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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끝이 없다면, 우리 존재도 끝이 없을 테니까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는 사이렌들.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의 1891년 작품. [사진 위키피디아]
기원전 5세기 ‘항해자 하노’는 고향 카르타고를 떠나 머나먼 서쪽으로 향한다. 페니키아에서 추방당한 여왕 디도(Dido)가 건국했다는 카르타고. 가나안의 도시 티레(Tyre)를 떠나 험한 지중해를 건너온 디도.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진 북아프리카 왕 히아바스는 소가죽 하나로 덮을 수 있는 만큼의 땅을 선물하겠다고 한다. 디도는 가죽을 가늘게 잘라 언덕 전체를 둘러싸게 해 카르타고를 설립할 수 있었다. 먼 고향을 등지고 온 자들이 개척한 곳이기에 한 곳에만 머물지 못했던 것일까? 카르타고인들은 북아프리카 해안을 장악한 고대 최고의 해상 무역 제국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하노는 여전히 궁금했다. 북아프리카 서쪽 해안에 우뚝 선 ‘헤라클레스의 기둥’. 고대인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스페인과 아프리카 사이의 좁은 해협. 정말 그 기둥을 넘으면 아무것도 없을까? 어떻게 세상에 끝이 있을 수 있을까? 산보다 높은 파도를 넘어,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디며 하노의 원정대는 오늘날 카메룬 근처 중앙아프리카까지 도착한다.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것이다.

김대식의 'Big Questions' <17> 인간은 왜 미지의 땅을 찾아가나

자신의 책 『대항해(Periplus)』에서 하노는 이렇게 말한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쑥 들어가 있는 곳엔 섬이 있고, 섬 안엔 호수, 그리고 또 하나의 섬이 있다. 그 섬엔 매우 거칠고 긴 털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들은 그들 중 ‘남자만큼이나 거칠고 털이 많은 여자’들을 ‘고릴라이(Gorillai)’라고 불렀다.”

새 세상 발견한 하노와 에릭
로마제국 멸망 후 혼돈과 미개의 세상으로 퇴보한 북유럽을 장악했던 바이킹들. 노르망디, 영국과 스코틀랜드, 그리고 이탈리아 시실리를 정복한 노르스(Norse)인들이 자랑스럽게 “비킹그르(바이킹)”라고 불렀던 탐험대원들은 서쪽세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헤라클레스의 기둥 서쪽엔 어떤 왕국들이 있을까? 얼마나 많은 금과 노예와 아름다운 여자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눈 하나뿐인 키클롭스, 당나귀 귀를 가진 괴물, 발이 하나뿐인 거인들이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대서양을 지나면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헤라클레스 기둥 서쪽 대서양은 암흑의 바다뿐인 듯했다. 결국 바이킹들은 헤라클레스의 기둥 대신 스코틀랜드 서쪽 바다를 탐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원후 8세기 그들은 드디어 북대서양 한복판 아이슬란드를 발견한다. 그보다 200년 후 고향 노르웨이에서 살인죄로 아이슬란드로 추방된 에릭 토르발드손(기원후 950~1020)은 절망에 빠진다. 아이슬란드는 이미 개척되었고, 더 이상의 모험은 없었기 때문이다.

노르스인 남자로 태어났으면 새로운 땅을 정복하고 용의 목을 베어 ‘스칼드(skald)와 에다(Edda)’ 같은 전설에 자신의 모험담을 실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영웅인 자신의 모험담을 후손들이 노래해야 에릭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잊히지 않아야만 영원히 살 수 있다. 영원히 살 수 없다면 숨쉬기를 멈추는 순간, 늙어 떨리는 손으로 더 이상 무거운 방패와 긴 칼을 잡을 수 없는 순간, 나 에릭 토르발드손은 사라져버리는 거 아닌가? 에릭은 아이슬란드보다 더 서쪽 나라를 찾아보기로 결정한다.

북대서양은 무서운 바다다. 나약한 자와 두려움을 허락하지 않는다. 겨우 40명 정도가 탈 수 있는 바이킹들의 배 ‘스네크야(Snekkja)’. 길이 20m, 폭 3m도 안 되는 보잘것없는 작은 배였지만 ‘스네크야’엔 큰 비밀이 하나 있었다. 다른 배들과는 달리 앞과 뒤의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북대서양 바다에 떠다니는 빙산을 피하기 위해 배를 어렵게 돌릴 필요 없이 노를 거꾸로 젓기만 하면 된다. 에릭은 이렇게 거대한 빙산을 피해 살인적 추위와 얼음을 견뎌내며 거대한 육지를 발견한다. 아무리 잘나 봐야 ‘얼음의 섬’일 뿐인 아이슬란드보다 자신이 발견한 땅이 얼마나 더 멋지고 훌륭한지를 강조하려 했던 것일까? 에릭은 발견한 섬을 ‘그뢴란드(그린란드)’, 그러니까 ‘푸른 나라’라고 부른다.

