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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26·끝> 홍콩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동방의 진주’ ‘쇼핑의 천당’ ‘아시아의 코스모폴리스’. 홍콩의 수식어는 다채롭다. 명(明)나라 때 향나무 중계무역항으로 출발했다. 향나무 향 가득한 항구라 샹강(香港)이란 이름이 붙었다. 홍콩은 샹강의 광둥(廣東)식 발음이다. 영국 통치 155년, 중국 회귀 16년이 지났다. 중국화가 한창인 국제도시 홍콩을 소개한다.



홍콩이 꼭 필요했던 중국, 해방 대신 반환 택했다

# 마거릿 대처와 홍콩



올해 4월 8일 마거릿 대처(1925~2013) 전 영국 총리가 타계했다. 중국인에게 대처는 덩샤오핑(鄧小平)과의 홍콩 담판으로 뇌리에 남았다. 대처는 생전에 여섯 차례 방중했다. 1982년 9월 22일. 대처 총리가 베이징을 찾았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막 승리한 뒤였다. 중국 정부와 홍콩의 미래를 논의하는 게 방문 목적이었다. 먼저 자오쯔양(趙紫陽) 총리를 만났다. 자오쯔양은 “홍콩 회귀에는 양대 원칙이 있다. 주권과 번영·안정이다. 양자택일을 하라면 중국은 주권을 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발언이었다. 24일 대처는 인민대회당에서 덩샤오핑 당시 공산당중앙고문위원회 주임을 만났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덩샤오핑을 ‘강철공장’이라고 불렀다. 대처의 별명은 ‘철낭자’다. 스틸(steel)과 아이언(iron)이 마주 앉았다. 회견은 2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대처는 3개 조약을 언급했다. 1842년 청(淸)이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割讓·영토를 아예 넘김)한 난징(南京)조약, 1860년 주룽(九龍)반도를 할양한 베이징(北京)조약, 1898년 맺은 ‘홍콩지계의 확장에 대한 협정(展拓香港界址專條)’이다. 1898년 협정은 홍콩 면적의 90%를 차지하는 신제(新界·Territories)를 1997년 6월 말까지 영국이 99년간 조차(租借·일시적으로 영토를 빌림)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따라서 영국은 법리적으로 신제를 제외한 홍콩섬과 주룽반도는 중국에 반환할 의무가 없었다. 대처는 이를 근거로 덩을 압박했다. 영국은 한 세기 반 동안 홍콩을 번영시킨 노하우를 갖고 있으며, 영국식 통치가 사라진다면 기업들이 홍콩을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주권은 돌려주더라도 통치는 계속하겠다는 외교적 표현이었다.



‘100만 불짜리 야경’으로 불리는 홍콩 빅토리아 하버의 ‘심포니 오브 라이트’. 매일 오후 8시 32개 빌딩이 레이저와 네온사인을 일제히 밝히는 장관을 연출한다. [사진 홍콩관광청]


 덩샤오핑은 150여 년 전 제국주의 기세에 눌렸던 리훙장(李鴻章)이 아니었다. 홍콩에 대한 입장은 단호했다. 세 가지를 말했다. ▶주권문제 ▶1997년 이후 중국이 어떤 관리 방식을 채택해 홍콩의 번영을 유지할 것인지 ▶중국과 영국 양국 정부가 97년까지 혼란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였다. 덩샤오핑은 강경한 어조를 이어갔다. “주권은 토론할 문제가 아니다. 97년 중국은 신제뿐만 아니라 홍콩섬·주룽반도를 모두 돌려받을 것이다. 만일 97년 홍콩을 돌려받지 못하면 중국 정부가 만청(晩淸)과 마찬가지며 중국 지도자는 리훙장임을 의미한다.…우리는 인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오랜 기간을 기다렸다. 15년 뒤 홍콩을 회수하지 못한다면 인민이 우리를 믿을 이유가 사라진다. 어떤 중국 정부라도 하야해야 한다. 다른 선택은 없다.…홍콩의 현행 정치·경제 제도, 대부분의 법률도 유지될 것이다. 홍콩은 여전히 자본주의를 실행할 것이다. 홍콩의 여론을 반영해 15년 동안 미래 정책을 수립할 것이다. 홍콩시민, 투자자, 영국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이다. 양국 정부가 우호적으로 협의해 나가기를 바란다. 영국 정부의 건의 역시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덩샤오핑 문선』 3권) 덩은 회담 중 타구(침 뱉는 그릇)를 자주 사용했다. 중국 외교가에서는 잘 알려진 그가 요점을 강조할 때 쓰는 제스처였다. 회담은 사실상 결렬됐다. 양국이 향후 논의를 계속한다고 얼버무린 알맹이 없는 공동성명만 나왔다.



