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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없는 ‘나머지’가 된 청춘들의 씁쓸한 자화상

영화 ‘잉투기’(사진 왼쪽)와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의 한 장면. 영화는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남겨진 ‘잉여’라고 여기는 청춘의 모습을 각각 담고 있다. [사진 프레인글로벌·아담스페이스]




청년실업이 낳은 문화 코드 ‘잉여세대’

잉여(剩餘)

1. 쓰고 난 후 남은 것. ‘나머지’로 순화.

2. <수학> ‘나머지’의 전 용어.

유의어:여분, 흑자, 찌꺼기



  국어사전은 ‘잉여’를 이렇게 정의한다.



  잉여는 남은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만들어져 지금은 없어도 되지만 잉여는 지속가능성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잉여는 ‘남아도는 인생’ ‘낭비하는 청춘’쯤으로 해석된다. 사회에서 어떤 역할도 못하고,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잉여는 ‘88만원 세대’ ‘삼포세대(연애·결혼·출산을 포기했다는 의미)’를 뒤잇는 청춘의 동의어가 돼 버렸다.



 마침 대중문화계에선 잉여를 내세운 콘텐트가 줄지어 나오고 있다. 영화 ‘잉투기’와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이 지난달 개봉했고 ‘잉여도감’이란 웹툰도 연재 중이다. 잡지 ‘월간 잉여’가 1000여 명의 독자를 유지하면서 격월로 나오고 『잉여사회』 『속물과 잉여』 등 신간은 인문사회학자들의 잉여 분석을 담고 있다.



남아도는 인생 … 낭비하는 청춘

영화 ‘잉투기’는 ‘잉여들의 격투기’라는 의미인 동시에 ‘ing+투기’를 뜻한다. ‘우리는 싸우고 있다’는 말이다. 2011년 디시인사이드 격투갤러리에서 시작된 아마추어 격투대회의 이름이기도 하다. 격투기 커뮤니티의 라이벌에게 현피(온라인에서 싸우던 게이머가 실제로 만나 싸우는 것)를 당한 백수, 먹방으로 욕구 불만을 해소하는 왕따 여고생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꿈과 목표도 없이 인터넷 세상에서 머무는 ‘찌질한 청춘’의 분투기는 웃긴데 슬프다. 반면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발랄하고 경쾌하다. 게을러 터져서 밥도 침대 위에서 먹는 영화학도 4명은 학교를 관두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유럽으로 떠난다. 이들은 나름 꿈이 있다. 숙박업소 홍보 영상을 찍어 주고 숙식을 제공받아 1년 동안 유럽여행을 하고 가수를 발굴해 뮤직비디오를 찍은 뒤 이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잉여들이 “물물교환으로 유럽에서 무한대로 먹겠다”는 다소 황당한 목표를 향해 발걸음을 뗀 것이다.



 ‘잉투기’의 주인공인 백수와 왕따는 잉여와 제법 어울리지만 대학생인 후자는 그다지 잉여스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더 이상 대학생이라는 신분은 잉여와 비(非)잉여를 가르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 2004년 개봉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나오는 대사, “너 대학 못 가면 뭔 줄 알아? 잉여인간이야… 인간 떨거지 되는 거야”는 적용되지 않는 셈이다.



 ‘잉여탐구생활’이란 부제가 붙은 책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저자 한윤형씨는 “우리 사회의 경제구조 변동이 대학생을 포함한 청춘 전반에 잉여와 관련된 정서를 퍼뜨렸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대학생들은 고등학생 때보다 더욱 치열한 경쟁 공간에 노출됐지만 ‘자리’의 숫자는 줄어만 간다. 멀쩡하게 학교를 다니면서 스펙을 쌓기 위해 노력해도 취업이나 입시에 실패하면 잉여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지난해 2월 창간한 잉여에 의한, 잉여를 위한 잡지, ‘월간 잉여(사진)’엔 이런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잡지를 만든 최서윤(27)씨는 언론사 시험에 낙방한 뒤 아예 잡지를 만들었다. 그는 “(낙방 후) 구직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한 내가 바로 잉여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잡지에 투고한 잉여 중엔 명문대를 나왔지만 고시에 거듭 떨어진 ‘신림의 고시잉여’, 졸업생 수보다 적은 초등교사를 뽑는 탓에 교사가 되지 못한 ‘교대 나온 잉여’가 있다. ‘잉투기’의 엄태화(32) 감독도 “친구들이 취직하고 애도 낳고 부모님께 용돈 드리는데,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 일을 하면서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기성세대가 말하는 생산적인 일을 못한 것이 스스로를 잉여로 느끼게 했다는 얘기다.



