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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피 어린 산과 언덕(18)|금성지구 전투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한 북한공산군을 대신해 전선의 주역으로 나선 중공군은 53년7월 금성과 화천지구의 한국군 제2군단 지역에 5개「군」의 병력을 투입, 집중포격을 앞세운 인해 파상공격을 가해왔다.
공산군이 소위 「7·13대공세」지점을 이 지역으로 선택한데 대한 정략적 이유는 전회 (본 연재 제392회 및 제393회)에서 언급한바 있지만 전술적인 면에서도 중동부전선의 산악지대가 그들로서는 승산이 많기 때문이었다.
2차 대전 중 항일전에서 야간 유격전과 산악전에 대한 경험을 많이 쌓은 중공군은 중동부 전선이야말로 지형상 안성마춤의 전쟁터였다.
한편 대규모 화력동원과 항공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유엔」군 전법은 평지 전에서는 단연 위력을 과시할 수 있지만 적진지가 요새화 된 산악에서는 제대로 전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한국군 제2군단 지역은 미군지원포병연가 배속돼 있긴 했지만 전선에서 화력이 제일 약한 지역이었다.
<포위망 뚫고 주 저항선을 방어>
중공군은 이러한 아군의 약점을 포착, 한국군이 과연 단독으로 전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해보자는 속셈까지 곁들여 7월의 우기를 이용한 일대공격을 강행해 왔다.
중공군 제68·제16·제23군은 지형능선·수도고지를 비롯한 중동부전선의 그들 최후 주 저항선이었던 금성천 일대에 53년7월13일을 기해 인해의 집중공세를 가해 왔다.
아군 제2군단의 제8·제6·제11사단 등은 그동안 극장에서 쌓은 제반 경험을 살려 변화무쌍의 전투상황에 대처하면서 이 같은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중공군의 7·13공세로 한국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고 전선에서 얼마 썩은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때 격전고지 일부가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맡았다.
그러면 당시 금성지구 전투에 참전했던 제11·제8·제6사단 지휘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이창정씨(당시 제11사단 부사단장·대령=예비역 육군소장·현 국제기능「올림픽」한국위원회 사무총장·49)<우리 11사단은 53년7월 국군 제2군단으로 배속돼 금성에서 제6사단과 진지를 교대하던 중 중공군의 7·13대공세를 당했습니다.
군단에서는 52년부터 금성천 지역에서 중공군의 주 저항선을 무너뜨리고 혈전을 계속해온 6사단이 그간 많은 전력이 소모돼 우리 11사단을 교체, 투입시켰던 겁니다. 7월13일 하오 6사단의1개 연대 정면을 맡고 있던 수도사단 제1연대와 우리 11사단 김영하 대령의 제9연대가 진지교대를 거의 끝마칠 무렵 중공군은 한 지점에 한 시간 이상씩 집중포격을 가해대면서 공격을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적은 아군부대가 교체되는 틈을 이용, 전투력의 공백기를 물고 늘어져 그대로 뚫고 내려온 거지요. 나는 이날 밤 9연대가 전선배치를 하는 중 시작된 중공군의 포성이 심상치 않아 연대 CP로 나가봤더니 이미 통신이 모두 두절된 채 주위에 적 포탄이 마구 떨어지더군요.
우리 9연대와 수도사단 1연대는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는데 아군전선을 돌파한 중공군은 그냥 물밀듯이 밀려오고 만 거예요.
나는 「지프」를 몰아 적근산 고개를 넘어오다가 최창언 수도사단장을 만났습니다. 얼굴이 상기된 채 고개마루턱에 서 있는 최 장군에게 수도사단은 지금 어떠냐고 물었더니 통신이 모두 끊겨 상황조차 파악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거예요.
새벽에 보니 수도사단지역의 미군포병진지도 완전히 포위가 돼버렸더군요. 적근산 앞까지 내리밀렸던 아군은 사투를 거듭한 끝에 주 저항선을 방어하는데 성공은 했지만 당시 전황은 정말 비참했었어요.
