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삶과 추억] 초대 주월남 한국군사령관, 예비역 중장 별세

채명신 장군(가운데)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6년 7월 20일 소장에서 중장으로 승진했다. 사진은 베트남전 종합보고를 받은 뒤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채장군에게 중장 계급장을 달아주는 모습. [중앙포토]


김일성의 손을 뿌리치고 월남한 열혈 반공주의자, 박정희와 손잡고 5·16 군부 쿠데타에 가담했지만 유신에 반대하며 직언을 마다하지 않은 소신파 군인.

미군도 탄복한 '게릴라전법' 채명신, 하늘의 별이 되다



 베트남전쟁(1960~75년) 당시 초대 주월남 한국군 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으로 맹활약했던 채명신 예비역 중장이 25일 오후 3시 숙환으로 별세했다. 87세.



 1926년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해방 직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평안남도 진남포 소학교(현재의 초등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일했다. 당시 “공산주의는 착취하는 사람이 없고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다”는 선전에 솔깃해 공산주의를 한때 좋게 생각했지만 곧 공산주의의 폐단과 한계를 간파하고 월남한 반공주의자였다.



김일성 손 뿌리친 반공주의자



 생전에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반공주의자가 된 계기를 고백한 적이 있다. 교사 시절 친하게 지내던 소련군 대위가 술을 마시면서 그에게 “공산당에 계급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공산당에 들어가지 마라. 너도 집안도 나라도 모두 망한다”는 말을 듣고 고민에 빠졌다. 결국 진남포의 소련군 부대에서 계급별로 1~6등급으로 나눠 철저히 차별해 식사를 배급하는 실상을 보고 계급 없이 모두가 평등하다는 공산주의에 대해 심각하게 다시 생각했다고 한다.



 이런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46년 2월 8일 군사정치학교인 평양학원 개교식 때 만난 김일성이 “젊은 동무가 필요하다”며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지만 노모를 핑계대고 뿌리칠 수 있었다고 한다.



 47년 월남한 그는 49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5기로 졸업하고 이듬해 6·25전쟁에 소위로 참전했다. 한국전쟁은 그가 혁혁한 무공을 세우는 무대였다. 그는 국내 최초의 특수유격전(게릴라전) 부대였던 백골병단을 지휘해 야전군인으로 명성을 쌓았다. 특히 이 시기에 북한의 카운트 파트에 해당했던 대남유격부대 길원팔 총사령관을 생포한 일화가 유명하다.



5·16 핵심 … 유신 땐 반대 직언



채명신 장군(왼쪽)이 69년 5월 9일 귀국 인사차 홍진기 당시 중앙일보 사장(오른쪽)을 방문해 베트남 파병군 활동상황을 적극 보도해 준 데 대해 사의를 표하고 기념방패를 전달하고 있다. [중앙포토]


 6·25전쟁의 진실을 젊은 세대가 잘 모른다고 안타까워 한 고인은 생전에 한국안보문제연구소 초청 강연에서 6·25전쟁의 교훈을 세 가지로 압축한 적이 있다. 첫째가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였다. 둘째는 동맹국인 미국과의 관계를 올바르고 굳건하게 해야 하고, 셋째는 내부의 적을 경계하라는 것이었다.



 고인은 53년 미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했다. 육군 5사단장 시절이던 61년 박정희 소장이 일으킨 5·16 쿠데타 당시 1개 연대를 빼내 서울에 입성함으로써 5·16의 공신이 됐다. 5·16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핵심세력인 이른바 5인위원회 멤버였다. 그러나 쿠데타 성공 이후 고인은 박정희 대통령과 다른 길을 걸었다. 고인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부대를 원대 복귀시켰고 박 당시 대통령이 세 차례 정계입문을 권유했으나 뿌리쳤다고 한다. 특히 유신 이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비판적 직언으로 눈밖에 나는 바람에 끝내 대장 계급을 달지 못했다.



 베트남전쟁은 고인이 무인으로서 걸출한 능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한때 ‘미군의 용병’이란 이유로 베트남 참전을 반대했지만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그를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자 명령을 따랐다. 65년부터 69년까지 4년8개월간 현장을 지휘했다.



 전장에서의 일화도 많다. 당초 미군은 파병된 한국군에 별도 작전 지휘권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고인은 미군 측에 자신이 생각한 승전 비법을 직접 설명해 독자적인 작전권을 확보했다. 고인이 창안한 ‘중대전술 기지전략’은 당시 웨스트 모얼랜드 파월 미군 총사령관이 탄복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원거리에서 사격을 하지 않고 완전히 근접하도록 베트콩을 유인한 뒤 공격하는 전법이다. 이를 통해 당시 우리군의 피해는 줄이고 적군에 큰 타격을 가해 무수한 전과를 올렸다.



전투모만 쓴 채 전장 누빈 강골



 김희상 한국안보문제연구소(예비역 육군 중장·정치학 박사) 이사장은 “베트남에서 게릴라전법으로 혁혁한 무공을 세우면서 특수전 분야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전략가”라고 고인을 높게 평가했다. 홍성민 안보정책네트웍스 대표는 “베트남에서 미군들은 게릴라전을 무시해 실패했다”며 “백선엽 장군이 6·25전쟁에서 유명해진 것처럼 고인은 베트남전에서 미군들로부터 군신(軍神)으로 불렸고 세계 전사에 소개됐다”고 말했다. ‘전우신문’ 소속의 베트남전 종군기자였던 김진석(77)씨는 “나에겐 철모가 필요없다”며 평생 철모를 쓰지 않고 천으로 만든 전투모만 쓴 채 부하들을 용맹하게 지휘했던 군인으로 고인을 기억했다.



 베트남전 이후 고인은 육군 2군사령관을 거쳐 72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공로를 인정받아 태극무공훈장·충무무공훈장·화랑무공훈장·을지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전역 이후에는 스웨덴·그리스·브라질 대사를 거치며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대한태권도협회 초대 회장, 월남전참전자회 명예회장, 베트남참전 유공 전우회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베트남 전쟁과 나』 『사선을 넘고 넘어』 등이 있다.



 유족은 부인 문정인씨와 1남2녀가 있다.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 발인은 28일 오전 7시. 02-3010-2631.



장세정 기자



관련기사

▶ 채명신 장군의 '평생 비밀' 北거물이 맡긴 고아를…

▶ 채명신 '일생일대 실수', 적에 포위돼 머리에 총 쏜 후…

▶ [현장에서] 살아선 조국, 죽어선 전우를 지키다

▶ 초대 주월 사령관 채명신 장군, 죽기전 아내에게…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