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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아는 이사회가 세계 호령할 기업 만든다

근대 국가의 지배구조는 삼권분립 체제다. 주식회사의 지배구조도 매우 유사하다. CEO와 집행 임원이 행정부에 해당되며, 이사회와 감사위원회는 각각 입법부와 사법부의 기능을 한다.

맨 얼굴의 경제 ⑥ 이사회는 거수인가, 파수꾼인가

한때 우리가 감사위원회를 두지 않고 감사 1인의 독임체제로 운영했던 것은 일본이 변형시켰던 제도를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외이사를 중심으로 감사위원회를 구성할 뿐 아니라 그 자격과 선임 과정을 별도로 정해 놓음으로써 국제적 정합성을 갖추게 됐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서인도회사나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자본과 인력, 물자의 동원을 극대화해 패권국가로 나서는 기반이 되었던 것처럼 주식회사 제도의 활용 능력은 오늘날 국가 경쟁력의 주요한 원천이 되고 있다.
자본·노동·경영·기술 등 기업 활동의 제반 요소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거대한 동력을 만들어 내는 제도. 혈연·지연·학연을 떠나 투명성(transparency)과 책임성(accountability)의 바탕 위에 하나가 될 수 있는 신뢰를 구축하는 시스템이 바로 주식회사다.

주식회사 제도, 혈연인간 본성 극복
삼국지에서 유비관우·장비가 도원결의를 할 때 형제의 의를 맺는다. 혈연을 의제해 신뢰를 구축한 것이다. 영화에서 조폭들은 실제 자신들의 피를 섞어서 나눠 마신다. 이처럼 혈연과 같은 신뢰를 구축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그 이상을 이룰 수 있어야 최고를 바라볼 수 있다. 오늘날 세계적인 회사들은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이들이 계약으로 만난 조직이다. 동양인이 서구인에 비해 혈연이나 지연에 쉬 휘둘린다고 하지만 영화대부를 보면 이탈리아 사람들도 ‘패밀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이탈리아는 국력에 비해 세계적 규모의 기업이 적다. 앵글로 색슨이 대서양 양안에서 세계 주도 세력으로 나설 수 있었던 이유를 인간 본성을 극복하고 주식회사 제도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대규모 기업은 재벌이거나 공기업이었다. 재벌 기업의 수장은 세습되고, 공기업의 수장은 정부 또는 대통령이 임명한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서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봉건시대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국민소득 2만 달러대에 갇혀 있는 한국이 다시 도약하기 위해 주식회사, 특히 그 지배구조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확산되어야 한다. 삼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누가 물으면 그만한 기업이 한국에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되려면 창업자의 자녀가 아니면서, 정부와의 관련이 깊은 것도 아니지만 오직 전문성과 경영능력을 기반으로 한국 유수의 기업 CEO를 맡는 사례가 자주 나와야 한다.
글로벌 시대에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이 되려면 우선 국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거액의 자본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지배적 지분만을 기반으로 소유 경영에 나서야 한다면 한국은 경쟁력 있는 기업을 키워낼 수 없어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없다.

주식회사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통해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그 핵심은 기업지배구조이고, 요체는 주주로부터 경영권을 위임받은 이사회의 운영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우리가 자주 듣는 몇 가지 명제들의 진위를 따져보자. 한국 재벌의 총수는 지분이 얼마 되지 않으면서 마치 주식을 다 가진 양 경영권을 행사한다는 비난이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대기업 총수 가운데 지배 지분을 가진 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는 창업자이지만 회사가 커지면서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지분이 0.5% 및 4.5%로 떨어졌다. 우리의 문제는 적은 지분으로 경영권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지분과 관계없이 대기업을 경영할 인재를 많이 키워내지 못했거나 또는 그런 풍토를 만들지 못한 데 있다.
 