중공군이 공세지점을 이 지역으로 택한 전술적 이유중의 하나는 한국군 2군단은 미 군단들보다 화력이 약했고 지형이 산악전에 적합한 험산지대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한국군 2군단에는 미 제5포병대가 와 있었지만 신통치가 않았고 화력이 전전선서 제일 약한 곳이었어요. 적이 이같은 아군의 약점을 노린 것은 망연한 일이었겠지요.>
<휴전 앞서 미군지원 적어 곤란>
▲안병건씨(당시 제8사단 16연대장·대령=예비역 육군대령·51)<우리 8사단 16연대는 53년5월부터 휴전조인까지 52년 수도사단이 격전을 벌였던 금성동 북방의 지형능선 일대에서 적 1만7천여명을 사살하고 아군도 3천여명이 전사상을 당한 중공군과의 일대 결전을 전개했습니다.
중공군의 7월 대공세를 당한 우리 한국군은 휴전을 위해 미군당국이 군수물자지원에 제약을 가해 작전을 수행하는데 큰 곤란을 겪었어요.
내가 지휘하는 16연대는 지형능선을, 제21연대는 수도고지를 방어하고 있었는데 만약 적에게 이 일대를 빼앗기면 아군은 수십㎞를 후퇴해 금성천 이남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어요.
중공군의 5월 공세로 전초진지 몇 개와 지형능선 선단이 적 수중으로 들어갔을 때 송요찬 장군이 김익렬 장군과 교대해 우리 8사단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송 장군은 부임 제 일성으로 『내가 있는한 현재 시간의 현 지점에서 일보의 후퇴도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더군요.
과연 송 소장은 「타이거」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강력하고 실질적인 지휘통솔로 긴박한 제반사태를 잘 대처해 나갑디다.
중공군의 7월 대공세는 전 학력이 총동원된 집중포격을 동반한 인해 파상공격이었는데 공격준비 및 돌격지원을 경한 이같은 적의 포격은 보통 40분 내지 1시간30분씩 계속되더군요.
즉 중공군은 그들 공격부대가 돌격선에 도착해 사정연신 신호를 올릴 때까지 포를 계속해 쏴대고 청록 또는 빨간색의 신호탄을 발사한 후 제1·제2·제3파상부대가 연속적으로 아군진지를 향해 돌격합디다.
<집중공격 하룻밤새 18번이나>
이같은 적의 인해 파상공세는 하룻밤에 최고 18번까지 연속될 때도 있었어요.
중공군의 이런 전법에 아군은 하는 수 없이 진지들을 빼앗기고 매일 수백명씩의 인명피해를 입었던 거예요. 때로는 진지의 공간을 메울 수 없을 정도로 아군병력이 소모됐습니다.
그러나 우리 16연대는 송요찬 사단장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병력보충을 잘 해줘 거의 다 희생된 고참병들을 신병들로 대체해가면서 끝까지 중공군의 공격을 방어해낼 수 있었어요. 우리는 적의 포격이 시작되면 대포병전을 전개하는 통례적인 전법을 쓰지 않고 포의 엄호를 받은 적 공격부대가 돌격대기 지점에서 이동을 개시하는 시간에 TOT(집중포격)를 가해댔습니다. 이것은 포병전의 원칙에 벗어난 것이었을지 모르나 적을 격파하는데는 아주 주효한 전법이었어요.
또 우리 16연대는 중공군의 인해 파상공세를 분쇄하기 위해 동굴진지와 교통 호들을 개조해 버렸습니다.
식량·탄약 등을 굴속에 비축, 적이 후방 깊숙이 들어와도 진지를 고수하고 아군 반격 시는 적의 퇴로를 차단해 전과확대를 기하려는게 동조진지전법인데 당시 우리 신씨들은 이를 역이용, 중공군의 대 공격이 시작되면 적극적인 전투행동을 취하지 않고 모두 거북이 머리처럼 동굴 속으로 숨어버렸어요.