 최근 잉여가 문화코드로 자리 잡은 것도 이렇게 너나없이 잉여가 돼 버렸기 때문이다.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의 이호재(27) 감독은 “잉여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소위 비주류인 잉여가 다수가 됐다. 앓고 있던 것들을 해소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다”고 말했다.



 잉여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취업이다. 하지만 “학창 시절 내내 학점 관리, 각종 자격증 취득, 봉사활동, 토플·토익 성적표, 어학연수 등 취업을 위해 대학생이 준비해야 할 모든 것을 외면하고 살아도, 그것들에 두루 신경을 쓰며 살아도 취업이 안 되기는 매한가지(『속물과 잉여』)”다. 그러자 스스로 잉여라 자조하면서 달관해 버리는 이들이 늘었다. 이들은 냉소하면서 자신들만의 유희를 만들었다. 특히 인터넷 세계를 만난 잉여는 새로운 문화현상을 낳았다.



잉여짓과 잉여력 그리고 ‘병맛’

잉여라는 단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파생어들이 생겨났다. ‘잉여롭다’ ‘잉여스럽다’ ‘잉여력’ ‘잉여짓’ 같은 것들이다. 이 중 ‘잉여력’과 ‘잉여짓’은 인터넷에서 ‘병맛’과 짝을 이룬다. ‘병신 같은 맛’에서 나온 이 ‘병맛’은 매우 복합적이고 미묘한 의미를 갖는다. 맥락 없이 함량은 떨어지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야말로 ‘병신’ 같지만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고 오묘한 매력이 있는 대상에 “병맛이 쩐다”고 한다.



 엉덩국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웹툰작가 김영택(19)씨는 병맛 만화를 그린다. 그는 현재 티스토어에 웹툰 ‘잉여도감’을 연재하는데, 별 내용이랄 것도 없이 대충 그린 것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는 만화 속에서 “전 인생을 낭비하면서 살아서 이렇다 할 스펙이 없구요…” “난 시작부터 퇴물이었지롱~”이라고 말한다. 대학교 1학년인 그가 수업 안 빠지고 학교 다니면 충분한 것 아닌가 싶지만, 그는 “대학 다닌다고 인생 열심히 사는 건 아니잖아요”라고 되묻는다. 그는 친구들 역시 “스펙을 쌓지 않는 것은 허송세월이고, 잉여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김씨는 “중학교 때부터 게임을 하고 만화를 그리다가, 어쩌다 웹툰을 그리게 됐다”고 한다. 잉여짓이 그를 작가로 만든 셈이다.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역시 수업시간에 패션잡지를 보고, 편집실에서 게임하던 ‘잉여짓’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한윤형씨는 “인터넷 시대에 창작의 문턱은 낮아졌다. 지금의 잉여가 향후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인터넷 세계엔 ‘잉여력 쩌는’ 콘텐트가 넘친다. 엄태화 감독은 “디시인사이드의 합필갤(이미지·동영상 합성 갤러리)에 올라온 작품을 보면, 이 사람들이 영화를 안 하는 게 너무 다행이다 싶다”고 했다. 하지만 뛰어나다고 해 봤자 쌀 한 톨 안 나오는 ‘잉여짓’이고, 그래서 잉여들은 이를 ‘쓸데없는 고퀄(quality)’, ‘재능 낭비’라고 부른다.



 현재의 20대가 공유하는 잉여 정서는 과거의 ‘신세대’나 ‘X세대’, ‘88만원 세대’처럼 어느 한 세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특정 나이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30대 이하 모두가 경험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잉여로 만든다(『잉여사회』)”는 의미다. 최서윤씨는 “현 체제가 잉여를 만들어 내고 있다. 노동의 유연화와 기술의 발전으로 사회는 소수의 인간만 선택한다”고 말했다.



 대체로 암울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자칭 잉여라며 ‘잉여 영화’를 찍은 두 감독의 이야기다.



 “영화를 찍기 위해 만났던 사람 중엔 애니메이션 보느라 2~3년 집에만 있던 사람이 있다. 잉투기에 나가면서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은 애니메이션 수출일을 한다. 뭐든 계기를 통해 하고 싶은 걸 찾을 수 있다면 잉여짓이 소위 말하는 생산성으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엄태화 감독)



 “우리의 이야기는 젊어서 고생하라든지, 청춘이니까 할 수 있다는 식의 성공담이 아니다. 우리도 도전의식을 갖고 준비해서 떠나지 않았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고 전진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좋아하는 일이 생산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이호재 감독)



홍주희 기자·어고은 인턴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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