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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제자 윤석오>|<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4계 여록(138)|손원일

<헌병독립 안>
방위군 사건으로 52년 3월 이기붕 씨가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이대통령은 나를 관저로 부르더니 국방을 맡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타진했다.
갑작스런 제의라서 얼떨떨했지만 나는 즉석에서『지금 전쟁수행 중이어서 곤란하겠다』고 이유를 대어 거절했다.
이 박사는 처음에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나 해군참모총장으로서 한 분야의 전투를 수행해야 할 임무가 더욱 막중하다고 강조한 나의 설명을 이해하고 결국 후임에 육군출신의 신태영 씨를 기용했다.
신씨는 구한말 우리 무관학교를 거쳐 일본육사를 나온 전형적 무인이며「6·25」에도 참전한 백전노장이었다.
이 일이 있은 지 한참 뒤의 일이다. 어느 날 이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그의 집무실로 갔다.
그 자라에는 진헌식 내무장관과 백선엽 육군·최용덕 공군참모총장도 있었다.
다소 상기된 표정을 지은 이 대통령은『긴히 협의할 문제가 생겼다』면서『내무부가 헌병을 대통령 직속으로 만들어야 군을 통솔할 수 있다고 건의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내무장관을 때놓고는 모두 깜짝 놀랐다.
내무부가 헌병의 독립을 건의한 이유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민주주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일본의 군국주의와 비유하면서 이 안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일본 군국주의에서는 헌병을 천황폐하아래 예속시켰지만 민주국가에서의 헌병은 지휘관을 돕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헌병사령관은 있어도 예 하 부대에 가면 헌병을 지휘관소속으로 두는 것입니다. 만일 독립시키면 군국주의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이를 경청한 이 대통령은『백 장군과 최 장군은 어떻게 생각하시오』라면서 두 분의 견해를 물었다.
두 분이 모두『손 제독과 똑같은 생각』이라고 거들자 이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더니『잘 알았다』면서 우리를 돌려보냈다. 이 일이 헌병사령부가 야당의원을 연행하는 등의 사건을 일으킨 부산정치파동 직전에 있었던 것임을 상기할 때 내무부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지금은 짐작할만하다.
그 뒤 이른바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관련한 정치파동이 야기됐다.
국회의원들이 출근「버스」에 단체로 27시간 이상이나 감금된 일이 벌어졌는가하면 서민호·정헌주·이석기·장홍염·양병일·임흥순·이용설·서범석·김의준·박정근·곽상훈 의원 등 11명이 공산당 관련혐의로 구속되었다. 이 무렵에 나는 이기붕씨 집을 비교적 자주 드나들었다.
이씨는 부산에서 조그만 2층집을 전세 내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이씨 집에 가니까 마침 특무부대장이던 김창룡 씨도 와 있어서 셋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때 김씨가『구속된 국회의원들이 공산당과 관련이 있는지를 알아보니까 사실과 다르다』면서『누가 이 대통령에게 잘 말씀을 드려야 할텐데 걱정이다』고 했다.
이 문제로 부산이 온통 들끓던 때라 자연 화제가 여기에 미치자 이씨가 하는 말이『나는 방금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난 사람이어서 곤란하니 손 제독이 들어가서 대통령께 의원들의 석방건의를 좀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정치파동에 대해서 깊이 아는바 없었으나 두 사람의 의견에 따라 그 길로 이 박사한테 달려갔다.
『국회의원의 구속으로 국내외의 여론이 나쁜 것 같습니다. 공산당과 관련이 없다는 얘기들이니 속히 석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건의하자 이 박사는『아, 그래. 다시 조사를 시키지』라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 후 이기붕 씨와 김창룡 대장을 만날 때마다 몇 번이고 다시 석방건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세 번이나 이 대통령을 만났다.
똑같은 건의를 여러 번 듣는 것이 노여웠던지 맨 마지막 갔을 때는 이 대통령이 화를 버럭 내면서『손 제독은 사실을 모르면서 야당 말만 듣는다』고 야단쳤다. 이 소리를 듣고「프란체스카」여사가 급히 오더니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는『그분을 흥분시키면 안 된다』고 해서 나는 여간 민망하지 않았다.
다시 군대얘기로 옮겨서 이 대통령의 대일 감정 한 토막을 소개할까 한다.
동란 때의 일이다.
북의 군대가 파죽지세로 밀려 내려와 아군이 남 으로 남으로 후퇴할 때였다.
「맥아더」사령관이 일본군을 훈련해서 한국에 상륙시키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해 왔다. 이때의 화급했던 사정으로 봐서는 이 제의를 받음직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대통령은『만일 그럴 경우에는 나는 일본군과 싸우지 북괴와는 싸우지 않겠다』면서 단호히 거부했다는 말을 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들은 일이 있다.
53년 6월 전쟁이 뜸해졌을 때에 나는 당시 신익희 국회의장, 백 두진 재무장관 등과 함께「엘리자베스」영국여왕 대관식에 참석 차 출국했다.
「플리머드」에서 급작스런 귀국 전보를 받았을 때는 이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세계가 떠들 썩 할 때였다. 나는 즉각 귀국해서 이 대통령에게 갔더니 바로 국방을 맡으라는 것이 아닌가.
6개월만 해서 포로석방 파문을 가라앉히겠다는 생각으로 입각한 것이 결국 3년간이나 재직하면서 전쟁 뒤처리를 떠맡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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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