“유능한 CEO가 오래 하는 것은 축복”
그 사람은 오너도 아니면서 회장을 왜 그렇게 오래 하느냐는 말을 흔히 듣는다. 하지만 위대한 업적을 남긴 CEO는 한결같이 재임기간이 길었다. GE의 잭 웰치는 20년간 CEO의 자리에 있었으며, MBA코스에서 모범 사례로 다루는 워크아웃, 6시그마 등은 모두 그의 임기 후반 10년 동안에 이룬 성과다. 그는 후임이 오래 CEO를 할 수 있도록 40대의 제프 이멜트를 천거했다. 무능한 사람이 CEO가 되는 것이 문제이지 유능한 사람이 오래 하는 것은 오히려 축복이다.

경쟁이 격화되고 기술 주기가 짧아지면서 세계적으로 CEO의 재임기간도 단축되고 있다. 컨설팅회사 부즈 앨런 해밀턴의 자료에 의하면 1995년에는 CEO의 평균 재임 기간이 9.5년이었으나 2005년에는 7.6년으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다섯 명 중 두 명이 18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하지만 세계 유수기업의 이사회는 여전히 적어도 10번 이상 재임할 수 있는 인물을 CEO로 선임하고자 애쓴다. 그래서 성공하면 10년 이상 재임하니까 평균이 7년 이상 되는 것이다. 3년씩 두 번이면 족하다는 우리와는 인식이 크게 다르다. CEO는 좋은 자리니까 여럿이 나눠서 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 있는 이만 해야 한다.

이러한 CEO가 있다면 이사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이사회는 거수기인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기록상의 반대가 적다고 해서 거수기 역할만 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사회가 사전에 활발한 토론을 통해 안건을 수정하기도 하고, 일단 보류했다가 다음에 보완해서 통과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이사회가 왕성하게 활동하는 회사의 경우에도 부결은 물론 반대도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선진국 이사회엔 경영진 출신 다수
이사회는 파수꾼인가. 그 이상이다. 호밀밭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기름지게 해야 한다. 이사회는 경영의 최고 의사를 결정할 뿐 아니라 경영권을 창출한다. CEO로 하여금 후계자를 양성하도록 독려하면서 잠재 후보를 유심히 살펴보고, 부득이할 경우 현 CEO의 퇴진을 요구하며, 후계자를 주주총회에 천거하는 막중한 임무를 담당한다. 그래서 CEO나 대주주에 대해 소신 있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사외이사를 중심으로 이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국제적 상례가 되었다.

이사회 안건의 상당수는 법규에 따른 의례적인 것이지만 더러 중차대한 의사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이때 경영진에 대해 ‘제안대로 하면 문제가 없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아마추어다. 경영의 문제에는 대개 정답이 없다. 지금 회사가 딛고 있는 땅은 꺼지고 있다. 정면을 바라보니 절벽이고, 오른쪽으로 가려니 물을 건너갈 배가 없는 데다 왼쪽에는 호랑이가 버티고 있는 딜레마의 상황, 즉 ‘진퇴유곡’에서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바로 경영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코닥은 디지털 기술을 가지고도 필름에 집착하다 망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쉽고 안전한 길은 없을 것이다. 이때 경영진과 함께 힘든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권위를 실어주는 것이 이사회의 역할이다. 그래서 선진국의 이사회는 경영 경험이 풍부한 이로 구성된다.

<그림>에서 보면 한국의 경우 금융그룹 사외이사 중 금융권 경영진 출신이 7%, 비금융권 경영진 출신이 30%에 불과하고, 학계 및 관료 출신이 33% 및 30%에 달한다. 하지만 주요 선진국의 경우 경영진 출신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한다.

CEO와 이사회 의장은 분리되어야 하는가? 한때 우리는 민주주의를 하려면 대통령제가 좋은지, 내각책임제가 좋은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었다. 지금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다. 제도가 관건이 아니라 국민 수준의 문제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돈도 많고 인재도 많지만 세계를 호령할 기업이 부족하다. 회계 제도도 선진화했고 자본시장도 남 못지않다. 훌륭한 경영자도 많이 배출했다. 주식회사를 발전시킬 수 있는 진취적인 기업지배구조가 남은 관건이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이제 올바른 요구를 해야 한다. 아니면 침묵하든가.



최범수 예일대 경제학 박사. 전 KDI 연구위원.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자문관으로 금융 구조조정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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