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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제28화 북간도(32)

<신흥무관학교>
신흥중학교는 많은 지사·독립군 장병을 길러냈으나 1920년8월에 없어졌다. 1910년10월에 신민회는 양기탁의 주재로 회의를 갖고 국권회복을 논한 끝에 『조선국내서는 총독부에 항쟁하고 국외에서는 무관학교를 세워 무력항쟁의 힘을 기른다』고 결의한 바가 있었다.
이에 따라서 양기탁·이승훈·안태국·김구·주진수·이회영·이시영이 거의 같은 무렵에 만주로 건너왔다.
이 가운데서 이회영 이석영 이시영(전 부통령) 3형제는 유하현 삼원보에 자리를 잡고 이른바 신흥강습소를 세운 것이다. 젊은 사람들을 모아 중학교 정도의 교육과 함께 군사훈련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 마을의 중국인들이 이들을 일본의 앞잡이로 오해하여 일체 물건을 팔지 않는 등 적대시하는 바람에 여기서는 기틀을 잡을 수 없어서 이듬해인 1911년에 통화현 합이하로 옮겨간 것이었다.
이 해가 바로 중국의 신해혁명이 난 해인데 이때 신흥강습소측이 혁명을 지지해 주자 오해가 풀려 지방민의 협조를 얻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19년 봄에 일본 육사를 졸업한 이청천(본명 지대영)과 김경천 중위 등이 합류하게 되어 5월3일을 기해 신흥무관학교로 개정하고 교장에 이시영, 교성대장에 이청천, 오광선 신팔균 이범석 김경천 등이 교관을 맡아 독립군장병을 훈련한 것인데 1920년8월 문을 닫고 이 학교의 장병들이 대거 청산리에 출동, 공을 세운 것이다.
이곳은 지역적으로 북간도가 아닌 서간도지만 북간도와의 연락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 이 학교 관계자들은 사방에 흩어졌다가 길림성의 돈화지방이 은연중 중심이 되어 하나 둘 모여들었던 것이다. 1924년께이다.
이 무렵에 김홍일씨가 각처에서 독립군을 지휘하여 싸우다 돈화에 오게 되었고 여기서 간도국민회의 지도자들과 접촉한 것이 명동에 오게 된 실마리였다.
이때 국민회는 마진이 회장직에 있었고 부회장은 서상용이었다. 이밖에 임원 및 지도적 인물로 김계산·임상춘·마룡하·마천룡·장기영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군의 침공으로 와해되다시피 한 독립군을 모아 다시 「한국의용 군사위원회」로 부활시킬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집행위원장에는 마진이 선출되고 본부는 돈화에 두기로 했었다. 이 군사위원회는 사방에 흩어진 독립군들이 우선 생업에 종사하며 몸의 안전을 지키되 일단 유사시에는 전 북간도 안의 용사들이 한날 한시에 동원되도록 조직을 짜는 일을 서둘렀다.
원래 마진은 대납자 사람으로 명동지리에 밝으나 일본군이 마진의 집을 불태운 만큼 중요 수배인물로 되어 나타나지 못해 명동에서 이 비밀조직을 맡을 사람을 찾고 있던 중에 김홍일씨가 왔던 것이다.
따라서 김홍일은 간도독립의 아성인 명동에 이 「극비」의 임무를 띠고 김약연을 찾아갔다. 거듭 되풀이 하지만 최세평이란 가명으로 명동학교의 체조교사로 일보는 것이다.
이 최 교사는 체조시간에 체조보다도 군사훈련에 열중해서 일본경찰의 주목을 받았던 것이며 앞서 용암포 경찰서에 구금되었을 때 그곳에 있던 현시달 경부가 『안면 있는 사람』이라고 수상히 여겨 자꾸 뒤따르는 바람에 결국 위기를 맞아 또다시 피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홍일씨가 체조교사로 있을 때에 명동서는 축구가 한창이었다. 이 무렵의 「볼」은 지금 것보다 컸으며 경기 중에 상대방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것, 정강이를 까는 것 등은 아주 자랑거리였다.
명동에서 최 교사의 지도로 축구가 강하다는 소문이 나자 국자가에 있는 중국인 중학교에서 『한판 붙자』고 도전해와서 80리를 걸어가 대항전을 별인 일이 있었다. 「숏·패스」로 쉽게 4「골」을 넣어 이기자 중국 학교측에서는 『졌다』면서 한턱 단단히 내어 잘 먹었다.
가끔 중국요리 생각이 나면 『축구경기하자』고 제안했으나 중국인 중학교서는 그 뒤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1920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갔을 때 「러시아」 사람들은 그때 이미 「론·그라운드」에서 축구를 하는 것이었던 것에 비추어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
이 무렵 학교에는 총무간사라는 것이 있었는데 직책은 운동기구를 사오는 것이었다.
하나 「볼」을 살데도 없고 살 돈도 없어 경기하다 「볼」이 터지면 이를 꿰매는 것이 총무간사의 일이었다. 터진 「볼」 꿰매기에 애를 많이 썼던 것이다.
한편 돈화의 마진 등이 계획했던 군사위원회는 약간의 조직이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거사까지는 이르지 않았고 지하에서 간헐적으로 친일주구의 제거 등의 일을 했다. 이 운동에 적극 나선 이에 문재린 목사가 생존해 있다. 지금 「캐나다」에서 선교중이다.
이때 부회장이던 서상용은 간민분회장 등을 지내면서 군자금모집 등 독립운동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이다.
동삼성 연길현 한족생계회를 조직했고 그 뒤 대한정의군사의 외교사절단장이 되어 김좌진 장군 등과 같이 활약했다.
해방 후 월남, 초대 함북지사를 지냈는데 61년에 89세로 별세했다. 예비역준장 서재관씨의 아버지다. <계속> [제자 이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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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