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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차림으로 보자기 찾아 쏘다니니 … 내 별명이 넝마주이

“자수박물관장으로서의 삶을 학점으로 매기자면 수집은 B, 조사는 B, 다만 전시는 국내외에서 100번이 넘게 했기에 감히 A학점을 주고 싶습니다. 해외 전시 때마다 벅찬 감동이 밀려왔는데 오늘도 그런 감동이 가슴에 꽉 차서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훌륭한 문화를 창조했고 그 영광을 제가 받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자료집을 더 발간해 다소나마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규방문화 글로벌 전도사,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장

11월 20일 오후 서울 남가좌동 명지대 방목학술정보관. 명예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소감을 말하는 허동화(87) 한국자수박물관장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30년 지기’라는 김동호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이 축사를 했다. “개인이 박물관을 운영한다는 것은 엄청난 자금과 노력과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우리 규방 문화를 해외에까지 알린 열정에 감복했습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문화인이라고 불러 드리고 싶습니다.”



식이 끝나고 내빈들의 축하 세례가 이어졌다. 윤장섭 성보문화재단 이사장,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유희영 전 서울시립미술관장, 신연균 재단법인 아름지기 이사장, 오윤선 호림박물관 관장 등이 담소를 나누며 허 관장의 수집인생 반백 년을 함께 반추했다.



팸플릿에 적힌 그의 이력을 보니 좀 독특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해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았다. 알고 보니 이날 화환을 보내온 윤성민 전 국방부 장관이 동기다. 1960~70년대 ‘복마전’이라 불리던 한국전력공사에서는 서슬 퍼런 감사까지 지냈다. 그런데 그 이후 행보의 시작이 자수연구소 소장이다. 과연 무엇이 그를 이 길로 이끈 것일까.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한국전력 감사가 하필 아낙네 문화인 자수와 보자기에 마음이 동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다들 ‘중성’이라 그렇다고들 해요. 하하. 원래 모으는 것을 좋아해 처음에는 도자기를 수집했어요. 그런데 돈이 없어서 금이 가거나 깨진 것만 모았지. 그러다가 60년대 어느 날 인사동을 갔다가 어떤 외국인이 화조 병풍을 하나 사가는 것을 보았어요. 문외한이던 내가 봐도 기가 막히게 예쁜 거라. 저렇게 외국으로 팔려가기 전에 내가 사서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첫 수집품은 어떤 것이었나요.

“아는 분 중에 민화 그리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 말씀이 인사동 어느 가게에 가면 궁중자수가 좋은 게 있는데 그걸 사오면 자기가 가진 걸 주겠다, 하더라고요. 그렇게 시작됐죠”



-좋은 물건을 구하는 비법이 있다면.

“뭘 사러 갈 때 좋은 옷을 입고 가면 절대 안 돼요. 항상 허름한 차림으로 인사동·장안평을 휘젓고 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내 별명이 ‘넝마주이’야. 비싸지도 않은 자수나 보자기만 찾고 다닌다면서. 거지인 줄 알고 500원 동냥을 받을 뻔한 적도 있다니까. 중요한 건 괜찮다 싶을 때 무조건 깎으면 안 돼요. 부르는 가격보다 조금 더 주면서 신뢰를 쌓으면 진짜 좋은 게 나왔을 때 나한테 먼저 오게 되거든.”



-보물 제 653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자수병풍 ‘자수사계분경도’는 국내 최고(最古)라고 하는데 어떻게 구했나요.

“원래 외국인에게 팔린 물건이었어요. 당시 내가 문화재 전문위원이었는데 ‘내가 본 이상 해외에 못 나간다’고 으름장을 놨죠. 며칠 뒤에 해약했다면서 구할 의향을 묻습디다. 이 작품이 중요한 이유는 고려시대에 이미 분재가 성행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에요. 일본이 꽃꽂이 문화를 자기 고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반박이거든.”



-사고 싶은 걸 못 사면 어떻게 됩니까.

“병이 나죠. 평생 잊어버리질 못해요. 교만한 생각에 실패한 것도 많아요. 자수 책가도 병풍 6폭짜리 2개-이걸 66병이라 해요-를 사서 오는데 갑자기 돈을 더 달래요. 그래서 ‘내가 아니면 누가 사겠나’ 하는 생각에 다시 돌려줬죠. 그 뒤로 소식이 없어. 아마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듯해요.””



-가격이 다른 골동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싸다 해도 자수 2000점, 보자기 1000점 등 3000점이 넘게 수집하려면 비용도 적지 않게 들어갔겠습니다.

“사람들이 날 보고 돈이 많다, 수완이 좋다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주위에서 도움 주신 분도 많고, 돈이 없어 외상으로도 많이 샀죠. 다 서울대 치대를 수석 졸업한 집사람 믿고 그런 거지. 집사람도 처음엔 반대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해외 전시가 계속 이어지면서 초청받고 외국 나가는 재미에 자기도 빠진 것 같아.”

옆에 있던 박영숙 여사가 “나이 들어 외롭지 않으려고 시작했는데 지금은 이것 때문에 더 바빠졌어요”라고 거든다.



35년간 11개국에서 54회 전시

지금까지 외국에서 한국의 자수와 보자기 문화를 알린 전시는 35년간 11개국에서 54회에 이른다. 누적 관람객은 무려 700만 명에 이른다는 것이 허 관장의 말이다. 개인 박물관의 업적으로서는 놀랄 만한 숫자다. 그 경비를 돈으로 환산하면 약 250억원에 달한다. 허 관장은 99% 초청을 받았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한다.



