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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솔직히 내 딸이 부럽다

수능 성적이 발표되었다. 성적이 잘 나온 집은 축제 분위기, 잘 안 나온 집은 그야말로 초상집이다. 아이는 울고 불며 난리를 치고, 부모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수능 성적표 한 장에 아이의 전 인생이 걸려 있는 듯하다. 그런데 나는 이런 상황이 마치 남의 나라 얘기 같다. 나도 고등학생 딸을 둔 학부모인데 말이다. 마흔에 낳은 늦둥이 딸이 내년이면 고3이 된다. 우리 딸은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대안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때 아이가 더 이상 대안학교를 다니지 않겠다고 했다. 자기에게는 주입식 교육이 더 맞는다는 거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느라 또래 아이들보다 1년 늦게 고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는 처음엔 그럭저럭 학교 공부에 신경을 쓰는 듯했다. 한동안 화학·물리에 꽂혀 밤새워 공부하기도 하고, 반 친구들에 비해 학력이 엄청나게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대안학교에서 느긋하게 보낸 시간들을 아까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몇 개월 전, 아이가 폭탄선언을 했다.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것이다. 자기는 대학에 갈 생각이 없고, 따라서 굳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거였다. 이 말에 나는 사람의 일생에서 대학생활은 값진 경험이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대학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때 아이가 대뜸 “행복한 삶이 뭐예요?”라고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서른 살쯤 되었을 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기 밥벌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는 “아, 나 그거 자신 있어요”라면서 요즘 자기가 열중하고 있는 분야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생소한 분야라 솔직히 그게 얼마나 현실성 있는 계획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확실한 것은 내 딸이 좋아하는 일을 찾았고, 그것에 열정을 바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 입장에서 보자면 학교는 그 열정을 펼치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 미래의 목표를 위해 이것저것 배워야 할 것도 많고, 처리해야 할 업무(?)도 산더미 같은데 왜 학교에서 원하지 않는 것을 배우며 시간 낭비를 하느냐는 것이다. 나는 아이의 이런 생각에 일정 부분 공감하지만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물론 교우 관계를 비롯한 학교생활 경험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설득하는 일은 남편이 맡았다. 남편은 되돌릴 수 없는 일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대학에 갈 생각이 없지만 나중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데, 그때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면서 입시준비를 안 해도 좋으니 일단 학교는 다니는 것으로 하자고 했다. 이 말에 아이가 수긍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입시생이 있는 집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 같다는 말을 들었다. 시험 기간이 되면 엄마가 외출을 삼가고 집안 전체가 비상사태에 돌입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그런 풍경을 볼 수 없다. 지난번에 아이가 좋아하는 모차르트 ‘레퀴엠’ 연주회가 있었는데, 마침 시험 기간이었다. 나는 시험은 늘 보는 것이지만 ‘레퀴엠’을 들을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라며 아이를 데리고 연주회에 갔었다. 이 말을 듣고 주변에서 학부모가 맞느냐고 난리다.

겉으로는 느긋한 척하지만 사실 나도 부모로서 마냥 속이 편한 것만은 아니다. 자기는 대학 나온 주제에 아이 앞에서는 대학에 초연한 척하는 것도 어찌 보면 일종의 위선이고 만용인지 모른다. 솔직히 이 사회에서 학벌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 역시 다른 집 자식이 좋은 대학 들어갔다고 하면 부러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억지로 되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싫다는 아이를 붙들고 닦달해 가며 감정적·육체적 에너지를 소진할 자신이 없다. 그것은 아이나 부모 모두 못할 짓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행복한 청소년기를 보낼 권리가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런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 아이가 솔직히 부럽다.

물론 한편으로 내가 과연 부모로서 잘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도 많다. 인생은 반복도, 변주도 없는데 미래를 위해 치열하게 보내야 할 청소년기를 너무 자유롭게 보내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다. 부모로서 나의 소망은 단 한 가지. 지금 아이가 ‘치열하게’ 즐기는 그 일 속에서 부디 미래의 행복도 찾고, 밥벌이도 찾기를 바랄 뿐이다.



진회숙 서울시향 월간지 SPO의 편집장을 지냈다.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공부하기 등에서 클래식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클래식 오딧세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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