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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피 어린 산과 언덕(17)|적근산 전투

중공군은 휴전을 바로 눈앞에 두고 53년5월27일과 7월13일 두 차례에 걸쳐 화천 북방의 한국군 제2군단 지역과 금성·금화지구의 수도사단·제9사단지역에 대공세를 가해왔다.
이 같은 중공군의 5·27과 7·13 대공세는 현재 휴전직전의 월남전에서 공산군이 춰하고 있는 공세와 그 성격이 비슷한 것이었다.
공산군이 집중공세를 이 지역으로 택한데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첫째로는 화천발전소를 비롯한 이 지역의 천연요충지역을 휴전에 앞서 최종적으로 확보하고, 둘 째는 휴전을 거부하는 한국군에 중압을 가하여 종전을 꾀하자는 일석일조를 노린 것이다.
중공군은 철의 삼각지대나 「펀치볼」지구에서는 그동안의 고지쟁탈전에서 참패를 당한 곳인데다가 마침 한국군이 화천·금성지방에 집중 배치돼 있어 이곳을 표적으로 삼아 설욕하려는 생각도 있었다.
이무렵 미군은 한국군의 휴전반대에 대한 압력수단으로 군수물자의 보급과 지원을 어느 정도 제약하고 있었다.
중공군으로서는 이래저래 한국군에 일격을 가 할만하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휴전성립을 위한 한국군에 대한 미군과 공산군의 압력은 그 수단과 방법은 달랐지만 목적에 있어서는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적근산을 중심한 좌측의 금화지역에 배치돼있던 수도사단은 중공군의 7월 공세로 고급지휘관이 적의 포로가 되고 거의 전사단이 포위를 당하는 등 일대 수난을 겪었지만 사력을 다해 적의 포위망을 분쇄, 병력을 구출해낸 후 반격전을 벌여 주저선을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금화지역의 한국군 제9사단도 53년 여름 중공군과 밀고 밀리는 격전을 거듭했다.
다음은 당시 금성지역 전투에 참전했던 수도사단 지휘관들과 9사단 사병의 이야기.
<테일러, 근래 드문 큰 공세라고>
▲최창언씨(당시 한국군수도사단장=회장·예비역육군중장·전 한비부사장·52)
<나는 53년4월25일 송요찬 장군과 교대해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했읍니다.
당시 우리 사단 작전지역은 금화에서 적근산에 이르는 대성산 정면이었어요.
나는 최세인 대령이 지휘하는 1연대와 은석표 대령의 26연대를 전선에 배치하고 기갑연대는 2개 대대를 제1·제26연대에 배속시키고 1개 대합만 남겨 사단예비대로 뒀읍니다.
우리는 7·13대공세에 앞서 7월2일 중공군 1개 대대의 공격을 받았어요.
1연대는 이날 밤 정면을 공격해 온 중공군과 아침까지 싸워 이를 거의 전멸시키고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아마 이것은 7·13대공세에 앞선 적의 아군진지 탐색전이었던 것 같아요. 「테일러」미 8군사령관이 직접 안내하더니 『근래에 드문 적의 큰 공세였다』면서 잘 싸웠다고 칭찬합디다.
하루는 「젱킨즈」 미9군단장이 사단CP에 들러 「브리핑」을 들고나더니 321고지가 어디 있느냐고 묻데요.
1연대와 26연대 정면에 있는 두개의 321고지를 지도에서 짚었더니 적의 무전이 매일 밤 321을 찾는다면서 특별경계를 하라고 하더군요. 3일 후 26년대 장으로부터 321고지 후사면서 적 동굴을 발견, 중공군 한 명을 생포했다는 전하보고가 왔어요.
포로 심문결과는 적의 대공세가 없는 것이었지만 나는 우리 정면에 중공군이 동굴을 파는게 심상치 앉아 전초경계를 강화시켰읍니다.
