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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 유격전⑮ - 백마부대(1)

평안북도 정주군 일대의 반공 청년들을 중심으로 편성됐던 유격 백마부대는 북위 40도선에 가까운 대화도·애도·단도·암도등을 거점으로하여 철산반도 연안의 섬들을 방어하며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북괴군의 징집을 피해 오봉산·독장산·백벽산·묘두산 등에 들어가 있던 반공 청년학생들은「유엔 군이 진격해 오자 하산하여 치안대를 조직하고 적 패잔병을 소탕했다.

평북반공 청년들로 조직|대화도 등에 거점, 항전하며 피난민엄호|무기 모자라 창 만들어 육탄전 벌이기도|모나즈 광산서 애국인사 8백여명 구출‥·적 1개대대 전멸시켜

정주에 입성했던 「유엔 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불과 3일만에 후퇴하자 이들 청년학생들은 전투대를 편성, 항전하며 피난민들 철수도 엄호했다.

묘도로 철수한 정주군내 치안대원 3백여명은 후퇴중인 육본 민간인 정보요원들과 함께 백마부대를 만들어 계속 싸우다가 51년 5월에는 이 부대 역시 서해안의 여러 「유엔」군 유격대 통합체인 「동키」부대의 제15연대로 개칭되었다.

▲김응수씨 (당시 백마부대장· 예비역 육군대위· 현 백마부대 전몰자 충렬탑 건립위 위원장·53) <나는 육본 정보요원 30여명을 데리고 내 고향인 신의주로 들어 갔다가 청천강 다리가 끊어져 후퇴를 못하고 정주로 들어갔어요. 여기에서 중공군에 대항해 싸우고 있는 갈산면·대전면·고덕면 무장치안 대원들을 만났습니다.

<묘도서 죽음 각오 혈전, 대전과>

50년 11월 22일 나는 이들을 통합해 부대를 편성하고 신의주 백마산성의 지명을 빌어 「백마」로 명명했어요.

나는 이날부터 대원들을 지휘, 일면 전투를 벌이며 피난민들과 부대를 묘도로 후퇴시킬 준비를 서둘렀지요.

광동 고지에 배치했던 고산면 치안대의 양도원 대장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오다 낙오돼 자결하고 말았어요.

11월 25일 묘도로 후퇴한 우리 백마부대는 피난민들을 규합해 부대를 확장하고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자체훈련을 하며 무사히 월동했습니다.

학생과 간호원들이었던 10여명의 여자대원들도 남자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어요.

겨울에는 청천강에서 밀려 내려오는 얼음 때문에 작전은 못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무기라곤 다발총 1백 30정과 경기 3정 밖에 없어 생각끝에 1백 30여명은 창을 만들어 무장시켰습니다.

1월초 대전면 치안대장이었던 최광조(전사) 동지를 육지로 내보내 전항을 알아 봤더니 전선은 이미 수원까지 밀려 내려가 있더군요.

12월 중순 묘도공격을 해오다 참패한 적은 포격으로 전멸시키겠으니 빨리 항복하라는 투항 권고문을 사람에게 휴대시켜 보냅니다.

적의 해안포 사격이 심해지고 식량마저 떨어져 우리는 51년 2월 24일 탈취해 놓은 북괴 합작사 배 40여척을 이용해 피란민 5천여명과합께 초도로 내려왔어요.>

▲백금용씨 (당시 백마부대원-·현 인천서 사업·51) <우리 대전면 치안대는 10월 하순 숙천에 투하된 「유엔 군 낙하산 부대와 함께 적 패잔병 퇴로를 막고 많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묘도에서 훈련중이던 50년 12월 17일 괴뢰군 38경비대 1개대대 병력이 해안의 직사포와 박격포지원을 받으며 간조시간을 이용, 공격해 들어왔어요.

김응수대장이하 간부들은 즉시 작전계획을 세우고 소총부대와 따발총 부대를 참호를 따라 배치시키더군요.

우리 대원들은 까맣게 밀려오는 적을 보고 모든 증명서들을 찢어버린 후 가족들이 시체라도 찾으면 죽은 날짜나 알게 한다고 흰 종이에 일시를 써넣었어요.

갯벌을 걸어 들어온 적이 섬으로 상륙하려는 순간 우리는 일제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총탄세례를 당한 적들은 모조리 쓰러지기 시작하면서 아직 안맞은 자들은 갯골바닥으로 엎드립디다.

갯골 물속에 넣었다 뺀 적의 총들은 모두 격발기가 얼어붙어 한발의 응사도 못하더군요.

잔존한 적병력은 후퇴해 전열을 정비한 후 다시 공격을 해 왔어요.

다시 우리와 접전이 붙었을 때는 이미 조수가 들어와 갯골에 괴기 시작했어요. 바위틈에 매복했던 창 부대와 수류탄 부대가 상륙작전의 적들을 향해 일제 돌격하며 고지에서는 경기사격을 해댔어요.

살아 남아서 패주하던 적병들도 밀려 들어온 조수물 때문에 갯골에서 익사하고 말았어요.

후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이날 우리를 공격해 왔던 적 38경비대 제1대대 6백 50여명은 단 한명이 살아 나갔을 뿐 전멸 됐더군요.

우리 대원들은 다음날 썰물 시간에 나가서 죽은 적들의 옷과 신발을 벗겨다 신고 각종 화기 90여정과 실탄 15만 여발을 주워 왔어요.

