옥 후 모잠비크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중 남아공 보안요원의 폭탄 테러에 오른팔과 왼쪽 눈을 잃었습니다.



 삭스는 아부다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아공 민주화는 만델라 같은 뛰어난 지도자뿐 아니라 아프리카 인권운동이 이룩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삭스가 15년간의 재판관 생활을 마친 2009년 펴낸 『블루 드레스』(일월서각)에 나옵니다.



 이 책을 읽으면 만델라와 ANC, 남아공 헌법재판소가 왜 용서와 화해로 새 시대를 열려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용서와 화해는 무조건적인 게 아닙니다. 진실의 무서운 민낯 앞에 서는 걸 말합니다. 가해자들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시절 자신이 저질렀던 악행들을 공개적으로 고백할 때 사면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주목할 건 이 원칙이 반정부 투쟁 때부터 수많은 토론을 거치며 성숙돼 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비폭력 저항의 모든 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무장투쟁을 시작하면서도 테러리즘만큼은 맹렬히 비난하고 거부했다.” “정의가 우리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적의 기술을 그대로 이용한다면 우리는 그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 “우리가 남아공에 민주주의를 가져왔다면 그 민주주의는 그들이 아닌 우리의 피 위에서 자라나야 한다.”



 ANC는 포로로 잡은 스파이들을 위해 재판 제도를 만들었고, 변호사를 뒀고, 상소권도 보장했습니다. 흑인과 ‘백색 독소’(백인 운동가)들에게 잔혹한 고문과 테러를 자행했던 백인 정권은 백기를 들기 이전에 이미 정신적으로 패망한 상태였습니다.



 세계가 만델라의 삶을 추모하는 이때, 국내를 돌아보면 대결과 반목의 미세먼지가 자욱합니다. 야당 의원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부정선거 불복”(장하나), “선친 전철 경고”(양승조) 발언을 하면서 정치가 얼어붙고 있습니다. 청와대 홍보수석은 “언어 살인”이라며 분개했고, 여당은 두 의원의 의원직 제명을 위한 징계안을 제출했습니다.



 저는 단기적 유불리를 넘어 장기적으론 정신에서 앞서는 쪽이 이기는 싸움이 되리라고,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국민은 절대 바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많은 시민이 원하는 건 자극적인 한두 마디보다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의 진실입니다. 다시는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코 눈 감고 넘어가자거나 ‘정신적 승리’란 이름의 아편을 탐닉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제겐 모두들 ‘독재자의 딸’ ‘종북 좌빨’ 같은 격한 언어에 길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진영 내부에선 카타르시스를 느낄지 모르지만 결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敵)인 정치적 냉소주의의 쓰나미에 휩쓸릴 뿐입니다.



 민주당이 ‘능력 없는 정당’이라면 새누리당은 ‘영혼 없는 정당’이란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집권당으로서 민주주의를 위해 과연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합니다. 야당의 거친 말에 역시 거칠게 반응해온 청와대도 “전적으로 국민 판단에 맡긴다”는 그 한마디를 왜 못하는지 돌이켜봐야 합니다.



 만델라와 ANC가 승리했던 원인은 ‘원칙이 우릴 삼킬지라도 그 원칙을 지킨다’는 정신의 힘에 있었던 것 아닐까요. 삭스는 재판관 취임 후 과거 폭탄 테러에 연루됐던 퇴역 군인에게 악수를 청합니다. 그가 진상 규명에 협조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와 정의를 향한 여정은 나의 오른팔을 없앤 자에게 왼 손을 내미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오직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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