나는 지휘관으로서 휴전에 앞선 적의 공세를 예측했지만 막상 중공군이 7·13같은 그런 대 공격을 가해올 줄은 몰랐어요. 13일 밤9시40분쯤 갑자기 적 포탄이 사단 CP까지 날아오기 시작합디다.
1연대와 26연대서는 지금 포탄이 비오듯 떨어지고 있다는 보고가 계속 들어오구요. 이날 마침 우측 6사단이 11사단과 진지교대가 있어 우리가 6사단 1개 연대 정면을 떠맡았었지요.
적은 우리가 맡았던 6사단지역에 11사단의 김영하 대령이 지휘하는 13연대가 들어가는 봄을 이용, 이같은 포격을 앞세워 아군진지를 뚫고 내려온 거에요.
1연대장 최세인 대령한테서는 이미 중공군이 우리 일선을 돌파했다는 보고와 함께 지금 작전중이니 사단예비대를 투입시켜 달라는 요청이 들어옵디다.
그리고 최 대령은 적 병력이 연대규모 이상인데 전초대대와의 통신도 모두 두절됐다는 거에요. 나는 육근수 기갑연대장을 불러 예비대의 출동을 준비시켰읍니다.
26연대장을 불러 상황을 물어봤더니 그곳은 그리 심각하지는 않다고 하더군요.
<부사단장 포로에 대령도 전사>
그런데 1연대장은 뚫린 정면을 직선 반격해 달라는 것이고, 기갑연대장은 우회해서 측면 반격을 하겠다는 거예요. 나는 이같이 연대장들의 의견이 맞지 않길래 육근수 대령에게 1연대 CP로 나가 상황을 파악하고 최 대령과 의논해 작전을 전개하도록 명령했읍니다.
육 대령을 출동시키고 참모들한테 의견을 물으니 지금 뚫린 정면사정을 제일 잘 아는 1연대장 의견에 따르는게 좋다고들 합디다.
밤11시 이후로는 1연대와의 통신이 일체 끊겼고 12시가 지나니까 육 대령의 도착보고가 들어오데요.
이 때 임익순 부사단장이 두 연대장들의 의견을 조정해주러 나갔어요.
나는 임익순 부대령의 도착보고를 받고 1연대장 의견대로 잘 조정해주고 반격시기는 세 사람이 판단해서 하도록 지시했읍니다. 이후로 전선과 사단본부와의 유·무선연락이 일체 두절되고 말았어요.
작전참모에게 교육대·공작대·전차 1개 소대를 통합, 사단 예비대를 편성토록 명령하고 나니까 새벽 5시쯤 적 포위망을 뚫고 나온 1연대 미 고문관이 거의 실신상태가 돼 기어올라옵디다.
알고 보니 그 동안에 중공군이 1연대 CP를 덮쳐 부사단장이 포로가 되고 육근수 대령은 전사했더군요.
나는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어 미 수석고문과 「지프」를 타고 1연대 정면을 향했는데 사단 CP앞 포병진지에 나가니 벌써 적이 여기까지 들어와 있읍디다.
미군 8「인치」포대 쪽에서는 중공군이 「초컬릿」·「라디오」 등을 들고 좋아 날뛰고 있더군요. 그걸 보니 정말 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데요. 하는 수 없이 사단 CP로 돌아와 26연대에 연락을 해보니 이젠 거기도 격전이 붙었더군요.
<중공군 3개 사단이 정면공격>
14일 아침 7시쯤 「젱킨즈」군단장이 왔길레 상황 설명을 했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난후 미 제3사단과 교체하는 게 어떠냐고 물읍디다. 나는 긴 한숨을 들이쉬고 부대교체를 한마디로 거절했읍니다.
나는 싸움이 이제 시작이지 결말이 아니며 미3사단강보다 이 지역 지리에 더 밝은 내가 잃은 진지를 기어이 탈환하겠으니 1개 대대병력과 포3개 대대만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어요.
14일 하오 군단장에게 요청했던 미군보병대대와 포병이 도착하더군요. 즉각 새벽에 긴급 편성해놓은 우리 사단예비대와 미군들로 혼합부대를 편성, 반격전을 개시했읍니다.
