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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나무들

매년 찬바람 부는 초겨울이 되면 가을걷이를 한 좋은 쌀 한 가마를 시주했다는 불심 깊은 신도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그해에도 20리 길 절에 쌀을 공양하러 등짐을 지게에 지었다. 새벽부터 집을 나서 조그마한 개울을 건너는데, 징검다리가 놓여 있어 발을 디딜 때마다 다리에 힘을 줘야 했다.

거의 다 건너갈 무렵 자기도 모르게 방귀가 나왔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혼자 고민을 했다. 부처님께 올릴 공양미를 방귀 냄새로 오염시켰으니 양심상 도저히 ‘기도 정성미’라며 절에 갖다 드릴 수가 없었다. 결국 집으로 돌아와 다른 쌀로 바꿔 먼 길을 다시 걸어 절에 공양했다고 한다. 그는 추수한 뒤 감사하는 마음에서 온갖 정성으로 가장 좋은 쌀을 골라 시주를 했을 것이다. 이처럼 삶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끝없는 정성이다.

마음으로 정성을 가득 채우는 것은 자신에 대한 힐링도 된다. 자신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참다운 기도다. 우리는 다들 진지하게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래도 실수하고, 기대에 못 미치는 삶이 거듭되면서 무기력해지기도 하고, 헛발질 한 인생을 산 듯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학창 시절 어느 책에서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이제 나이가 조금 들고 보니 가을엔 정말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인들이 시로 세상사를 말하지 않아도 자연은 적막하게 낙엽을 잠재우고 있다. 산과 들에 다니던 다람쥐나 야생동물도 서서히 겨울살림 준비를 한다. 수행자들도 옷 벗은 겨울나무들처럼 마음 비우는 공부를 한다. 비우고 내려놓는 달이 12월이다. 그리고 한 해 동안 내 안에 파고든 얼룩진 상처들도 아무는 달이다.

인연으로 맺어진 인간관계, 그중엔 어쩔 수 없이 맺어진 삶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나이 들어 서로 마음이 안 맞아 헤어지는 사람이 많다는 소식이 눈에 띄었다. 삶은 끝없는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이다. 인연이 다해 헤어지는 것은 많은 상처를 동반한다.

언젠가 사찰에서 밥을 한 끼 얻어먹은 적이 있었다. 그때 함께한 스님이 말했다. “혹시 ‘정통’을 아십니까.” 생전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정통(淨桶)은 깨끗할 정에 그릇 통, 절에서 화장실(해우소)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직책이 바로 ‘정통’이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땐 같이 먹으며 즐거움을 나누지만 배변은 같이하지 않는다. 깨끗하고 더러운 것에 대한 인식이 우리 마음에 들어앉아 있기 때문일 게다. 그 스님이 말했다. “중은 호불호를 가리지 않아야 진짜 중입니다. 얻어먹고 시주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좋은 것, 더러운 것 가리겠습니까. 그 정신만 살아 있으면 중노릇은 참으로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스승은 이런 말씀을 주셨다. “남 꼴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꼴을 보는 게 큰 공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려놓는 것, ‘사람 꼴 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게 우리네 인생이다.

어느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버려야 할 것이/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나를 내려놓으면 주위는 편안해진다. 창가에 앙상한 가지로 서성이는 은행나무, 안타깝지만 화려한 잎들을 찬바람 속에 모두 내려놓았다. 값진 것일수록 내려놓는 게 마음공부 하는 데는 제일이다. 애착은 집착이 되어 나도 모르게 마음을 상처 내는 독약이 될 수 있다.



정은광 원광대학교 미술관 학예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수행과 선그림(禪畵)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마음을 소유하지 마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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