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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잠에서 깨어난 청담동 "럭셔리 브랜드 10여곳 자리 없어 대기중"

해외 럭셔리 브랜드가 잇따라 진입하면서 청담동 명품거리가 활기를 되찾고 있다. 버버리(왼쪽)가 국내 첫 플래그십 스토어를 내년 오픈할 예정이고, 크리스찬 디올(오른쪽)도 내년 재오픈을 앞두고 매장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있다.

한겨울에, 이제야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것일까. 청담동 얘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경제 불황으로 침체됐던 청담동 명품 거리가 다시 조금씩 활력을 되찾고 있다. 소비심리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데 청담동이 다시 주목받는 건 여기를 떠났던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가 하나 둘씩 다시 돌아오면서부터다. 청담동에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청담동 새 식구…A&F·끌로에·버버리

 지난달 31일 청담동은 오랜만에 북적였다. 한국에 정식 수입되기도 전부터 이미 한창 때 폴로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는 미국 유명 캐주얼 브랜드 아베크롬비 앤 피치(A&F)가 한국 첫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었는데 매장에 들어가려는 고객이 몰려 100m 넘게 긴 줄이 선 거다. 인근의 한 건물주는 “이 브랜드 특유의 모델 마케팅(웃통 벗은 남자 모델을 매장 입구에 세워 고객이 함께 사진을 찍도록 하는 마케팅)에 힘입어 호기심으로 한번 찾은 반짝 효과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북적이는 인파를 보니 반가웠다”며 “1990년대 후반 이후 가장 활력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매장이 문을 연 바로 다음날인 이달 1일엔 까르띠에 등이 속한 프랑스 리치몬트그룹 소속의 럭셔리 브랜드 끌로에도 국내 첫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었다. 그런가 하면 크리스찬 디올은 현재 리모델링이 한창이고, 주유소가 있던 청담 사거리 한 코너에는 버버리가 가림막에 대형 버버리 광고를 붙이고 건물 신축 공사를 한창 진행하고 있다. 버버리는 내년 하반기 이 자리에 국내 첫 플래그십 스토어를 연다.

높은 임대료 등의 이유로 최근 10여 년간 비어있던 퀸빌딩 1·2층에 최근 커피숍이 입점했다.
“럭셔리 브랜드, 청담동 건물주에 백기 투항.”

 경기 침체와 고가 임대료 때문에 청담동을 떠났던 유럽 럭셔리 브랜드 등이 이처럼 속속 청담동에 다시 머리를 들이미는 이유는 뭘까.

 버버리 플래그십 스토어를 진행하는 글로벌 부동산 컨설팅사 쿠시먼 앤드 웨이크필드의 김성순 이사는 “기싸움”으로 설명한다. 그는 “경기 침체기 이후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가 청담동 건물주와 임대료를 놓고 기싸움을 벌였다”며 “최근 상황은 소위 명품 브랜드들이 백기 투항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무슨 얘기일까.

 청담동 명품 거리는 대표 상권인 강남역의 매장 임대료(㎡당 60만원·평당 200만원)보다는 낮지만 ㎡당 17만원(평당 50만원)으로 상당히 비싼 수준이다. 이곳에선 매장을 대략 165㎡(50평) 이상 크게 내기 때문에 임대료로만 한 달에 수천만원을 내야 한다. 가뜩이나 부담스럽던 차에 경기 불황이 겹치자 세입자 입장에선 자연스럽게 임대료 인하를 요구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임대료가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김 이사는 “럭셔리 브랜드는 임대료 인하를 기대했지만 건물주들은 몇 년 동안 건물을 비워놓을망정 임대료는 자신들이 정한 기준 이하로는 절대 내리지 않겠다고 버텨 결국 럭셔리 브랜드들이 손을 든 것”이라며 “이곳 건물주는 대기업 오너 일가나 강남에 다른 건물을 여러 채 갖고 있는 땅부자가 많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명품 거리 한복판에 있는 퀸빌딩이다. 과거 캘빈 클라인이 들어와 있었으나 2000년대 초 이 브랜드가 떠난 후 10여 년 가까이 비어 있었다. 이곳 역시 높은 임대료가 원인이었다. 그러나 최근 외관을 유럽풍으로 꾸민 카페 드 파리라는 커피숍이 이 건물 1, 2층에 매장을 열기 위해 내부 공사를 마친 상태다. 버버리 역시 청담동 입성이 쉽지 않았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는 "당초 주유소였던 이 땅이 나오자 눈독을 들였으나 임대료 산정을 놓고 땅 주인과 주인 아들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진통을 겪었다"고 말했다.