유럽 중세기인들이 상상하던 먼 나라 괴물들. 뉘른베르크 연대기(1493).
인간은 왜 먼 곳으로 떠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황금과 명예만을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모험과 탐험은 위험하다. 비행기, GPS, 고어텍스 옷을 가진 오늘날도 그렇지만, 눈 하나, 발 하나 가진 괴물들을 두려워했던 고대인들에게 모험은 사실 자살행위였다. 어쩌면 황금과 명예는 안전한 고향과 따뜻한 연인의 품을 등지고 떠나는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자기 최면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한없이 먼 곳을 그리워하게 하는 것일까?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은 대부분의 문화에 공통으로 존재한다. 자라는 뇌엔 ‘결정적 시기’가 있다. 그 시기 동안 뇌는 젖은 찰흙 같아 경험을 통해 구조가 완성된다. 결국 아이슬란드에서 성장한 뇌는 아이슬란드에 최적화된 뇌를 가지고, 카르타고에서 자란 뇌는 카르타고에 최적화된 뇌를 가지게 된다. 고향이란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희망을 만든 원인 바로 그 자체다. 그런 곳을 그리워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익숙한 ‘이곳’이 아니라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은 다르다. 독일어엔 고향을 그리워하는 ‘하임베(Heimweh)’와 반대로 먼 곳을 그리워하는 ‘페른베(Fernweh)’, 그러니까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이란 단어가 있다. 알지도 못하고 익숙하지도 않은 그 먼 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신화학자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은 “인류의 모든 전설과 신화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집트 신 오시리스는 동생 세트에 살해돼 저승을 헤매다 누이이자 아내인 이시스의 도움으로 다시 부활한다. 우르 제국의 왕 길가메쉬는 괴물 훔바바를 죽이고 불사신이 되기 위해 우트나피시팀을 만난다. 영생은 얻지 못하지만 삶과 죽음의 비밀을 이해한 길가메쉬는 고향 우룩으로 돌아온다. 10년 동안의 트로이전쟁에서 드디어 승리한 오디세우스는 또다시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다. 인육을 먹는 키클롭스의 눈을 멀게 하고, 돼지로 변한 부하들을 구하고, 유혹하는 사이렌들의 노래를 견뎌내며 고향 이타카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하지만 20년 전 떠난 오디세우스가 아니었다. 아내 페넬로페마저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은하 제국군들에 양부모를 잃은 루크 스카이워커는 반란군에 가입한다. 혜성 안에 사는 괴물과 거대한 4족 로봇들을 물리친 스카이워커는 제다이 기사가 되어 시스들의 황제를 죽이고 공화국을 재건한다. 하지만 스카이워커 역시 변하고, 원수라고 생각했던 다스 베이더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허블 천체망원경으로 촬영한 ‘창조의 기둥’(큰 그림). Pioneer 10호와 11호에 실려 우주로 보내진 지구인들의 메시지(작은 그림).
파이어니어 10·11호의 메시지
떠나는 자에겐 늘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유 없이 떠나는 사람은 없다. 그게 헤어짐이다. 그리고 예전 자신의 세상과 이별한 자에겐 도전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성숙이다. 그리고 떠나 성숙한 자는 다시 익숙한 세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자는 더 이상 떠난 자가 아니다. 그게 바로 귀향이다. 캠벨은 이렇게 인류의 모든 스토리들은 헤어짐, 성숙, 그리고 귀향으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했다. 헤어지고, 변하고, 다시 귀향함이야말로 인류 공통의 ‘단일신화(Monomyth)’라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떠나는 진정한 이유는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다. 깨달음을 얻어 돌아올 수 있고, 황금과 명예를 얻어 귀향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의 비밀을 이해할 수도 있고, 존재의 비밀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에는 돌아올 수 없는 ‘특이한 헤어짐’이 있어 보인다.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그 다음’이 없는 끝이다.

존재하는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키클롭스도, 사이렌도, 요괴도 아니다. 바로 ‘끝’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써져 있는 ‘끝’, ‘The End’는 물론 진정한 끝이 아니다. 영화가 끝나도 불이 켜지고 인생은 계속된다. 존재하는 동안 ‘끝’이란 없다. 모든 ‘끝’은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만은 달라 보인다. ‘그 다음’이 불가능한 ‘끝’ 인 듯하다. 그래서 인간은 모험과 탐험을 통해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하노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끝이 아니길 바랐고, 에릭은 아이슬란드가 세상의 끝이 아니라 생각했다. 이미 이곳이 세상의 끝이라면, ‘다음’이 없는 ‘끝’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무섭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세상은 끝이 없어야 하고, 그렇기에 우리들의 존재도 끝이 없다. ‘죽음’이라는 ‘끝’은 허상이며, 하노와 에릭이 금과, 은과, 신기한 동물들을 잔뜩 싣고 고향으로 돌아왔듯, 죽은 자 역시 언젠간 더 빛나고 더 찬란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태양계를 떠나 머나먼 우주를 향해 가고 있는 미 항공우주국(NASA) 탐험선 ‘파이어니어(Pioneer)’ 10·11호엔 지구인들의 메시지가 실려 있다. 태양에서 세 번째 행성 ‘지구’에서 왔다는. 남자와 여자가 존재한다고. 수소가 지구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라고. 그리고 남자는 오른손을 들어 인사한다. 우리는 먼 곳에서 왔고 친선을 원한다고. 아직 우리 외엔 지각 있는 그 어느 존재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우리는 외롭다고. ‘파이어니어’의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오래된 인류 공통의 단일신화를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는 확신하게 된다. 우주엔 끝이 없으며 모든 끝은 또 다른 새로움의 시작이라는. ‘그 다음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끝은 있을 수 없다고.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했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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