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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피어린 산과 언덕(20)

<화천지구 전투>(2)
휴전을 앞둔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도미유학을 떠나려던 사단장급의 국군지휘관들을 모두 전선으로 들려보내 전투를 지휘토록 명령했다. 당시 이 박사의 단독 북진론은 주목적이 대미교섭을 위한 외교적 포석이었던게 사실이지만 그 배후에는 미국이나 우방국들이 단순히 생각해 넘길 수 없는 막강한 한국군의 군사력을 때로는 실감시키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
한국전쟁은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무력전에서 외교전으로 변모하긴 했지만 이 무렵 한국군은 12개 전투사단(약12만명)의 대군으로 성장, 전전선의 70% 이상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국군의 이러한 성장에는 특히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장군의 공로가 컸었다.
군 총사령권자로서의 이승만 대통령은 종전압력을 가하려는 중공군의 대공세에 강력한 한국군의 군사력을 대결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그의 북진론에 대한 결연한 태도를 만방에 과시, 휴전을 둘러싼 대미 흥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해 볼 심산이었던 것이다.
<불리한 전세에도 반격전 시도>
그래서 그는 소위 역전의 장성들을 모두 긴급히 전선으로 내보내는 등 어느 때보다도 군 인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 박사의 이 같은 긴급조처로 어느 사단은 사단장이 두 명씩이나 돼 잠시 혼선을 빚기도 했다.
화천 북방 한국군 제2군단 정면에 대치해있던 중공군 5개군은 7월13일 일제히 전면에서 대공격을 감행, 아군 제3·제5사단 경계와 수도사단·제11사단 경계지점을 거의 기습으로 뚫고 내려왔다.
그러나 한국군 제3·제5사단은 TOT포격과 그동안 익힌 전술을 십분 활용, 중공군 제60군의 인해 파상공격을 방어해내고 현 휴전선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면 전회에 이어 화천지구 전투에 참여했던 당시 제5·제3사단 지휘관들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겠다.
▲황필주씨(당시5사단참모장·대령=예비역 육군소장·현 대성목재사장·48) <6·25전쟁 중 우리 5사단은 어느 사단 못지 않게 전투를 많이 했지만 번번이 적의 주공에 부닥쳐 고전했어요. 어느 의미에선 전운이 아주 없는 사단이었다고나 할까요.
53년5월 중공군 대공세가 시작되던 첫날 최홍희 사단장은 참모회의를 나한테 맡기고 「지프」를 몰아 전방으로 달려나갑디다. 얼마 후 사단CP로 돌아온 최 장군은 철모를 벗어 던지면서 「텐트」를 받쳐놓은 나무를 주먹으로 내리치더군요. 원래 당수를 한 분이라 그런지 나무가 부러져버립디다.
그러더니 한마디하는 말이 『너 전방엘 좀 나가보라』는 거예요.
나는 최 사단장의 얼굴표정만 읽어봐도 이미 전세가 불리하게 됐다는 걸 대번 알겠더군요. 나가보니 중공군의 포탄이 집중해 쏟아지는데 산비탈에서는 마치 뜨거운 남비 속의 죽이 끓듯 불꽃을 튀기며 흙이 뒤집혀져요.
하도 많은 포탄이 연속 떨어지니까 포성 같은건 아예 들리지도 않데요.
최 장군은 적에게 뺏긴 949고지 일대를 탈환코자 전투경험이 많은 부사단장을 시켜 반격케 하더군요.
이때의 전황으로 봐 예비대를 계속 투입하는 축첩반격작전은 큰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어요. 그러나 어떻게든 반격전을 벌여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려는 것은 지휘관으로서의 절실한 심정이었겠지요.
나는 당시 화천지구 고전의 책임이 전적으로 지휘관들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변명 같지만 중공군의 계획된 전략적 대작전에 전술적으로만 대처했던 아군이 그래도 그만큼 전선을 방어한건 성공이었다고 봅니다.
<「포로 잡기 작전」에 서로 혈안>
한마디로 적의 병력과 화력이 우리로서는 거의 대항키 어려운 거였어요.
그러니까 상부에서도 지휘관들에게 책임을 크게 묻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 전투 후 부대를 재정비해 백암산 일대서 전투를 하고 있을 때인 6월 하순 우리 5사단에는 김종갑 장군이 도미하려다 돌아오는 바람에 박병권 장군과 함께 잠시 사단장이 두 분이었던 일이 있습니다.