 청담동 상가를 주로 거래하는 백인범 부동산갤러리 대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갤러리아백화점부터 청담사거리 사이 임대가격은 되레 올랐다”며 “럭셔리 브랜드 10여 곳이 대기 중인데 자리가 없다”고 말했다.

 올해로 10년째 같은 자리를 재계약한 루이까또즈는 최근 214.5㎡(65평) 규모의 매장을 재계약하면서 보증금 10억원 선, 월세 3000만원을 내기로 했다. 까르띠에는 10년 전엔 보증금 10억원에 월세 7000만원으로 계약했으나 건물주 요구로 현재 월세 9000만원을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몇몇 럭셔리 브랜드가 임대료를 높여 재계약하자 이러한 추세가 급속히 번져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백 대표는 “특히 A&F가 시세보다 매우 높은 가격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져 내년엔 더 오를 전망”이라며 “까르띠에는 2015년 재계약때 월 2억원을 넘길 것이란 말도 돌고 있다”고 말했다.

청담동의 독보적 가치

 백화점에서도 절대 갑(甲) 위치인 콧대 높은 해외 럭셔리 브랜드들이 왜 꼬리를 내렸을까. 전문가들은 청담동만의 독보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서울에서 청담동을 대체할 지역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 독보적 가치란 대체 뭘까.

 첫째, 좋은 상권이 되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인 구매력 있는 고객군 확보다.

 김 이사는 “청담동 명품 거리에 인접한 압구정동 현대·한양 아파트는 대표적 부촌”이라며 “한국에서 명품 매장을 옮겨 다니며 쇼핑할 수 있는 계층이 대단위로 몰려 사는 곳을 다른 데서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제품을 구입할 능력이 있는 소비자가 있는 곳으로 찾아 들어가는 건 당연한 이치”라는 설명이다.

 둘째, 강남역과의 비교 우위다.

 강남역은 하루 평균 유동인구가 100만 명에 달하는 최고의 노른자위 상권이다. 상가 임대료도 3.3㎡(평)당 평균 200만원으로 부동의 1위다. 대체 어떤 점이 이렇게 뛰어난 강남역보다 비교 우위를 갖고 있다는 걸까.

 샤넬의 한 관계자는 “강남역이 압도적 유동인구를 자랑하는 한국 최고의 상권인 건 맞다”며 “그러나 명품을 구입하는 고객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번잡한 곳을 싫어한다”고 말했다. 사람과 부대끼는 것 자체를 싫어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소비 모습을 노출하는 걸 꺼린다는 얘기다. 그는 “이 때문에 강남역 같은 곳은 유니클로나 지오다노 같은 SPA 브랜드가 선호한다”고 말했다.

 셋째, 상징성이다.

 청담동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최고의 명품 거리로 사람들에게 각인됐다. 이 때문에 청담동에 입점하면 자연스레 명품 브랜드라는 인식을 줄 수 있었다. 이곳에 자리 잡는 것만으로도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얘기다. 숙명여대 서용구 경영학과 교수는 “파리 몽테뉴 거리나 런던의 본드 스트리트처럼 명품 거리라는 독보적 지위를 누리는 곳에 자리 잡으면 홍보 효과가 어마어마하다”며 “한국에서는 청담동이 바로 그런 곳”이라고 말했다. 이곳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내느냐 못 내느냐에 따라 브랜드의 가치, 더 나아가 명품으로서의 자격까지 달라진다는 얘기다.