이 반격전은 대성공이었는데 미군들이 버리고 간 8「인치」포까지 우리 공병대장이 진두지휘, 「불도저」로 끌어내고 포위됐던 사단포를 하나 손실 없이 모두 끌어냈어요.
14일 저녁때 26연대를 나가보니 연대 CP가 없어졌더군요. 사단장이 왔으니 집합하라고 했더니 참모와 사병들이 모입디다. 나는 여기서 1연대 정면으로 나가는 도중 한 사병이 중공군 포로를 싣고 오길래 심문을 했더니 13일 밤 우리 정면에는 중공군 3개 사단이 공격을 가해 왔다는 거예요.
나는 사단본부로 돌아와 식사준비를 시키고 후퇴해 나오는 사병들을 수습했습니다. 14일 저녁까지는 진지들을 거의 탈환하고 후퇴한 병력 1천5백여명을 모아 부대를 재정비하기 시작했어요.
15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오셨기에 나는 모든 상황을 숨김없이 설명했읍니다.
옆에 있던 「젱킨즈」장군이 내가 미3사단과의 교체를 거부했던 이야길 하니까 이 박사는 군단장 어깨를 두드리며 이 사람은 능히 잃은 땅을 탈환할 수 있는 사람이니 잘 도와주라고 하더군요.
나는 18일 4일 동안 수습한 2개 대대병력을 모아놓고 『아직도 전방에 포위돼있는 전우들을 구해낼 사람은 너희밖에 없으니 잘 싸워달라』는 간곡한 훈시를 했어요. 「젱킨즈」군단장은 패잔병들이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수습돼 다시 전투를 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라면서 칭찬을 해줍디다.>
<대대병력이 80명밖에 안 남아>
▲김창욱씨(당시 9사단28연대1대대4중대=일등중사·현○사단근무·상사·43)
<우리 9사단은 백마고지 전투 후 하진부에서 야전훈련(FTC)을 받고 53년 여름 금화지구로 들어가 싸웠읍니다.
우리는 오대산과 금화를 공격, 탈환하고 나서 미군이 72번이나 공격타 실패한 저격병 능선에 이어지는 모택동 고지로 달라붙었어요. 금화시내는 적들이 후퇴하면서 학살한 양민들의 시체가 곳곳에 널려있더군요.
우리 1대 대장 김상옥 소령은 분대장급 이상을 집합시키더니 앞의 모택동 고지를 가리키면서 『이제부터 우리 대대가 공격한다』는 명령을 내립디다.
공격개시 1시간 반만에 고지를 탈환하고 나니까 김 소령은 사수명령을 내리데요.
워낙 돌산이라 야전삽으론 「벙커」를 도저히 팔 수가 없어 우리는 파괴된 산병호들을 간신히 보수해 방어진지를 구축했읍니다.
우리는 10여일 동안 이 고지를 둘러싸고 중공군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계속했는데 김상옥 대대장은 사병들이 모두 후퇴를 해도 고지에서 내려오지 않고 버티었어요.
11일만에 우리가 완전 점령을 했는데 81㎜ 박격포가 포신이 가열돼 포탄을 넣으면 그냥 터질 정도로 쏴댔었지요.
이 전투가 끝나고 나니까 대대병력이 80여 명 밖에 안 남았데요.>
◆주요일지(1952년7월9∼12일)
※9일▲논산 포로수용소서 소란, 24명 부상 ▲이 대통령, 서민호 사건 재심 명령
※10일▲국회 의장에 신익희씨, 부의장에 조봉암·윤치영씨 선출 ▲북경방송, 한국 휴전을 희망한다고 보도
※11일▲B-29, 북한 주요도시 맹폭
※12일▲평양방송, 「유엔」공군의 대폭격으로 주민 6천명이 사상했다고 비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즈」대장, 한국 향발
◆알림=「민족의 발언」 출판관계 문의는 을서문화사로. 전화는 (73)8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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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