-해외 전시의 물꼬는 어떻게 텄습니까.

“어느 날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찾아오셨어요. 원래 말이 없는 분인데 보시더니 ‘이게 웬일이냐’ ‘이게 남아 있었느냐’고 아주 감탄을 하세요. 78년 6월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처음 초대전을 하게 됐고 이듬해 도쿄에 있는 한국문화원에서 첫 해외 전시를 시작했습니다.”



-외국 박물관에 따로 연락을 했나요.

“해외 전시는 내가 하고 싶어서 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평가를 해줘야 실현되는 것입니다. 한번 전시가 되면 박물관들끼리 정보를 교환하나 봐요. 유럽에서 특히 관심을 많이 보였어요. 영국 옥스퍼드대 애슈몰리언 박물관 전시는 옥스퍼드 상주인구가 20만인데 3만 명이 넘게 왔죠. 열 번 온 학생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가장 인상에 남는 해외전시는.

“99년 프랑스 니스에 동양박물관이 문을 열면서 개관전으로 우리 것을 전시했죠. 자기들이 성악가 조수미까지 초청해서 파티도 식물원에서 아주 크게 열어줬어요. 호주 시드니 파워하우스 박물관 전시는 너무 인기가 좋아서 3개월이 6개월로 늘어났죠. 당시 관장이 ‘이 전시가 끝나면 (조각보의 영향으로) 호주 디자인이 바뀔 것’이라고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왜 보자기에 그런 관심을 표했을까요.

“이게 처음엔 스카프인 줄 알아요. 그게 아니라는 점, 그리고 모양과 색채 감각에 놀라고 우리 규방 문화의 독특함에 관심을 갖더라고요. 무엇보다 현대미술로 보는 경향이 많아요. 몬드리안이나 클레의 추상회화를 조형적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능가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해외 전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해외에서 유명해져야 국내에서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얼핏 사대주의 같지만 결과를 보면 옳았다고 봅니다. 자수와 보자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0~20년에 불과하거든요. 그것도 외국 사람들이 좋다고 찾으니까 그렇게 된 것이죠.”



-자수는 우리만 있는 문화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만큼 자수를 좋아한 민족이 없어요. 나라에서 ‘너무 멋 내지 말라’며 자수를 금지하니까 안 보이게 옷 안쪽에 새겼을 정도라니까.”



-조각보가 뭐 그리 대단한가 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요.

“여성만의 품위 있는 문화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직 많죠. 남성 위주의 유교적 시각 때문에 그래요. 자수와 보자기를 놓고 보면 문화재적 가치는 자수에 더 있겠죠. 보자기는 사실상 버려졌으니까. 그런 보자기를 부각한 것이 제 공로라면 공로겠죠.”



-보자기의 어떤 점을 부각하고 싶으셨나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보자기를 보는 시각이 매우 감상적이에요. 흔히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합니다. 비참한 나날을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했던 여인네의 한을 부각한 문학의 영향이죠. 하지만 외국인들에게 그런 말을 하면 의아해해요. 희망도 없이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밝고 예쁜 것을 만들 수 있었겠느냐고 되묻거든요. 그래서 ‘눈물의 씨앗’은 이제 ‘기쁨의 씨앗’으로 바꿔야 합니다.”



보자기는 환경 문제의 대안

허 관장이 보자기를 강조하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환경 때문이다. 점점 심각해지는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도 중 하나가 보자기에 있다고 믿는다.



“고급 상품의 30%가 포장비라고 합니다. 한 번 쓰고 버리는 것들이죠. 화학물질로 만든 포장 비닐을 계속 쓰고 있습니다. 저는 지구 환경운동으로 보자기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보자기 문화는 세계로 확산해야 합니다. 우리가 앞장설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고 보니 ‘사전(絲田)’이라는 호가 자못 절묘하다. 젊어서 직접 지은 것이라고 했다. 평생 촌놈처럼 순박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담았다며.



그는 단순한 수집가의 차원을 넘어 창작자로서의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보자기 꽃이 핀 나무를 그리거나 쓸모 없는 옷감을 이용해 콜라주를 만들거나 낡은 농기구를 오브제로 삼은 작품을 통해 ‘환경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지도 오래다. 지난 9월 14일엔 미수(米壽)기념으로 작품집 『꽃밭에서-이렇게 좋은 날』을 제작하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과 부인이 입는 옷도 직접 디자인해서 만든다. 입고 있는 겉옷을 들어 보이며 “재료비 2만원에 제작 공임 7만5000원을 들인 9만5000원짜리”라고 자랑스러워했다.



-또 준비 중인 해외 전시는.

“내년 1월부터 3월까지 교토 고려미술관에서 55번째 해외 전시가 열립니다. 이 미술관에서만 세 번째 전시죠. 이번에는 주머니에 관한 내용을 추가합니다. 일본에는 자수와 보자기 애호가들이 10만 명 정도 되는데, 전시 때마다 높은 관심을 보여 줍니다. 그러니까 미술관에서도 저희를 3년마다 초청하는 거고요. 이게 바로 국가적 자산 아닌가요?”



-향후 계획은.

“저희 학예사가 최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 제안서를 보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돌출 행동이라 생각하겠지만 다 뿌리가 있고 맥락이 있는 일이죠. 자신감이 생겼다는 게 중요합니다.”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최정동 기자, 전호성 객원기자, 한국자수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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