이 전투에서 노획한 무기는 아직까지 비무장인 대원들을 무장시키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아군 전선을 찾아 묘도를 출발했던 우리백마부대는 51년 2월 26일 초도에 상륙했습니다. 대원과 피난민들이 탄 40여척의 배가 들어가니까 초도에 있던 수월부대는 우리를 적으로 알고 야단들입디다. 3월 초 구월 부대장 김종벽 대위가 초도로 찾아와 황해도 은율군 합작사에서 실어가고 있는 적의 쌀을 기습해 노획 해야겠으니 함께 작전을 하자고 하더군요.

<땅굴속 반공청년 6백명 구출>

그래서 우리는 구월 부대와 함께 월사리 상륙작전을 벌여 적 중화기 중대를 전멸시켰던 겁니다.

우리는 3월 하순 부대를 초도에서 석도로 이동했습니다.

4월초「동키」사령관 「버크」소령이 석도로 우리부대를 찾아와 기간요원이 될 대원 63명을 백익도로 보내 훈련을 받게 하라는 거예요.

김응수 부대장은 이를 쾌히 받아 들었어요. 나는 4월 초순 육군 첩보대 김인칙 소령의 공작원 30여명을 청천강 입구로 상륙시켜 주기 위한 전초 작업차 대원 60여명을 데리고 운무도 파견대장으로 올라갔습니다.

김소령은「코스」를 변경해 이 지점으로 올라 오지 않았어요.

4월 중순 사문벌을 받고 있다가 섬으로 피신해 나온 청년 2명을 포섭, 반공 청년 1천여명이 평양 박천군 덕안면 논 벌판에 굴을 파고 숨어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나는 즉각 어선 10여척을 나포해서 이를 덕안면 땅굴 속에 숨어 있다는 반공 청년학생들의 구출작전에 나섰습니다.

덕안면 반대방향에 우리 주력을 침투시켜 적의 추의를 집중시키고 15일 동안 야음을 이용해 김종순(현 인천경찰서 근무) 권우빈동지등 6백여명을 배로 실어 내왔어오.

5∼6개월씩 땅굴 속에 앉아만 있던 청년들의 모습은 정말 처참합디다.

얼굴은 머리와 수염이 덮어 버렸고 걸음도 거의 못 걸어요.

이틀을 실어내 오다가 도중에서 발각돼 괴뢰군 대병력이 주둔하는 바람에 나머지 4백여명은 끝내 구출을 못했어요.

4월 하순엔 본부에서 발동선을 얻어 가지고 어영도 앞으로 올라가 괴뢰군 경비병들과 백병전을 벌인 끝에 적해군서 징발해 쓰고 있는 조양호를 나포해 왔어요.

나는 52년 10월 하순 철산반도 앞에서 「유엔 군의 오폭을 당해 전사직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나왔어요.

이 날 우리배에 같이 승선했던 승석균 정보참모를 비롯한 대원 47명은 전원 오폭에 즉사했고 나만 파손된 배조각을 잡고 표류하다 구출 됐어요.

▲임응화씨(당시 백마부대 참모장· 현 사업·56) <우리 백마부대는 1951년 5월 「등키」 15연대가 돼 대화도로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석도에서 부대의 발인 선박을 대부분 ○○부대 한테 뺏기고 2척만 가지고 갔어요.

이 선박들은 대구 육본에 갔다 돌아오던 김응수 부대장이 시비 끝에 회수해 가지고 왔어요.

5월중순부터는 이태규대원(현 동 서울상고 교사) 등이 중심이 돼 철산 모나즈 광산에서 강제 노역중인 애국청년들의 구출작전을 벌였어요.

이 광산은 원래 최태섭씨 (현 한국유리 사장)의 소유였던 것을 북괴가 소련장교의 감독을 받으며 운영해 채굴된 광석은 모두 소련으로 보내고 있었어오.

우리는 모나즈 광산에서 8백여명의 반공 인사들을 구출해 냈어요. 그후로도 계속 구출작전을 필 계획이었으나 중공군 148사단의 주둔으로 좌절되고 말았어요.

우리부대는 납섬의 갈매기알을 25만여개나 채집해 5만개는 부식으로 썼고 20만개는 인천에 갖다 팔아서 대원들의 농구화와 피복을 사왔어요.

<기습받은 중공군 혼비백산>

51년 6월에는 「동키」14연대가 된 평북부대가 김찬근 부대장 지휘하에 묘도로 올라와 주둔합디다.

우리 백마부대는 대화도 인근의 도서들을 완전 점령한 후 5월 26일 신미도를 기습공격 했습니다.

깊은 잠에 빠졌던 중공군들은 혼비백산해「팬츠」바람으로 도망치더군요.

이 전투에서 우리는 적 28명을 생포하고 소제 권총1정 등 각종 무기 40여정과 「항미원조」라고 쓰여진 위문대 33개를 노획했어요.>

◇주요일지(1952년 1월 4· 5· 6·7일)

※1월4일▲서남지구 공비소탕 전제 2단계 돌입 ▲이대통령, 국군 전 장병에게 신년 특제 담배 하사 ▲영군「수에즈 시 봉쇄

※1월5일▲휴전회담, 포로교환분위무진전 ▲북괴, 「유엔 가입 다시 신청 ▲ 「처칠」 수상, 「뉴요크 도착

※1월6일▲미 「제트」기, 3회 공중전에서 적 「미그」기 5대 격추· 10대 파괴 ▲ 상무대」 개소 및 명명식

※1월7일▲고랑포 서방서 격전 계속 ▲한국공군, 평양-사리원 간의 보급로 폭격 ▲휴전회담, 포로교환 분위무성과 ▲북한방송, 휴전회담의 미측 태도 비난 ▲「아이크 ,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지명 수락 언명.

<정정>

본 연재 344회의 「중공군」왕일선은 「괴뢰군」으로, 345회 중의 「이진학」은 「이종학 으로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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