이 무렵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에 앞선 공산군 공세가 치열해지자 공부를 하러 미국으로 떠나려던 장성들의 출국을 모두 중지시켜 전선으로 올려보냈어요.
7월 중순 사단장으로 부임해온 장도영 장군은 「헬」기서 내리자마자 곧장 전선으로 달려나갑디다. 장 장군은 최영규 대령이 지휘하는 27연대 CP로 올라가더니 여기가 사단본부라면서 전투를 지휘하기 시작하데요.
이렇게되니까 각 급 지휘관들은 모두 현 자기위치보다 한 계단씩 앞으로 나가고 말았지요. 장 장군은 공격명령을 내리고는 자신도 직접 「탱크」를 타고 나가 전투를 지휘, 사병들과 하급지휘관들의 사기를 올려놓더군요.>
▲고광도씨(당시 5사단36연대장=대령·현 국방부인력차관보·중장·49) <우리 36연대는 52년9월 351고지에서 한창 「포로 잡기 작전」에 혈안이 돼있을 때 적진 내 기습전을 벌여 큰 성과를 올리고 이형근1군단장으로부터 격찬을 받았습니다.
당시 김종갑 사단장은 상부로부터 포로를 잡으라는 독전지시가 오면 늘 『나무 위의 까치를 살살 기어올라가 잡을 수 있느냐! 올라가노라면 날아가 버리고 더욱 그 까치가 무기를 갖고있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고심하는 연대장들을 위로해줍디다.
우리는 이때 351고지 후사면으로 굴을 뚫고 들어오는 북한공산군에 대항해 연대노무자들을 총동원, 45도 각도로 T자형의 굴을 파 내려가 감제하고 특공대와 항공지원으로 적 동굴진지까지 완전 파괴해버렸어요. 이재전 소령이 지휘하던 제2대대의 특공대가 끝내는 적 동굴의 공기통까지 파괴하고 그 안의 적병들을 전멸시켜버렸습니다. 351고지는 정말 방어하기조차도 아주 힘든 곳이었어요.
화천지구의 중공군 5월대공세 때에는 우리 36연대가 949고지를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돌출한 삼각봉 고지를 점령한 적은 우측으로 연결된 M-1고지와 피의 능선을 차단하면서 27연대지역으로 내려 밉디다.
그래서 M-1고지쪽에 배치돼있던 우리 36연대의 2개 중대 병력이 철수로를 완전 차단 당한 채 사면초가에 빠졌었지요.
하옇든 전 사단이 3면 포위를 당할 위기에 처했던 거예요. 이렇게되면 우리는 좌측 북한강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어요. 우리는 적의 공세로 분산된 병력을 수습해 사력을 다한 반격전을 개시했습니다. 우리연대가 주공이 됐었는데 다행히 삼각봉 밑의 적 포위망을 뚫어 피의 능선쪽에 있던 병력은 구출했으나 역부족이라 더 이상의 전과는 못 올렸어요. 하는 수없이 전 사단병력이 후퇴로를 뚫으며 철수작전을 전개했는데 상당수의 전사상자를 냈지만 비교적 성공을 거둔 셈이었습니다.>
▲이활남씨(당시 3사단22연대 수색중대선임장교=중위·예비역육군대위·현 광화문세무서근무·44) <당시 우리 3사단은 금성천 지류를 사단경계로 5사단 좌측에 배치돼있었습니다.
나는 중공군 대공세가 시작되던 7월13일 저녁 6시 반쯤 수색대원 45명을 지휘, 포로를 잡으러 적진지로 향했습니다.
우리는 이날밤 중공군 전초 앞 5개 지점에 청음초소병을 배치해놓고 2개 분대의 전투정찰대를 적진 내로 투입시킬 계획이었어요.
<청음초병 배치 시켜 적정 살펴>
나는 이때 20여일 전부터 이질을 앓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동안 수색대를 지휘하던 중대장이 이날은 어떤 사정이 있으니 나보고 좀 나가달라는 거예요.
7시20분쯤 계곡하나를 사이에 끼고 적 전초진지와 맞바라다보는 무명고지에 도착, 행동을 개시하려는데 5사단과 우리사단 경계지점 쪽에서 적의 노란 신호탄이 오릅디다.