 사단은 회담이 끝난 뒤 발생했다.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정신을 뺏긴 대처 총리가 인민대회당 앞 계단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뎠다. 그녀가 넘어지는 장면은 고스란히 TV카메라에 잡혔다. 이 장면은 반복해서 전파를 탔다. 홍콩 시민들은 불안했다. 이미지는 기억을 지배한다. 대처의 넘어지는 모습은 올해 그녀가 타계한 다음날에도 중국 신문에 다시 등장했다.



 대처가 베이징에서 만찬을 주재했지만 덩샤오핑은 참석하지 않았다. 마침 중국을 방문하고 있던 북한 김일성을 위한 만찬 참석이 이유였다. 자오쯔양 총리가 주빈석을 대신 차지했다. 베이징을 떠나기 전 대처는 BBC와 인터뷰에서 “만일 조약이나 계약의 일방이 ‘나는 동의할 수 없다. 파기하겠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들이 맺을 새로운 조약이 존중 받으리라 확신할 수 없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이처럼 홍콩 차이나의 출발은 불안했다. 대처가 베이징을 떠난 뒤 홍콩 주가는 1주일 새 25%나 폭락했다.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홍콩인들의 불안은 현실이 됐다.



# 중국과 영국의 오월동주



1982년 ‘강철공장’ 덩샤오핑과 ‘철낭자’ 마거릿 대처가 홍콩 반환을 둘러싼 설전(舌戰)을 벌이던 현장(사진 위). 1997년 7월 1일 0시 홍콩이양식 현장. 유니언잭과 오성홍기가 게양되고 있다(아래). [중앙포토]
 1997년 홍콩반환을 앞두고 민두기 전 서울대 교수가 본지에 기고문을 실었다. 중국이 홍콩을 능동적으로 ‘해방’시키는 대신 영국의 ‘반환’을 기다린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 영국에 대영제국의 식민지 경영은 이미 채산이 안 맞았다. 과거 조약을 끝까지 고집해 신제지역만 반환한다면 홍콩섬과 주룽반도는 자존능력이 없었다. 일괄 반환은 부득이했다”는 내용이다.



 중국은 노회한 게이머다. 항상 대의는 이익에 양보한다. 중국은 일찍이 홍콩을 ‘해방’시킬 기회가 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면서 마오쩌둥은 ‘매국(賣國) 조약을 없애겠다’고 공언해 왔던 터다. 인민해방군이 밀려 내려왔을 때 홍콩은 당연히 ‘해방’되어야 할 존재였다. 1949년 10월 단 한 명의 병사도 경계선을 넘지 않았다. 중국 내지에서 물과 식량도 여전히 홍콩에 공급됐다. 근거는 1949년 1월 당 중앙이 하달한 외교지침이었다. ‘원칙상 제국주의 국가가 중국에서 갖고 있는 특권은 반드시 취소돼야 하지만 집행단계에서 문제의 정황에 따라 사안별로 처리해야 한다. 아직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경우 잠정적으로 해결을 잠시 미루어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중국은 홍콩의 ‘해방’을 미뤘다. 1949년 영국은 파죽지세로 남하해 오는 해방군을 맞을 준비를 갖췄다. 5000명이던 홍콩 주둔군을 탱크부대를 포함 5만 명으로 증원했다. 마오가 영국군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려면 100만 명의 병력이 필요할 것으로 관측됐다. 영국의 기우(杞憂)였다. 영국은 1950년 1월 서방세계 최초로 공산정권을 승인했다. 중국과 영국의 오월동주(吳越同舟)가 시작됐다.



 중국은 미국의 봉쇄전략에 대처하기 위해 홍콩이 절실했다. 한국전쟁 중에도 홍콩을 통해 석유·화학제품·자동차 등이 대륙으로 흘러들어갔다. 『마오쩌둥의 사생활』에는 마오의 의약품 거의가 홍콩을 통해 유입된 상황이 그려져 있다. 중국은 매국 조약을 없애기 위해 홍콩의 ‘해방’ 대신 ‘반환’ 노선을 취했다. 홍콩은 그 사이 거대한 경제력을 갖췄다. 그 경제력도 중국에 절실했다. 대만 통일 전략인 ‘1국2체제’(一國兩制·한 나라에 두 가지 체제를 공존시킴)는 ‘해방’ 노선에서는 나올 수 없는, 홍콩 활용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나왔다. 이 전략은 덩샤오핑의 창작품이 아니다. 중국이 이를 덩샤오핑의 업적으로 선전하는 것은 정치적 의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근거는 많다. 1975년 5월 25일 마오쩌둥은 에드워드 히스 전 영국 총리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마오는 아직 홍콩 문제를 해결할 때가 아니라며 “이 문제는 젊은 동지들이 다룰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의 시선은 덩샤오핑을 향했다. 마카오도 근거다. 포르투갈은 1967년과 1974년 마카오의 반환을 제안했다. 베이징은 거부했다. ‘반환’에도 순서가 있었다. 마카오의 우선 반환은 홍콩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의 제안은 비밀에 부쳐졌다. 그만큼 중국의 ‘통일’ 전략은 폭이 장구하다.