10월 청담동에 오픈한 아베크롬비. 개장 첫날 매장 현관 앞에 100여m의 줄을 설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여들어 화제가 되었다.

물건이 아니라 청담동을 판다

 또 다른 한 럭셔리 브랜드 관계자는 “진작부터 이곳에 입점하려고 노리고 있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며 “단순히 임대료 문제가 아니라 브랜드 이미지를 구현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려면 1층의 구조와 넓이 등 여러 조건이 맞아야 하는데 맘에 맞는 건물은 이미 포화상태”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또 “에르메스 등 많은 럭셔리 브랜드가 청담동을 벗어나 도산공원 앞을 택한 것도 비슷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으로 알고 있다”며 “에르메스 정도의 최고급 브랜드니까 역설적으로 청담동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청담동 명품 거리는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을 넘나드는 비싼 임대료 때문에 아무나 진입할 수가 없다. 사실 이곳의 매장들은 상당수가 적자를 보고 있다고 한다. 한 명품 관계자는 “매장을 운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안테나숍(시장조사, 광고 효과 측정 등을 목표로 운영하는 점포)으로서의 가치 때문”이라고 말했다.

  쿠시먼 앤드 웨이크필드 김 이사는 “사실 그냥 구매하기만 한다면 웬만한 아이템은 인터넷으로 가능하다”며 “최근 패션 매장은 단순히 옷을 사고파는 기능이 아니라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공간, 즉 공간을 파는 개념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A&F가 대표적인 예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인종 차별 논란이 있을 정도로 미국·유럽 시장에 집중했던 아베크롬비가 결국 아시아로 눈을 돌리며 한국에까지 상륙했다”며 “값비싼 명품이 아니지만 아시아 시장에서의 연착륙을 위해 플래그십 스토어를 내는 아시아 도시마다 명품 거리에만 입점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에서 청담동을 선택하기 앞서 홍콩에서는 침사추이 켄톤로드 루이뷔통 맞은편에, 도쿄에서는 긴자에 매장을 각각 오픈했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럭셔리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가급적 백화점에서 멀리 떨어지기를 바랄 것”이라며 “하지만 지켜볼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담동에도 중국 바람

 사실 청담동 명품 거리 분위기가 조금씩 살아난다는 조짐은 2010년 하반기에 있었다. 구찌 리모델링이 진원지였다. 구찌는 2010년 말부터 15개월간 리모델링 공사를 해 플래그십 스토어를 재오픈했다. 면적은 이전보다 1.5배 확장했고, 외관은 금빛 유리 소재를 사용해 더 화려하게 꾸몄다. 이후 페라가모와 루이뷔통 등 다른 매장도 경쟁적으로 리모델링 공사를 했다. 돌체 앤 가바나와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을 유통하는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청담 사거리 인근에 15층 규모의 신사옥을 착공했다.

 이렇게 청담동의 숨통을 트게 해준 건 중국 관광객의 영향이 적지 않다. 중국 관광객들은 한때 이곳의 주요 고객이었던 일본 관광객이 한두 명씩 소수로 다니는 것과 달리 버스까지 대절해 단체로 오는 경우가 많다.

 김태형 까르띠에 청담메종 매니저는 “주말·평일 구분 없이 중국 관광객이 꾸준히 온다”며 “가족 단위나 5명 이상 그룹으로 오는 경우가 많은데 제품 가격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VIP룸을 만들어 이들을 위한 프라이빗한 공간을 제공하고 중국어 통역 직원까지 뒀다.

 강남구청 김청호 지역경제과장은 “2010년부터 청담동 명품 거리가 일본과 중국의 부유층 관광객의 관광 및 쇼핑 코스로 떠오르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다”며 “최근 일본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다소 타격을 입고 있지만 중국 관광객 소비가 워낙 급증하고 있어 청담동이 중국 관광객과 함께 동반성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유성운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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