그래서 나는 동굴을 개축시키고 교통 호는 직선으로 파게 해서 들어오는 적병의 사살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적이 돌격 선에 도착, 사정 연신 신호를 할 때 우리 연대는 일제히 최후 저지 사격을 가해댔어요.
중공군은 우리의 이 최후사격에 놀아난 거예요.
진지로 달려 붙은 적도 직선교통 호에서 제3파 부대까지는 전멸시킬 수 있었구요. 대개 중공군은 제2파∼제5파 부대까지를 투입한 후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후 재공세를 취해오더군요.
한번은 밤새 격전을 하고 아침에 보니 우리 진지가 9개나 적에게 넘어가 있데요.
우리 연대에는 공격만을 전담하는 3개중대의 예비대가 있었는데 나는 즉각 이 부대를 투입, 역습시켜 오전 중으로 모두 탈환했어요.
이 공격 전담 특공대는 역습에 투입할 때도 목표만 점령하면 즉각 철수, 다음의 공격준비를 했습니다.
우리 16연대는 7월13일 좌측 사단이 뚫리는 바람에 중공군에 포위를 당했다가 3일만에 뚫고 나왔어요. 연대OP를 비롯한 각 진지들을 TNT로 모두 파괴해 버리고 우리 부대서 가장 용감한 이계성 대위가 지휘하는 제9중대에 철수·엄호작전을 펴게 하고 무사히 금성천을 넘어 후퇴했습니다.>
<중공군 사단장의 원숭이 노획>
▲송대후씨(당시 6사단 제2연대장·대령=예비역 육군준장·현 동양도로개발 부사장·46)<우리 6사단 2연대는 51년5월 경기도 가십군 용문산 전투에서 전 장병이 철모에 「결사」라고 쓴 백포를 두르고 적의 포위망 속에서 4주 방어전을 전개, 60여 시간의 육탄전 끝에 중공군 2개 사단을 거의 전멸시켜 사창리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국내외에 명성을 떨쳐 「백호부대」로 명명됐습니다.
이같은 사주방어전은 한국군으로서는 우리 백호부대가 처음 실행했던 전법인데 용문산 전투의 대승으로 아군은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완전 분쇄하고 현 휴전선까지 진격, 교착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던 거예요.
52년9윌 우리 백호부대는 춘천 북방 오음리 전투에서 중공군 27사수장의 애완용 원숭이를 노획했었는데 「호지스」미9군단장, 「밴플리트」8군사령관을 거쳐 「유엔」부총사령관 「리지웨이」대장이 동경으로 가져갔어요.
이 원숭이는 중공군 포로의 진술을 들어보니 아침엔 기침시간을 알려주고 세면도구를 갖다주며 부채질과 안마를 해주는 등 적 사단장의 「당번 병」 노릇을 해주었답디다.
우리 백호부대는 52년10월 혈투 화여 40여 시간만에 금성 남방의 585고지를 점령하고 중공군 제67, 제68군과 금성 공략전을 벌여 적의 결사적인 금성천 방위선을 격파했어요. 한때는 진격을 거듭해서 적의 원산외곽방위선까지 육박도 했었구요.
우리는 53년 중공군의 7월 대공세전까지 금성지역에서 적 1만2천여명을 사살해 중공군 3개 사단의 전력을 완전 상실케 한 후 11사단과 교체하고 나왔습니다.>
주요일지(1952년7월13∼16일)
※13일▲휴전회담, 포로문제토의 계속 ▲해인사에 공비 내습
※14일▲내한중인 「콜린즈」 미 육군참모총장, 만주폭격부사나 사전에 「유엔」참전국과 협의하겠다고 언명 ▲북경방송, 미기 침입 비난
※15일▲「유엔」군, 고성남방고지 탈환 ▲이 대통령, 「콜린즈」대장과 요담
※16일▲「미그」기 1대, 격추 ▲「유엔」측 연락장교, 미 공군의 포로수용소 폭격을 부인하는 각서를 공산측에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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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