# 천안문 사건과 홍콩 회귀



 1982년 대처와 일합에서 이긴 덩샤오핑은 전투가 아닌 전쟁에서의 승리를 원했다. 덩샤오핑은 용인(用人)에 능했다. 눈여겨 둔 개혁 성향의 쉬자툰(許家屯) 장쑤(江蘇)성 당서기를 떠올렸다. 1983년 설 연휴를 쉬자툰과 함께 보냈다. 홍콩 회귀 임무를 설명했다. 홍콩의 실력자를 선별해 베이징으로 보내도록 지시했다. 덩이 그들을 직접 만나겠다고 말했다. 쉬자툰의 홍콩에서의 직함은 신화(新華)통신 홍콩 분사 사장이었다. 베이징이 파견한 그림자 정부가 홍콩에 세워졌다. 홍콩에 도착한 쉬자툰은 베이징이 홍콩을 더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과학원의 학자들을 홍콩으로 초청했다. 쉬자툰은 미래 홍콩 차이나의 골간이 될 400여 명을 양성했다. 부임 3개월 뒤 쉬자툰은 베이징으로 잠시 돌아왔다. 자오쯔양 총리, 리셴녠(李先念) 국가주석에게 홍콩의 분위기를 보고했다. 베이징은 제국주의자들을 반대하는 홍콩인들이 베이징을 기다리고 있다는 보고를 기대했다. 쉬자툰은 불편한 진실을 말했다. 홍콩은 공산당을 믿지 않으며 암울한 미래를 걱정한다고 토로했다. 기업인은 영국식 행정과 법치를 존중하며 베이징이 펼칠 리더십을 의심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1949년 이후 넘어간 사람들은 절대 공산당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리셴녠은 “홍콩의 마음을 얻는 것이 베이징의 최우선 과제”라고 인정했다.



 영국과의 담판도 쉽지 않았다. 영국은 통치권을 계속 고집했다. 중국은 1984년 9월까지 합의가 안 되면 주권이양 계획을 일방적으로 발표하겠다고 위협했다. 담판은 컨센서스를 이끌지 못했다. 홍콩의 자본이 심하게 동요했다. 1984년 1월 8차 담판에서 양국은 협상 사령탑을 바꿨다. 중국은 저우난(周南) 외교부장조리, 영국은 리처드 에번스 신임 주중대사를 세웠다. 혈맥이 뚫렸다. 4월 제프리 하우 외무부 장관이 베이징을 찾았다. 영국이 주권문제를 양보했다. 문제는 일사천리로 풀렸다. 12월19일 자오쯔양 총리와 대처 총리가 베이징에서 다시 만났다. 합의문에 서명했다. 담판은 끝난 듯 보였다.



 1989년 6월 중국이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천안문 사건은 모든 협상을 뒤집었다. 중·영 밀월기가 끝났다. 홍콩의 쉬자툰이 1990년 1월 저우난으로 경질됐다. 겉으로는 은퇴였지만, 쉬가 암묵적으로 천안문 학생시위를 지지한 것이 경질 이유다. 중국에 환멸을 느낀 쉬자툰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영국 지배기 홍콩은 자유는 많고 민주는 적었다. 천안문 유혈 진압 뒤 영국의 목소리는 커졌다. 영국은 민주 공세를 퍼부었고 중국은 애국으로 맞섰다. 영국은 보수당 의장을 역임한 ‘강경파’ 크리스 패튼을 마지막 총독으로 임명했다. 패튼은 취임 후 파격적인 정치개혁안을 내놨다. 중·영 양국은 기존의 홍콩 입법국 의원이 홍콩특별행정구의 초대 입법회 의원으로 이어지는 ‘직통차(直通車, through train)’ 방안에 합의했었다. 패튼의 정치개혁안으로 직통차는 탈선했다. 기존 입법위원의 직권은 6월30일로 끝나고 중국은 7월1일 새로운 입법위원을 세웠다.



 홍콩 이양식의 하이라이트인 유니언 잭 하강과 오성홍기 게양은 정확히 7월 1일 자정에 거행됐다. 이날 홍콩에는 하루 온종일 큰비가 내렸다. 첸치천(錢其琛) 전 외교부총리는 “전세계 염황(炎黃·중국 전설 속의 염제와 황제) 자손은 이 큰비가 시원스럽게 내려 중국의 백 년 치욕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홍콩이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게 되기를 기원했으리라”고 회고했다.



※홍콩편을 끝으로 ‘중국 도시 이야기’를 마칩니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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