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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역사 새로 쓴 그, 12년 영광 뒤로하다

‘호두까기 인형’이 다음달 2일부터 전국 투어에 들어간다. 최태지 단장의 관심은 온통 여기에 쏠려 있다. “일에 몰두하는 게 잡념을 없애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최태지(54)가 마침내 국립발레단을 떠난다.

 그는 지금껏 12년을 국립발레단장으로 지내왔다. 1996년 처음 임명돼 2001년까지 6년간 자리를 지켰고, 잠시 떠나있다 2008년 컴백해 다시 6년간 일했다. 임기 3년의 국립발레단장을 4차례나 한 셈이다. 정치적 이유 혹은 무능·비리 등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예술기관장이 숱한 것과 대조적이다. 2000년대 이후 최장수 국·공립 예술단체장이었다.

 때문에 “국립발레단 50년 역사는 최태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무용계의 평가는 과장이 아니다.

 최 단장이 취임하기 전인 1990년대 중반, 국립발레단은 민간의 유니버설발레단보다 한참 위상이 떨어졌다. 공연 작품은 적었고, 무용수는 부족했으며, 세계적 수준의 작품이란 언감생심이었다.

 그걸 최 단장이 돌려놓았다. 1년 120회 이상의 공연과 90여 명의 단원 등 외형을 키웠고, 유리 그리가로비치·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등 세계적 거장의 작품으로 라인업을 구축했다. 단원제·등급제·연봉제 등 경쟁 시스템으로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한국 발레의 르네상스를 주도해왔다. 덕분에 국립발레단의 위상은 높아졌고, 평균 유료 객석 점유율도 90%를 넘겼다. 연말 공식 퇴임하는 그를 25일 만났다.

 - 96년 서른일곱 나이로 국립발레단장이 됐다.

 “파격 인사였다. 나도 어리둥절했다. 난 재일동포다. 83년 게스트 무용수로 처음 국내 무대에 섰고, 87년 국립발레단원이 됐다. 93년 은퇴 후 발레단 지도위원이었다. 한국에 별 연고가 없었는데, 그게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한 듯싶다. 당시 대학 무용과 입시 비리가 터지면서 지연·학연 등에서 자유로운 인사가 단장을 해야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행운이었다.”

 - 취임 직후 ‘해설이 있는 발레’를 시작했다.

 “취임 일성으로 두 가지를 약속했다. 한 달에 최소 한번 공연하겠으며, 국립에 걸맞은 정통 클래식 발레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해설이 있는 발레’는 발레 대중화를 모토로 내세웠다. 무료였다. 당시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로비까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성황이었다. 사실 내 의도는 무용수를 어떻게 하든 무대에 많이 세우려는 것이었다. 군살 많은 발레리나라면 말 다한 것 아닌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공연 기회 생겨야 긴장감 갖게 되고 훈련하게 되고 기량 는다. 실전보다 더 좋은 연습은 없다.”

 - 90년대 후반 러시아 볼쇼이 버전의 ‘백조의 호수’ ‘스파르타쿠스’ ‘호두까기 인형’ 등이 화제였다.

 “러시아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마음을 사야 했다. 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더니 ‘한국도 발레 하나?’란 반응이었다. 콧방귀도 안 뀌었다. 김매자 선생이 중간에 다리를 놓았고, 가까스로 한국에 모셔올 수 있었다. 공항까지 픽업 나갔고, 24시간 늘 대기했다. 새벽에 집 앞에서 기다려 차로 모셔왔고, 커피를 타 드렸으며, 가족까지 세밀하게 챙겼다. 운전 기사이자 비서였고, 매니저였다. 그리고 ‘당신 작품으로 변방의 한국에 발레가 꽃을 핀다면 그 또한 보람 아니신지’라며 간절히 요구했다.”

 - 국립단체장인데, 자존심 상하지 않았나

 “당시 한국 발레 수준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은 사치다. 유리 선생은 위대한 안무가다. 그가 직접 내한했을 때 연습실 공기가 달랐다. 단원 모두가 신이 나 열정적으로 몰입했다. 그게 거장이다. 김용걸·김지영·김주원 등이 현재의 위치에 올 수 있었던 데엔 유리 선생의 공도 컸을 듯싶다. 지금도 감사하고 존경한다.”

 탁월한 외모, 특유의 친화력, 뛰어난 업무능력 등 최 단장은 소위 ‘잘난’ 여자다. 무려 12년 장기집권을 했으니 무용계의 시샘과 질투도 컸었다. 그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난제를 하나하나 돌파해왔다.

 하지만 그에게도 불운은 있었다. 바로 남편이었다.

 85년 결혼한 최 단장은 두 딸을 낳았고, 2002년 이혼했다. 2년 뒤 임준호 변호사와 재혼했다. 공연장에서 다정히 있는 모습이 여러 번 목격되는 등 둘은 소문난 잉꼬부부였다. 하지만 임 변호사가 CNK 주가 조작 사건에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던 중, 지난 4월 자살하면서 둘의 결혼 생활은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됐다. 사망 당시 번개탄을 피운 차 안에서 임 변호사는 “사랑한다”는 내용의 유서와 함께 최 단장의 사진을 품고 있었다.

 - 7개월 가량 지났는데.

 “두고두고 가슴을 치는 게 있다. 남편은 지나가는 말처럼 ‘당신은 발레를 너무 사랑해’라고 했다. 그 얘기가 ‘왜 나는 안 봐줘’라는 걸 이제야 알겠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다. 그의 고민에 귀 기울였다면, 아픔을 같이 했다면 과연 그런 극단적 선택을 했을까. 너무 밉고, 너무 미안하다.”

 - 그래서 퇴임을 결심했는지, 연임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때 그만두겠다고 했다. 장관에게도 여러 번 청했다. 그런 일 겪고, 어찌 제 정신이겠나. 하지만 조금 지나 마음 추슬렀다. 12년을 이끌었는데, 이렇게 그만두는 게 과연 도리인가 싶었다. 지난 6개월, 정말 이 악물고, 티 안 내고 버텼다.”

 - 차기 단장으로 강수진씨가 유력하다

 “나도 그렇게 들었다. 국내 경험이 없어 우려의 목소리 있지만, 난 잘 하리라 확신한다. 세계 최고 발레리나 아닌가. 단원 기량은 더욱 향상될 것이고, 발레 전용관·발레 학교 등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 다음에 또 단장 제안이 들어온다면

 “그만큼 했는데 충분하다. 발레는 젊은 장르다. 세대교체가 계속 이뤄져야 한다. 공직이 아니라도, 발레로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글=최민우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최태지=1959년 일본 교토 출생. 부모 두명 모두 한국인이었고, 2남2녀 중 막내였다. 아홉 살 때 발레를 시작했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파리에 발레 유학을 다녀온 뒤 83년 국립발레단 무대에 서게 되며 한국과 연을 맺기 시작했다. 올해로 한국 생활 30년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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