나는 이것을 보고 즉시 G-2에 적정이 수상하다고 보고했더니 가끔 있는 일이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데요.
그래서 우리는 청음초병 등을 배치시키고 2개 분대의 정찰대를 적진으로 출발시켰는데 이때부터 적의 포격이 시작돼 20여분간 계속되더니 딱 멈춥디다.
잠시 후 청록색의 사정연신 신호가 오르더니 그동안 아군진지 7부 능선까지 기어올라 붙어있던 중공군의 돌격이 시작되면서 삽시간에 고지는 혼전의 수라장이 돼버리데요.
그제야 아군의 TOT포격이 20여분간 가해졌는데 이 통에 적진에 들어가 있던 우리 대원들은 완전히 분산돼 버리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아군은 이날 밤 거의 기습을 당한 셈이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전방사단 CP에 나와있던 사단장이 상황이 워낙 위급해 권총을 빼서 중공군들을 쏴대기까지 했다고 하더군요.
나는 이날 밤을 적진 앞의 무명고지에서 연락병과 통신병 2명을 데리고 꼬박 새우며 버티었습니다. 아군포격에 흩어져버리고만 전진공대를 지휘하던 소위가 밤중에 나 있는 데로 올라왔더군요.
14일 새벽 옆의 아군 8사단전우들이 우리가 있는 무명고지로 올라오던 중공군 한 명을 생포해 가지고 왔어요.
<사경 헤매다가 이질병도 완쾌>
중공군들이 이 고지를 덮쳤더라면 우리는 꼼짝없이 죽을 뻔한 거예요.
날이 밝으면서 나는 5명의 전우들과 함께 후퇴를 시작, 금성천 쪽으로 나가보니 고무다리에는 이미 중공군이 들어와 있습디다. 우리는 다시 되돌아서 8사단지역을 거쳐 수도사단 쪽으로 들어갔는데 거기도 중공군이 득실거리고 아군차량들이 불에 타고 있데요.
여기서 나는 적박격포탄 파편에 좌측대퇴부와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하고 내 연락병은 팔이 끊겨나가는 중상을 입었어요.
나는 연락병의 끊긴 팔을 압박붕대로 지혈시켜 대원들과 함께 보내고 뒤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차마 나를 떼어놓고 발길을 못 돌리는 전우들에게 나는 권총을 빼서 위협하면서 빨리 가라고 소리쳤어요.
15일 아침 간신히 걸어서 금성천 쪽으로 나왔는데 14일부터 11사단이 반격전을 개시해 이젠 퇴로가 뚫렸더군요.
웬 비는 그렇게 억수같이 퍼붓는지 정말 죽겠더군요.
금성천 고무다리를 건너 아군포병들의 후퇴하는 「트럭」에 편승해 나오다가 다시 미 고문관 「지프」를 타고 화천 사단후방사령부까지 왔습니다. 사단에 돌아와 대원들의 소식을 알아보니 15명이 실종됐고 나머지는 모두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나는 사경을 뛰어넘은 이 3일 동안에 그간 앓던 이질이 깨끗이 나아버렸는데 아마 극한의 긴장이 병을 이겼던 것 같아요.>
◆주요일지(1952년7월21∼24일)
※21일 ▲미군, 불모고지에 9시간 맹포격 ▲이 대통령, 중석불사건관련자 엄단 담화 ▲미 민주당전당대회 개막, 「스티븐스」씨 추대기세
※22일 ▲휴전회담, 5분만에 산회 ▲이범석 내무·이윤영 무임소, 사표 제출 ▲전국민중자결단 대표, 이 대통령의 재출마간청
※23일 ▲육군참모총장 경질, 백선엽 중장 임명 ▲신라회, 이 대통령의 재출마간청
※24일 ▲전선 소강상태 ▲김태선씨 내무장관취임 ▲53일간의 미강철파업 해결
◆알림=멀지않아 6·25때의 「병참문제」를 다룰 계획이오니, 당시 한·미 노무사단 (KSC)에 관계한 분은 중앙일보 편집국 「민족의 증언」담당자 앞으로 연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화는 (28)8211(교환)의 74번, 야간이나 일요일은 (94)3412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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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